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정화의 대리자
가디언들의 우두머리. 정화의 대리자를 향해 달리고 달렸다.
쉽지는 않았다. 다른 공격을 도외시한 채 나를 노리고 덤벼드는 놈도 있었다. 가디언의 거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장애물이었으니까.
살아서는 불을 내뿜는 신성 무기가, 죽어서는 흙더미로 된 바리케이드가 된다.
아군 언데드들의 시체 역시 마찬가지.
그럼에도 경지에 오른 스켈레톤 나이트의 컨트롤로 위험 구간을 돌파.
정화의 대리자가 가까워졌다.
우리의 의도를 파악한 걸까. 가디언들의 추격이 집요해진다.
“까각. 가각.”
스켈레톤 나이트가 내 쪽을 바라보더니 입을 딱딱거린다.
당연하게도 하나도 못 알아 먹었지만 의도 자체는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라 이거지?”
“까가각.”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안 그래도 슬슬 그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지형이 험하다. 가디언들이 지나가면서 파인 대지는 말이 달리기에 적합한 구조가 아니었으니까.
바로 뒤에 우리를 잡겠다고 신나서 달려오는 가디언들도 신경 쓰이고.
-타닥
말에서 뛰어내리자 스켈레톤 나이트가 검을 높이 쳐들더니 말고삐를 돌렸다.
마지막까지 역할을 다 할 생각인가.
곡예비행을 하듯 가디언 틈으로 달려간다.
스켈레톤 나이트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뭉텅이로 뜯겨나가는 가디언의 몸체.
어그로가 끌린 놈들이 방향을 바꿔 저쪽으로 달아난다.
“이 정도까지 판을 마련해 줬으면 우리도 제대로 해야겠지?”
“그에엑.”
난 앞으로 달렸다.
거대한 망치를 어깨에 걸친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화의 대리자.
크리쳐 프리스트의 축복을 받았건만 열기가 굉장하다.
괜히 불의 신전에서 만든 병기가 아니라는 건가.
범인이라면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겠지만.
“난 아니다, 이 자식아.”
이미 10층대를 오르면서 화기 내성 레벨을 올리는 중이다.
그냥 숨만 쉬어도 오른다고 봐야지.
지금도 그렇다.
[스킬 레벨 업!]
[화기 내성 (E) Lv.9]
어느새 Lv.9까지 올랐다. 아무래도 더위가 심해질수록 레벨이 빨리 오르는 모양.
덕분에 활동하는 것 자체는 문제없었다.
싸움이 지속 되면 또 모르겠지만.
애초에 난 전투를 질질 끌 생각이 없어서.
-파앗!
놈과의 거리가 100미터로 좁혀지는 타이밍, 속도를 더했다.
체급부터가 비교 불가.
정화의 대리자와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서는 더 빠르고 많이 움직여야 했다.
-투과과과곽!
아니나 다를까 놈이 워해머를 휘둘렀다.
바닥을 산산조각 내며 다가오는 일격.
멀리서 봤을 때도 어이가 없었는데 직접 당하게 생기니 말이 안 나올 정도다.
땅이 뒤집히며 파도를 일으킨다면 저럴까?
“크읏!”
단순히 달리기만으로는 피하는 게 불가능.
[파이어 밤 (B) Lv.8]
난 바닥에 폭발을 일으켰고 그 반동으로 튕기듯이 앞으로 날아갔다.
전투를 치르며 레벨이 한 단계 올랐기 때문일까 폭발은 강렬했다.
등짝이 얼얼하지만 영약을 먹은 덕분인지 버틸만 했고.
“공격이 먹히는지부터 확인해 볼까.”
놈의 발치까지 떨어진 난 그대로 검을 그었다.
마력을 듬뿍 불어넣어 강렬해진 냉기.
삽시간에 열기가 잦아들며 서리가 깃들었고, 놈의 무릎 관절에 검이 박히자.
-푸쉬이이이익!
수증기가 터지듯이 뿜어져 나왔다.
단숨에 물이 되어 증발한 서리.
뜨거운 수증기에 그대로 노출됐으면 심각한 화상을 입었을 거다.
나름대로 방어체제다 이건가.
“쓸데없이 까다롭군. 읏차!”
-콰아아앙!
아프지도 않은지 찔렸던 다리를 들어 내리찍는 녀석.
얼마나 무거운지 땅이 다 울린다.
그 기세에 주춤할 법도 하지만, 이미 난 훨씬 큰 대형종과도 싸운 적이 있어서 심리적 동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화갑룡에 비하면 이딴 놈은 뭐, 뜨끈한 깡통 로봇이지.
“내구도 테스트 들어갑니다.”
“그아아. 퉷!”
놈의 다리를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며 관절을 노렸다.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든 말든. 어차피 한자리에 1초 이상 있을 생각이 없다.
내가 만들어 낸 틈에 덕춘이의 침이 들어가자 빠르게 놈의 몸체가 부식하기 시작했다.
관절이 뻣뻣해지면 기동성은 줄어들기 마련.
여기에 서리 불꽃 검을 이용해 순간적으로 얼리기까지 한다면?
-쩌저저저적!
“부러지기 딱 좋은 상태가 되지!”
데미지가 누적된 무릎을 베는 동시에 파이어 밤을 터트렸다.
한 번?
그걸로는 부족하다. 아예 박살 낼 생각으로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콰과과광!
내부 외부할 것 없이 전 범위를 휩쓰는 폭격.
가뜩이나 굳었던 놈의 관절이 버틸 리 만무한 일격이었고.
“우우우우우!”
놈이 기괴한 울음과 함께 엎어졌다.
반쯤 뜯기다시피 떨어져 나간 다리.
지금이 기회다.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활성화됩니다!]
정화의 대리자 역시 골렘형 가디언.
분명 어딘가에 핵이 있을 거다.
-슈르르륵
잘린 지 얼마나 됐다고 놈의 내부에서 쇳물이 흘러나오더니 망가진 다리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골렘형인 만큼 자체 회복 기능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빠르다.
이렇게 된 이상 가능한 빠르게 핵을 찾아내 부숴야 한다.
“어디냐. 핵이 숨겨진 곳이 어디야!”
발버둥 치는 놈 위를 뛰며 권능을 발휘했다.
머리, 몸통, 어깨, 팔, 골반, 다리.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떨렸다.
믿을 수 없는 결과.
“없어?”
놈에게는 핵이 없었다.
아니, 그럼 대체 어디서 에너지를 끌고 오는 거지?
저만한 쇳덩이를 움직이려면 보통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게 아닐 텐데.
골렘이 핵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설마.
침을 삼키며 다시 바라봤다.
“그 자체가 핵인건가.”
미미하게 뿜어져 나오는 빛.
난 미간을 좁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게 답인 것 같았다.
[정화의 대리자]
-불의 교단의 신성 병기.
-불의 신, 페토로돈의 신성력을 빚어 만들어 냈다.
-몸체 안에 흐르고 있는 뜨거운 쇳물 형상의 신성력이 다할 때까지 정화를 멈추지 않는다.
알려 줄 거면 빨리 알려 주든가.
아니다. 4성급 개체인데 이만큼 정보가 뜨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
지금까지 놈이 보인 능력만 본다면 4성급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지경이니까.
달칸과 싸웠을 때도 지금보다는 고전했었다.
당연히 부족한 부분을 채울 만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놈 같은 경우에는.
“강한 신성력과 불. 핵도 없이 재생해 대는 사기몹.”
재생 하면 빠지지 않는 트롤도 목이 잘리면 죽는다는데 이놈은 그럴 것 같지도 않다.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쇳물.
그건 비단 몸통뿐만이 아니었고.
-쿠구구구국
-그그그그
다리를 재생시킨 놈 옆에는 작지만 똑같은 형상의 골렘이 생성됐다.
떨어진 다리부터 재생해 또 다른 가디언이 된다?
지들이 플라나리아야 뭐야.
이제 내가 상대해야 할 정화의 대리자는 둘.
간단하게 큰 놈, 작은 놈이라고 하자.
-콰아앙!
-쿠과과광!
큰 놈과 작은 놈이 동시에 망치를 휘둘렀다.
교묘하게 파고드는 공격.
바닥을 기다시피 공격을 흘리고 옆으로 달렸다.
파이어 밤을 날리고, 서리 불꽃 검으로 얼리기를 반복.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 공격을 피했으나.
“크학!”
결국은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옆면을 후려치는 망치.
팔이 으스러질 것 같은 충격이다.
일반인이었다면 다진 고기가 됐겠지.
“핥핥!”
덕춘이가 열심히 내 목을 핥는다.
회복 효과가 적용되며 통증이 잦아들었다.
위험하다. 단일 개체만으로 보면 4성급 수준이 아닌데 체내에 흐르는 쇳물이 다할 때까지 무한 재생이 가능하다. 신체가 절단된다면 증식까지 할 수 있고.
까다롭다. 무작정 때려 부수는 건 불가능. 기능이 멎을 때까지 치고받자니 언제까지 그 짓을 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이긴다 하더라도 마을은 전멸이겠지.’
히든 퀘스트의 요구는 마을을 지키는 것.
단순히 이놈만 잡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가장 좋은 경우는 언데드 군단들이 남은 가디언을 모조리 해치우고 날 도우러 오는 건데.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다.
“우우우우!”
잡생각 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겠다는 건가.
큰놈이 내게 덤벼들었다.
양팔을 크게 벌리며 안듯이 들어오는 녀석.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피할 공간이 적다.
어쩔 수 없이 멀찍이 자리를 피하는 순간.
-쿵! 쿵! 쿵! 쿵!
“거기 안 서! 젠장.”
작은 놈이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방심했다. 아니,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안 그래도 수적으로 밀리는데 저놈까지 합세하면 언데드들이 버틸 수 있을까?
얼핏 보니 크리쳐 프리스트까지 합세해서 막고 있기는 한데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정화의 대리자를 노려봤다.
‘무작정 놈을 토막 내는 건 답이 아니야. 신성력 자체를 없애야 해.’
하지만 어떻게? 신성력을 없애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악마종이 쓴다는 마기? 마기와 신성력이 상극이라는 말은 있지만 나한테는 마기와 관련된 스킬이나 아이템이 없다.
-치이이이익!
연달아 공격을 감행하는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일단은 쪼개지 않을 정도로. 계속해서 잔 상처를 만드는데 주력할 생각.
놈의 몸에 흐르는 쇳물은 신성력.
불의 교단에서 만든 신성 병기다운 열기를 지녔다.
“그렇다면?”
문득 든 생각.
불의 신. 불의 기운. 뜨거운 신성력.
반대로 식히면 어떻게 될까?
실험해 보자.
“덕춘아, 한 번 더 가자. 이번에는 작은 조각으로.”
“궤에에.”
[버프 다이스]
[3]
[집중]
버프 다이스를 돌리자 생성된 버프, 집중.
난 몸의 움직임, 시야의 이동, 마력의 흐름이 선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
정화의 대리자가 내리치는 망치의 궤적이 정확하게 보였고.
-콰아아앙!
이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사이드로 돌며 검을 찔러 넣었다.
이번에 노린 곳은 놈의 발등.
단단한 외피가 우그러들며 쇳물이 튀어나온다.
그와 함께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그에에, 푸우우우!”
직접 맞닿으면 피부가 익었겠지만 덕춘이가 내뱉은 불길에 수증기가 증발해 사라졌다.
나이스 덕춘이. 역시 영물이다.
-쩌어어어억!
놈의 안으로 들어간 검에 마력을 힘껏 불어넣었다.
한순간에 떨어지는 온도. 쇳물마저도 굳히는 냉기가 쏟아졌고.
“우우우우우우!”
정화의 대리인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 냈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
-콰직!
얼어붙은 놈의 발끝을 지르밟자 동강 나며 떨어진다.
몸체와 붙어 있는 부분은 빠르게 얼음이 녹아내렸지만 떨어져 나온 부위는 미동이 없었으며.
[정화의 대리자 일부가 기동을 멈춥니다.]
“됐어!”
시스템이 활동 정지를 선언했다.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크리쳐 프리스트가 축복을 내린 건지.
단순히 더위에서 벗어나라고 해 준 게 아니다.
이 망할 고철 덩어리를 해치우라고 걸어 준 거지.
내게 서리 불꽃 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공략법.
이대로 조금씩 갉아먹다 보면 어느 순간 정화의 대리자도 멈출 게 분명했다.
난 더 빠르게 놈을 난도질해 댔다.
피처럼 붉은 쇳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덕춘이가 침을 뱉어 부식시킨다.
벌어진 관절에 검을 쑤셔 넣어 냉기를 폭발시키는 것이 마무리.
반복적이나 결코 쉽지 않은 행위의 연속.
몸 곳곳에 박힌 얼음덩어리에 놈이 굼떠지려는 그 순간.
-취이이이이익!
정화의 대리자가 급격하게 달궈지기 시작했다.
틈새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
놈의 몸이 줄어들더니.
[정화의 대리자가 전투형으로 바뀝니다.]
“뭣?”
-콰앙! 쾅! 콰아아앙!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망치를 휘둘러 댔다.
반응하는 것조차 어려운 빠르기.
가까스로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위력에 밀려 나가떨어졌다.
둔중하게 퍼지는 통증에 숨이 턱 막힌다.
전투 모드? 그럼 지금까지는 뭐였는데.
“이익!”
생각을 잇기도 전에 몸을 던졌다.
놈이 달려왔다.
들어 올리는 워해머.
피할 수 있을까? 그러기에는 자세가 너무 안 좋은데.
막자.
빠르게 판단을 내린 난 검을 내밀었다.
검으로 망치를 막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지만 맨몸으로 맞는 것보다는 낫겠지.
-까드드드득!
다행히 검이 좋은 거라 부러지지는 않았는데.
“손목 부러질 것 같네!”
워낙 놈의 힘과 중량이 높아 받아 내기가 버겁다.
덩치가 작아진 만큼 기동력도 좋아진 건가. 워해머를 회수한 녀석이 옆으로 돈다.
기회다.
-파앗!
틈이 생기자마자 튕기듯이 일어났다.
조준도 하지 않고 터트린 파이어 밤.
이어서 디그.
“우우우?”
놈의 다리가 구덩이에 빠졌다.
넘어지지 않으려 몸을 숙이는 순간 검을 밀어 넣었다.
노리는 곳은 어깨.
밀도도 높아졌는지 저항감이 어마어마했지만 파이어 밤으로 추진력을 얻어 기어이 뚫었고.
-꾸드드드득
냉기를 불어 넣어 얼려 버렸으나.
-푸쉬쉬쉬!
어떻게 하기도 전에 녹아내렸다.
잠깐 멈추게 하는 게 한계인가.
전투 모드로 바뀌면서 열기도 강렬해진 것 같다.
그렇다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금 반격을 가해 오는 놈에게 밀려나며 이를 악물던 때.
[S급 권능, 스킬 합성이 활성화됩니다.]
반가운 알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