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적진을 향해
[히알틴 유적의 열쇠 (3/3)]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열쇠.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히알틴 유적으로 인도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아이템.
보물 주머니에서 꺼내 봤지만 반응은 없었다.
아쉽게도 여기가 유적은 아닌 모양.
난 머리를 긁적였다.
탑 내부에도 나름의 세계관이 존재하는 건가.
주변을 살필수록 마을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이 보였다.
[바엘 성직자의 석판]
-얼음과 불. 우리는 본래 하나였다.
[교단 서기관의 기록 조각]
-왕국의 검, 마그네타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왕국은 분열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름 모를 신자의 선언문]
-왕국의 방패, 휴고는 어디 있는가! 고향 땅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방관하는가. 그는 대체 어디 있는가!
지금은 언데드로 변해 버린 이들이 적었을 게 분명한 문장들.
아무래도 그거 같은데.
“교단이 분리되면서 치고받은 거 아닌가?”
승자가 불의 교단. 진 쪽이 얼음의 교단.
어찌 보면 흔한 스토리다.
분열돼서 싸우는 거야 현실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일이니까.
그 부분은 넘어가고 왜 이걸 보여 줬는지부터 생각하자.
마을을 공격하는 가디언과 그걸 막는 언데드.
언데드의 편에서 발생한 퀘스트. 답은 나왔다.
“이번에는 마을을 지키고 싶다는 거겠지.”
이미 다 무너진 마당에 그때의 상황을 재현해 봤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거야 내가 판단할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일지 모르니.
나의 판단이 맞은 걸까.
그동안 정보를 숨기고 있던 히든 퀘스트의 정보가 드러났다.
[마을 중앙에 진입했습니다.]
[퀘스트 정보가 공개됩니다.]
-파아아앗
-구구구구구
무너졌던 석상에서 빛이 나더니 주변의 잔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는 얼음의 교단의 여신상.
파괴되었던 마을이 삽시간에 원래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과거로 시간이 돌아가기라도 한 것처럼.
“와아.”
난 순수하게 감탄했다.
불길이 꺼지고 가루가 되었던 건물과 도로, 농가와 창고가 되살아나는 광경은 말 그대로 신비의 영역이었으니까.
-아아아아아!
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가디언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던 언데드들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신성력의 영향으로 무참하게 밀리던 놈들이 맞을까 싶을 정도.
그 원인은 내 앞에 있었다.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의 가호가 함께합니다.]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여신의 석상이 강력한 신성력을 내뿜었고, 놀랍게도 언데드들은 그 힘을 흡수했다.
신성력을 머금은 언데드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광경이다.
“어?”
순간 헛것을 본 건가?
난 눈을 감았다 떴다.
아주 잠깐. 1초도 되지 않은 찰나였지만 보았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뼈까지 삭아가던 언데드들의 모습에 사람의 형상이 겹쳤다 사라지는 것을.
지금은 다시 좀비와 스켈레톤, 펄스 위치의 형상으로 돌아왔지만.
변화는 있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던 언데드들이 저마다 무기를 꺼내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난 권능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보고 경악했다.
분명 1성급. 잘해 봐야 2성급이었던 언데드들이 하나 같이 스펙업을 했다.
[스켈레톤 워리어]
-2성급 몬스터.
-기존의 스켈레톤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는 전사입니다.
[스켈레톤 아처]
-2성급 몬스터.
-급할 때는 갈비뼈도 뽑아 쏠 수 있습니다.
[구울]
-2성급 몬스터.
-좀비의 상위 호환.
[아귀]
-2성급 몬스터.
-뜯어 먹히지 않게 조심하세요.
스켈레톤은 전문 직업을, 좀비는 상위 개체로 진화했다.
2성급으로 진화한 놈들만 절반이 넘었고, 더 놀라운 건…….
“3성급까지 있어.”
[스켈레톤 나이트]
-3성급 몬스터.
-기사의 의지는 외형을 따지지 않습니다.
[더미 좀비]
-3성급 몬스터.
-수십 마리의 좀비가 합쳐져 만들어진 끔찍하고 강력한 몬스터.
어디서 나타난 건지 뼈로 된 말을 탄 스켈레톤 나이트와 4미터 크기를 자랑하는 더미 좀비.
비록 그 수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전력이 늘어난 건 사실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못 믿을 광경이건만.
[펄스 위치가 신성력을 받아 모습을 바꿉니다.]
[크리쳐 프리스트]
-4성급 몬스터.
-성직자였던 과거를 바탕으로 부활한 부정한 몬스터.
-이 개체에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의 가호가 함께합니다.
언데드들의 수장 역할이던 펄스 위치가 무려 4성급 괴물이 되었다.
넝마와 같던 옷차림은 어디 가고 제대로 된 성직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소름 끼치게 맑았다.
언데드와 프리스트.
불가능한 조합이다, 상식적으로는.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눈앞에서 목격한 난 그 내막을 알 수 있었지만.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성직자.”
그게 펄스 위치의 정체였으니까.
이단이라는 이름 아래 펼쳐진 학살이 다시금 펼쳐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통가누스 수복 – 히든 퀘스트]
-통가누스는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를 모시는 마지막 마을입니다.
-두 개로 쪼개진 얼음과 불의 교단.
-신성 왕국을 삼킨 불의 교단에 맞서 싸워 통가누스를 지켜내십시오.
갱신된 히든 퀘스트.
난 마을 저편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있던 십여 기의 가디언은 스펙업 한 언데드들이 정리했다.
진짜 위협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구구구구궁
저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보여 준 건 애교였다는 듯 몰려오는 수백 기의 가디언.
그 너머에 위치한 대형급 괴물 하나가 불길을 뿜으며 걸어왔다.
매끈한 몸체는 강철로 되어 있었고, 끝없이 쏟아지는 불길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관절 틈마다 용광로를 연상시키게 하는 쇳물이 떨어져 내렸으며, 손에는 거대한 망치를 들었다.
[정화의 대리자]
-불의 교단의 신성 병기. (4성급)
-이단을 죽여라! 정화의 불길은 성전의 시작일지니!
아무래도 저놈이 적들의 우두머리 같았다.
“키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적대감을 보이는 크리쳐 프리스트.
난 아군, 일단은 같은 편으로 배정된 언데드 군단과 우리를 없애기 위해 다가오는 신성력 군단을 비교했다.
“양측에 4성급이 하나씩. 저쪽은 척 봐도 400기 이상. 이쪽은 잘 쳐 봐야 100마리?”
질로 따지면 아군 쪽이 낫다.
절반 이상이 2성급 이상으로 진화했으니까.
맞부딪치면 어떻게든 비빌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크리쳐 프리스트는 전투 특화 몬스터가 아니란 말이지.”
버프와 회복. 언데드 군단의 통솔과 특수 능력을 부여하는 서포터 겸 컨트롤 타워에 가까운 몬스터다.
반면에 저놈은 어딜 봐도 전투용 신성 병기였다.
대놓고 망치까지 들고 있었으니 내 예상이 틀리지는 않겠지.
내게 주어진 퀘스트 내용은 하나.
“마을을 지켜 내는 것.”
정확히는 마지막 남은 얼음의 교단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겠지.
아무래도 내게 퀘스트가 부여된 이유는 4성급 신성 병기, 정화의 대리자를 잡기 위함인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15층에다가 4성급을 풀어 놓고 있어.
양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내가 4성급 몬스터를 잡은 전적이 있다는 걸 알고 발생시킨 건가.
아마 후자가 원인인 것 같기는 하다.
“뭐 하나 친절한 게 없다니까, 이놈의 탑은.”
난 짧게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내가 할 일은 정해졌고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
9층에서 달칸을 잡았을 때와는 다르다.
난 더 강해졌고, 장비 스펙도 좋아졌으며, 덕춘이 역시 새로운 특성을 얻은 상태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아직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랑 밤을 부르는 자 칭호를 쓸 수 없어.”
쿨타임이 끝나지 않았다.
전력을 모두 보일 수 없다는 것.
억울하지는 않다. 탑이든 밖이든 세상 날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
모든 것이 준비됐을 때 닥쳐 오면 위기가 아니지.
난 보물 주머니를 열었다.
“나중에 스킬 합성 쓸 때 먹으려고 했는데.”
킬더레스에게서 받은 영약. 거인의 심장 정수.
난 망설임 없이 입에 넣었다.
쓴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B급 영약, 거인의 심장 정수를 흡수합니다!]
[힘 +21]
[민첩 +16]
[체력 +26]
[마력 +11]
[물리 공격에 강한 내성을 가집니다.]
[물리 공격 내성 (E) Lv.8이 생성됩니다!]
역시 B급 영약이라는 건가. 패시브 스킬도 준다. 그것도 레벨까지 달아서.
마력은 그리 오르지 않았지만 힘과 체력이 대폭 증가했다.
전신에 활력이 돌며 몸이 단단해진 기분이 든다.
느낌만이 아니라 진짜로.
질겨진 피부. 꽉 들어찬 근육.
뼈가 더욱 크고 단단해지며 오감이 깨어났다.
신체적인 변화와 함께 통증도 엄습했지만 입가를 한 번 비트는 거로 버텼다.
이런 거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뒹구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까.
조만간 저 달궈진 쇳덩이랑 싸워야 할 텐데 이 정도 고통이면 애교지.
“키도 좀 자란 것 같은데.”
이건 따로 측정할 방법이 없으니 넘어가고.
-키릭
난 서리 불꽃 검을 들어 올렸다.
마력에 따라 뿜어져 나오는 냉기.
거기에 맞춰.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의 신성력이 반응합니다.]
얼음 여신의 신성력까지 감돌았다.
그 모습을 본 크리쳐 프리스트가 괴성을 질렀다.
“키햐아아아!”
그것이 신호가 됐을까.
진형을 갖춘 언데드 군단이 마을을 향해 달려드는 신성 병기와 격돌했다.
파육음과 쇳소리. 괴성과 함성.
전장의 광기가 마을 전체를 감싸는 타이밍.
“다 죽여!”
나 역시 전투에 빠져들었다.
* * *
몇 시간 동안이나 지속된 전투.
좀비와 스켈레톤이 시간을 버는 사이 상위종이 유의미한 타격을 준다.
3성급 괴물인 스켈레톤 나이트가 가디언을 난도질하며 핵을 부쉈으며, 더미 좀비가 온몸을 던져 탱킹을 한다.
그럼에도 언데드 군단은 계속해서 밀렸다.
전술적으로 움직인다면 능히 400기의 가디언을 막을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저놈이 문젠데.”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시선을 멀리 던졌다.
일반 가디언은 문제가 안 된다. 상위 언데드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막아 낼 수 있으니까.
나 역시 서른 개가 넘는 가디언을 해치웠고.
문제는 가디언의 수장, 정화의 대리자.
저놈한테 당한 언데드가 두 자릿수다.
그중에는 스켈레톤 나이트와 더미 좀비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핵심 전력이 줄은 언데드 군단은 계속해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가 저놈을 잡아야 하는데. 내가 빠지면 얘네들이 가디언을 막을 수 있을까?
계산해 봤지만 잘 모르겠다. 그만큼 상황이 각박하다.
“키히이이익.”
그러던 때, 전장을 지휘하던 크리쳐 프리스트가 내게로 날아왔다.
불길을 맞아 곳곳이 타 버린 모습.
“끼이이.”
놈이 정화의 대리자를 가리켰다.
본인도 아는 거다, 이대로는 답이 없다는 걸.
나도 가고 싶다. 가고 싶은데 저기까지 도달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 모르고 저놈을 잡을 때까지 언데드들이 버틸지도 미지수다.
어디까지나 퀘스트는 마을을 지키는 것이었으니까. 적들의 수장을 해치우는 게 아니라.
“나도 답답하거든?”
“키이이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크리쳐 프리스트가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터져나오는 신성력과 빛.
[부정한 사제의 축복]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의 기운이 몸을 보호합니다.
크리쳐 프리스트가 축복을 걸어 줬다.
이게 기분이 묘하다.
몬스터한테 버프를 받는다라.
이질적인 감각이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확 내려간 주변 온도.
컨디션이 회복되며 몸이 가벼워졌다.
“그에에.”
덕춘이도 마찬가지.
더위에 허덕이던 모습이 사라지고 기운찬 모습을 보였다.
축복이 들어간 걸 확인한 크리쳐 프리스트가 상위종을 불러 모았다.
“따닥. 딱.”
“그으으으.”
스켈레톤 나이트 하나. 더미 좀비 하나.
스켈레톤 워리어와 아처가 각각 3마리. 구울과 아귀도 2마리씩.
“키이이이.”
크리쳐 프리스트가 다시 전장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건 정화의 대리자.
막대한 신성력을 쓴 크리쳐 프리스트의 안색이 창백했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놈도 아는 거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걸.
내가 적들의 수장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패배한다는 걸.
12마리의 언데드로 이루어진 별동대.
그건 언데드 군단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고.
“무슨 뜻인지 알았다. 나한테 맡겨. 덕춘이도 준비하고.”
“궤에에엑.”
동시에 내가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체할 것 없이 발을 박찼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적의 열세에 밀려 언데드들이 박살 나고 있으니까.
-가가가가각!
내 호위를 맡은 놈들도 속도를 올렸다.
기동력이 좋은 스켈레톤 나이트가 선봉에.
가디언을 후려치고 길을 뚫는 동시에 어그로를 끈다.
“잡아!”
전장의 균형이 무너진다.
내 명령에 구울과 아귀가 가디언들을 붙잡는다.
스켈레톤 아처가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하고, 스켈레톤 워리어는 스켈레톤 나이트가 잡히지 않도록 지원했다.
마지막으로 덩치 하나로 가디언을 압도할 수 있는 더미 좀비는?
“구어어어어!”
스켈레톤 나이트가 뚫은 길을 막으려 달려오는 가디언을 막았다.
“까각. 깍!”
적진을 휩쓸고 돌아온 스켈레톤 나이트가 내게 손을 건넨다.
타라는 의미.
난 녀석의 손을 잡고 말 위로 올랐다.
뼈로만 이루어진 손의 감촉은 뭐라 형언하기 힘들었으나 승리를 위한 의지는 엿볼 수 있었고.
“가자.”
가디언에 죽어 나가는 별동대 언데드들을 뒤로한 채 앞으로 달렸다.
곳곳에 쓰러진 가디언의 잔해.
서로 뒤섞인 스켈레톤의 뼛조각.
온몸이 짓눌려 터진 채 악취를 내뿜는 좀비의 신체 일부.
-끼아아아아!
영혼을 불사르듯 버프와 회복, 축복을 쏟아내는 크리쳐 프리스트의 비명.
가디언이 내뿜는 불길 속에 모든 것이 검게 물들어 갔고.
-콰아아앙!
그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신성 병기, 정화의 대리자는 거대한 망치를 내리찍으며 마을의 종말을 선언하고 있었다.
놈에게 닿기까지 약 3킬로미터.
남은 가디언의 수는 대략 200마리.
버티고 있는 언데드 50마리 이하.
생각보다 빠르게 뚫리고 있다.
언데드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2시간? 아니면 1시간?
솔직히 30분이나 막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는 건 난…….
“그 안에 저놈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거지.”
스켈레톤 나이트가 거칠게 말을 몰았다.
놈이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