74화 15층 클리어
정화의 대리자를 쓰러트린 직후. 마력이 거덜 나고 혹사당한 몸뚱이가 덜덜 떨렸지만 멈출 시간은 없었다.
아직 퀘스트는 완료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퍼질 때가 아니다. 힘들게 정화의 대리자까지 잡았으니 히든 퀘스트도 완료해야지.
“그놈에 비교하면 이놈들이야 쉽지.”
“궤에에.”
빠르게 마을로 복귀한 난 가디언을 학살하다시피 쓸어 담았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고 마을 상태가 말이 아니어서.
마을 외곽은 초토화. 중앙까지 밀리기 직전이었다.
게릴라전을 할 상황은 진작에 지났고, 움직일 수 있는 언데드는 몸으로 벽을 만들며 가디언들을 막고 있다.
아까 분리된 작은 정화의 대리자는 크리쳐 프리스트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키이이이!”
“우우우!”
치고받고 난리가 났다.
파이팅 넘치게 서로의 안면에 스트레이트를 꽂아 댄다.
너 한방, 나 한방. 마음 같아서는 팝콘이라도 뜯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
‘확실히 보조 계열은 정면 승부에서 힘쓰기 어렵네.’
크리쳐 프리스트가 4성급이라고는 하지만 언데드 군단을 부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한 수 밀리는 게 사실.
뒤에서 언데드 군집을 조종해야 할 놈이 전면에 나섰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안 좋다는 거다.
난 은밀하게 작은 정화의 대리자에게 접근했다.
크리쳐 프리스트에게 정신이 팔렸는지 쉽게 뒤를 내준다.
‘큰 놈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
잘려 나간 발에서 재생된 놈이라 그런지 해치운 놈에 비해 덩치도 작고 느껴지는 신성력도 적다.
여전히 강력한 느낌인 건 맞았지만, 굳이 따지자면 4성급보다는 3성급에 가까운 정도?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다행이다.
프로즌 브레이크로 한 번에 처리하지 못했다면 저런 놈 수십 마리랑 싸우게 됐을지도 몰랐으니까.
그거야 지나간 일이니까 패스하도록 하고.
“안녕?”
“우우우!”
난 반갑게 인사하며 검을 들었다.
펄펄 흘러나오는 냉기와 강대한 신성력.
아직 10분 안 지났다. 망자귀환의 효과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
-쿠득!
몸통과 목을 잇는 틈을 정확히 찔러 넣었다.
급속 냉동되는 몸체. 놈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움직임이 서서히 멎는다.
마력이 바닥나서 프로즌 브레이크를 또 쓸 수는 없었지만.
“키햐아아아아!”
지금은 나 혼자가 아니거든.
그동안 당한 것이 서러웠는지 크리쳐 프리스트가 온갖 신성 마법을 쓰며 작은 정화의 대리자를 두들겨 팼다.
하나같이 냉기가 담긴 신성 공격.
이미 온몸이 얼어 기동은 멈춘 녀석은 그대로 공격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쩌적, 쩌저저적!
누적된 충격에 무너져 내렸다.
죽은 게 확실한 거 같다만 혹시 모르니까.
[파이어 밤 (B) Lv.9]
-콰아아아앙!
아예 가루가 되어 버리도록 터트려 줬다.
이 정도면 재생하고 싶어도 못 하겠지.
쇳물도 다 식어 버렸으니 신성력도 다 소모했을 거고.
남은 건 50기 정도 되는 가디언들뿐인데.
“저 정도야 금방 끝내지.”
끽해야 2성급인 놈들인데.
지척까지 다가온 가디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폭발을 일으켜도 되지만.
[절삭 (C) Lv.1]
-서걱!
새롭게 얻은 스킬을 써 보고 싶어서.
경쾌한 사선 베기에 가디언의 몸통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비스듬하게 잘린 경로를 따라 미끄러지는 상체.
그 사이로 놈의 핵이 드러났고.
“퉷!”
덕춘이가 침을 뱉어 핵을 녹여 버렸다.
가디언 한 마리를 잡는 데 고작해야 2초.
2성급이나 1성급이나. 내게는 큰 차이가 없었다.
“키아아아!”
“우오오오!”
작동을 멈춘 가디언들이 쌓여 둔덕이 만들어진다.
순식간에 줄어드는 가디언들.
숨통이 트인 언데드들이 다른 놈을 해치우러 달려갔다.
더 이상 놈들에게 승기는 없다. 일방적인 학살만이 남았을 뿐.
그렇게 10분이 지난 후에는.
“아아아아아!”
“우오오오오!”
“까가가각!”
마을을 부수던 모든 가디언들이 파괴되었다.
언데드 군단이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모은 듯한 울부짖음.
여기저기 썩어 표정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우는 것 같기도 했다.
“키햐아아악!”
그들의 수장 격인 크리쳐 프리스트도 목 놓아 비명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고.
나도 언데드 틈바구니에 껴서 소심하게 손을 흔들어 봤다.
“와아. 이겼다.”
환호성이 뚝 끊긴다.
이게 아니었나. 눈치 없이 껴든 건가.
거, 같이 싸운 마당에 왜 눈치를 주고 그러냐. 사람 민망하게.
“아, 알았어. 너희끼리 소리 질러. 나 저기 가 있을게.”
슬쩍 자리를 비켜 줬지만 언데드들의 시선은 내게서 떠나질 않았다.
웃음기 하나 없는 녀석들.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설마 날 공격하지는 않겠지?
에이. 양심이 있어야지.
아무리 탑이 막장이어도 그러지는 않을 거다.
난 고개를 주억거렸고.
“끼이이이.”
열댓 마리 남은 언데드 사이로 크리쳐 프리스트가 다가왔다.
허공에서 날아다니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부상을 입어 가뜩이나 창백한 몰골이 더 푸르딩딩해졌고, 찢긴 상처에서는 썩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눈빛은 맑았는데.
“키이이아아!”
미소 비슷한 표정을 지은 크리쳐 프리스트가 주변을 향해 크게 소리 질렀다.
“우우!”
“우우!”
살아남은 언데드들이 일제히 자세를 갖추더니 마을 중앙에 기립했다.
그 모습이 나름 박력 있다.
일종의 예를 다 하는 느낌?
마을 지켜 낸 자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는 걸까.
몬스터가? 그래도 예전에는 사람이었다고 일말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
기분이 묘했지만 특별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게 있어 몬스터는 죽여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퀘스트가 아니었다면 이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일도 없었다.
사냥꾼과 사냥감. 그게 나와 몬스터의 관계니까.
가끔 관계가 역전한다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뭐. 당장 좀 즐기는 건 괜찮겠지.”
“궤에.”
난 마을을 바라봤다.
90퍼센트가 무너졌지만 중앙은 비교적 멀쩡하다.
아직까지 퀘스트 실패 메시지가 뜨지 않은 거로 봐서는 이 정도면 커트 라인에 드는 모양.
전투가 끝난 직후, 열기가 남아 있는 공기에는 감정이 섞여 있다.
흥분, 오기, 분노, 처절함 등등.
언젠가 팀을 이루고 동료들과 전투를 치른다면 비슷한 광경을 보게 되겠지.
특히 커뮤니티 멤버들.
언제까지고 정체를 감출 수는 없으니까.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은 줄어들고 함께하는 시간은 길어질 거다.
부디 그때도 모두가 살아남아 있으면 좋겠는데.
“음?”
-우우우우웅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미래를 생각하던 와중, 여신상이 울리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번지는 빛.
-파앗!
점차 강렬해지는 빛이 폭사하듯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떠오르는 알림창.
[통가누스 수복-히든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15층의 진명眞名이 드러납니다.]
[15층-왕국의 방패, 휴고 아르테의 악몽]
15층의 진명?
낯선 알림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난 시야가 바뀌었음을 알아차렸다.
메마른 대지는 풀이 자랐으며, 무너진 마을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언데드의 모습이 온데간데없고, 허름하지만 경건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서 있다.
텅 비었어야 할 집에서는 아이와 노인, 젊은 남녀가 각자의 소일거리를 했다.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럽게.
거리를 배회하는 사람. 무장을 하고 경계를 서는 병사.
성직자가 분명한 인물과 물건을 파는 상인.
괴물이 나오는 던전이 아닌 사람이 사는 세상이 펼쳐졌다.
아주 평화로운 세상이.
‘환상?’
난 시선을 돌렸다.
내 앞에 우뚝 서 있는 얼음의 여신상.
온전한 모습으로 백색을 띤 조각상 앞에는 두 인물이 있었다.
거대한 덩치. 각진 얼굴이지만 오른쪽 눈썹 부근에 기다란 흉터가 있는 남자.
갑옷과 대검. 등 전체를 가리는 붉은 방패로 강렬한 인상을 주었지만, 웃을 때 접히는 눈가의 주름과 올라간 입꼬리는 순한 청년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 맞은편에 선 여인 역시 갑옷 차림이었는데, 남자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안개가 칠해진 듯 이목구비를 인식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둘은 입을 벙긋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맞잡은 두 손이 다정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남자와 같이 갑옷을 입은 여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위협은 아니었다. 검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끝없이 남자에게 말을 걸고 있었으니.
난 눈을 부릅떴다.
‘서리 불꽃 검?’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검. 그건 내가 가지고 있는 서리 불꽃 검이었다.
비록 완전히 똑같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분명하다.
한쪽 날이 백색인 검은 흔치 않으니까.
도대체 저 사람이 누구길래?
그전에 왜 이런 환영을 보여 주는 걸까.
반쯤은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고.
-우우우웅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
밝았던 배경이 지워지며 시커먼 재와 구름이 하늘을 가렸다.
마을이 불타올랐다.
검은 재가 새하얀 여신상을 더럽혔고, 무너진 잔해에는 핏물이 올라왔다.
메케한 연기와 지옥을 연상하게 하는 화염.
대적하는 마을 사람들과 그들을 압도하는 신성 병기의 싸움이 컷 편집으로 넘어갔다.
불에 휩싸인 병사.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히는 일반인. 장작더미에 올려져 화형당하는 성직자.
저 멀리 불길을 두른 누군가가 급하게 뛰어오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암전.
누군가가 눈을 감은 것처럼 찾아온 어둠 속에서 굵고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내가 그녀보다 먼저 부름을 받았더라면, 하루만 빠르게 돌아왔다면 결과는 바뀌었을까.】
일전, 킬더레스가 내게 말했던 것처럼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목소리.
난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고.
-파아앗!
15층 전체를 감싸고 있던 환상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니, 있었던 것마저 사라졌다.
나와 함께 싸웠던 크리쳐 프리스트와 스켈레톤 나이트, 더미 좀비. 몇 남지 않은 언데드들도.
산더미처럼 쌓인 가디언과 정화의 대리자도.
다시금 불타오르던 건물까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던 여신상 역시 부러진 채 밑동만이 남았다.
“이게 무슨.”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걸까.
다른 건 몰라도 기존에 있던 언데드는 있어야지 않나?
혹시 리젠? 당황스러운 마음에 마을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몬스터의 흔적은 없었다.
불길마저 꺼진 마을. 달아올랐던 공기가 거짓말처럼 식어 있다.
[적대적인 몬스터가 없습니다.]
[15층, 휴고 아르테의 악몽 클리어.]
[히든 퀘스트 클리어를 확인.]
[추가 스텟이 부여됩니다!]
[얼음의 정수가 지급됩니다.]
연달아 떠오르는 알림.
그와 함께 부서진 여신상의 밑동에서 빛이 났다.
마치 원래 그곳에 있었다는 것처럼 떨어진 손톱만 한 보석.
[얼음의 정수]
-얼음과 불의 교단의 보물 중 하나.
-차가운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난 보석을 가만히 내려보다 보물 주머니에 넣었다.
얼음과 불의 교단.
신성 왕국 히알틴.
서리 불꽃 검.
정화의 대리자를 사냥하고 얻은 불의 정수.
그리고.
“히알틴 유적의 열쇠.”
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릴카와 내기를 할 때, 서리 불꽃 검에 행운 스텟이 반응한 것도 이 때문일까.
“올라가자.”
“그에에.”
기분이 이상하다. 탑에 올라온 후 치열하고 악에 받친 적은 많았지만 찝찝하고 싱숭생숭한 감정은 느낀 적 없었으니까.
-우우웅
난 생성된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 * *
조현수가 16층으로 향한 뒤.
15층은 처음으로 변화를 맞이했다.
구름 낀 하늘.
축축한 대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은 무겁게 바닥을 훑었다.
지겹도록 보였던 불길은 어디 갔는가.
영면하지 못하던 언데드들은 어찌하여 잠이 들었는가.
-툭, 투둑
어떠한 대답에도 없는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너진 벽면을 타고 흐르는 빗물.
가랑비는 이내 소나기가 되어 땅을 두들기고 튀어 오른 잔방울이 어지럽게 퍼져 나갔다.
-솨아아아
파인 구덩이에 물이 고이고 타 버린 나뭇가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곳.
부러진 여신상의 밑동. 흙이 끼어 보이지 않았던 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 왕국의 방패, 휴고 아르테의 고향 통가누스.
-불의 열기를 식혀 줄 안식처.
화마의 흔적이 씻겨 나간 고요한 마을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휴고 아르테가 감사함을 느낍니다.]
[휴고 아르테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휴고 아르테가 불의 신, 페토로돈에게 기도합니다.]
[히든 퀘스트의 보상, 불의 가호가 조현수와 함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