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낯이 익은 명칭인데?
히든 퀘스트.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퀘스트의 종류는 다양하다. 릴카가 내게 줬던 것처럼 강제 퀘스트가 있는가 하면, 이벤트 형식으로 등장하는 돌발 퀘스트도 있다.
1층에서 얻었던 유일 퀘스트야, 말 그대로 단 하나만 있는 퀘스트고.
그럼 히든 퀘스트는 무엇이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퀘스트지.”
괜히 히든이 아니다. 특별한 조건, 상황, 시스템의 의지 등등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발생한다.
말 그대로 숨겨져 있는 퀘스트니까.
그런 게 15층에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탑에는 밝혀지지 않은 게 넘쳐났다.
내게는 좋은 소식이다. 그만큼 챙길 수 있는 것이 많을 테니.
“일단 봐 볼까.”
“궤에.”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은 하지 못한 퀘스트. 잘만 풀린다면 내게 도움이 될 거다.
물론 무작정 승낙할 생각은 없지만…….
[본 퀘스트는 승낙하지 않으면 열람할 수 없습니다.]
“응?”
정보를 읽으려던 난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그딴 게 어디 있어.
적어도 뭔지는 알려 줘야 선택을 하지.
눈에 힘을 주고 권능을 발현시키려고 했지만.
[히든 퀘스트 정보는 볼 수 없습니다.]
제대로 작동하지를 않았다. 유독 퀘스트 관련해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어쩐다. 난 잠시 고민했고.
“하자.”
결정을 내렸다.
설마 못 깨는 퀘스트를 주지는 않겠지.
권능도 있고, 무한 코인도 있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그만.
이미 스펙도 10층대라고 보기 힘들 정도다.
내가 못 깨면 다른 사람도 못 깬다고 봐야지.
[퀘스트를 승낙합니다.]
[이단의 증표가 활성화됩니다.]
[정화를 시작합니다.]
-쿠구구구구
퀘스트를 받는 것과 동시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던 이단의 증표.
석조 인형이 빛을 발하더니 급격하게 몸집을 불렸다.
1미터, 2미터, 3미터.
주변의 흙과 돌을 집어삼키며 어지간한 중형급 몬스터 사이즈로 자라난 놈이 안광을 내뿜었다.
“우우우우.”
동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듯한 울음소리.
두꺼운 팔과 다리. 납작한 머리통과 제대로 된 공격이 통할까 싶은 몸통.
[프레노스 가디언]
-불의 교단에서 만들어 낸 신성 병기.
-이단을 정화시킬 때까지 불을 내뿜습니다.
매끈한 외관의 골렘 십여 구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마을 향해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강력한 화력. 뜨거운 불길을 쏘아 내는 놈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건물 외벽이 박살 났다.
“으어어어!”
“그아아아아!”
반격하기라도 하듯 몰려드는 언데드 무리.
나를 노리던 놈들이 일제히 가디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켈레톤이 골렘을 갉아 먹고, 좀비가 손톱으로 긁어 댄다.
조금씩 떨어지는 흙더미.
그와 동시에 복구되는 외관.
달라붙은 언데드가 거슬리는지 가디언의 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푸화아아악!
펄스 리치의 명령 아래, 가디언을 뒤덮은 언데드들이 한 번에 터져 나갔다.
가디언이 내뿜은 불길에 타들어 가는 좀비가 비명과 함께 춤을 췄고, 몸통이 날아가 머리만 남은 스케레톤이 메트로놈처럼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어 냈다.
쿠웅.
가디언의 발에 밟혀 가루가 될 때까지.
난데없는 두 집단의 전투.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무슨 상황일까? 필드 내에서 영역 다툼을 하느라 몬스터끼리 싸우는 경우는 봤어도, 저것처럼 적의를 가지고 전면전을 펼치는 건 본 적도 없다.
아니, 사람인 내가 있는데 신경도 쓰지 않고 서로를 공격하는 건 정상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몬스터는 사람을 우선순위로 공격했으니까.
갑작스러운 이변. 그 원인은 아무래도.
“히든 퀘스트 때문인 거 같지?”
“궤에에에.”
문제는 이 망할 퀘스트 창이 안 뜬다는 거다.
알아서 깨라 이건가? 하다못해 힌트라도 줘야 할 거 아니야.
하여간 불친절한 곳이다, 이놈의 탑은.
별수 있나.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 깨는 수밖에.
영 못하겠다 싶으면 최소 클리어 조건만 충족시키고 위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다.
포탈이야 언제든지 만들 수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지만.
턱을 쓸어내리며 상황을 정리했다.
“바뀐 건 하나밖에 없어. 이단의 증표가 활성화된 것.”
단순히 석조 인형인 줄 알았더니 신성 무기였다.
저런 형태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밝혀지지 않은 게 더 많은 탑이니 그건 그렇다 치고.
“가디언과 언데드는 적대 관계. 이단 어쩌고 했으니까 언데드들이 이단이라는 거겠지.”
적어도 살아 있을 적에는 말이다.
지금은 뼈와 살이 썩은 언데드에 불과하다.
즉, 불의 교단이라는 곳에서 이 마을 사람들을 이단으로 분류했고 가디언을 보내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거다.
이단을 정화한다는 이유로.
“바로 쓸어버린 건 아니야. 분명 선택하라고 했었어.”
난 석조 인형의 정보를 떠올렸다.
[이단의 증표]
-이단으로 판단된 자들에게 부여한 증표이자 경고문.
-이틀 내로 선택하라. 개종할 것인지, 정화될 것인지.
개종 아니면 정화.
마을이 이 꼴이 난 걸 보니 죽어도 개종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
그만한 신념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개종했음에도 마을을 불사른 걸까.
이 부분은 알 수 없는 거니까 패스하자.
남은 키워드는 두 개.
“억울한 원혼과 대학살.”
마을 입구에서 봤던 정보인 억울한 원혼.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봤을 때 억울하게 죽은 이는 언데드들이다.
어떠한 이유로 몰살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단으로 몰아간 건 확실해 보이고.
그 결과가 대학살.
“대학살이란 키워드를 떠올리자마자 히든 퀘스트가 발생했으니 확실할 거야.”
생매장당해 죽은 자들은 스켈레톤이.
마녀로 몰려 죽은 이는 펄스 위치가.
불에 타죽은 사람들은 차콜 좀비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저 가디언과 맞서 싸웠겠지?
오케이. 일단 저 가디언들을 없애 보자.
억울하다고 했으니 그 원인이 된 놈들을 처리하면 변화가 생기겠지.
-타닥!
판단을 마친 난 언데드를 학살하고 있는 가디언을 향해 달렸다.
골렘형 신성 무기.
머리통에서는 불을 토해 내고, 3미터에 달하는 거체로 모든 걸 때려 부순다.
난 바로 권능을 발휘했다.
골렘을 공략하는 건 쉽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핵을 없애면 돼.”
눈이 간질거리며 별을 주시하는 눈이 활성화됐고, 난 흐릿하지만 가디언 몸속에 있는 핵을 볼 수 있었다.
이단의 증표. 석조 인형이 핵이다.
그 위치는.
“명치!”
-콰과과광!
몸통 중앙이었다.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내뻗은 주먹이 놈의 등을 뚫고 지나갔다.
터져 나오는 흙더미와 주먹 끝에 닿은 딱딱 인형.
-퍼석!
석조 인형이 쪼개지더니 가디언의 움직임이 멈췄다.
끝없이 뱉어 낼 것 같았던 불길이 잦아들었고,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좀비와 스켈레톤이 가디언의 잔해를 파헤쳤다.
스켈레톤 저 녀석은 아예 씹어 삼키고 있는데.
삼켜 봤자 밖으로 다시 나오는 걸 뭐 하러 먹나 싶기는 하지만 분이 풀린다면 하게 놔둬야지.
“아직까지 변화는 없네.”
난 주변을 살폈다.
여전히 가디언은 많다. 방금 한 개체를 처리하기는 했다만 총 14구의 가디언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고, 펄스 위치의 분발에도 언데드들은 밀리기만 했다.
이상한 노릇이다.
아무리 좀비와 스켈레톤이 1성급이고 2성급인 펄스 위치가 전투 특화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이건 밀려도 너무 밀리는데?
“가디언이라는 놈들도 기껏해야 2성급 수준이라고. 3성급까지는 아니야.”
지금까지 싸워 온 감각으로는 그러했다.
머릿수부터 언데드가 이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질 리가 없는데.
“아, 상성이 안 맞군.”
언데드는 신성력에 약하다.
가디언은 신성 무기고.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인지하지 못했다.
왜냐…….
“원래 언데드는 신성력이 깃든 대상에게 달려들지 않아.”
피하면 피했지 저런 식으로 맹목적인 공격을 감행하지는 않았다.
무엇이 언데들을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이크!”
-콰아앙!
놈들에게 관심이 쏠리던 찰나.
가디언이 거대한 주먹을 내리쳤다.
옆으로 구르며 공격을 피한 난 스킬을 사용했다.
[파이어 밤 (B) Lv.7]
단번에 터져 나가는 가디언.
놈이 쓰러지는 걸 확인하기 무섭게 위로 도약했다.
내가 위협 인물인 걸 깨달은 가디언들이 불길을 쏘아 댔으니까.
-화르르륵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길.
뜨끈하다. 반신욕 하기 괜찮은 온도네.
화기 내성이 많이 올라서 평범한 불은 이제 무섭지도 않다.
무서우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
“덕춘아, 보여 줘라.”
“그엑!”
-푸화아아악!
어깨 위로 올라온 덕춘이가 볼을 부풀리더니 불을 토해 냈다.
10층에서 얻은 특성. 화염.
덕춘이의 입에서 가디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센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화끈하다 못해 파괴적인 열기.
흙으로 뭉쳐져 있던 가디언이 단번에 구워졌다.
순간적으로 굳어 버린 관절.
가디언의 움직임이 굼떠진 틈을 타 검을 내질렀고.
-퍼걱
핵을 정확히 조각 낼 수 있었다.
기동을 멈춘 가디언이 형체를 잃고 쓰러졌다.
“아아아아!”
“오오오오!”
환호하듯 괴성을 지른 좀비 떼가 우르르 몰려간다.
다른 가디언을 없애기 위해, 다른 동료 언데드를 돕기 위해.
여기까지만 본다면 특별할 게 없는데.
“점점 마을 중앙으로 모이는 것 같단 말이지.”
“궤에에.”
가만 보니 무작위로 움직이는 것 같은 언데드들에도 방향이 있었다.
마을 곳곳에 퍼져 있던 놈들이 일제히 움직여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
가디언 역시 마찬가지.
마을 외부에서 내부로 전진하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그나마 멀쩡한 건물 위로 올라가 확인해 봤지만 잘못 본 게 아니다.
“마을 중앙에 뭐가 있어.”
유독 많이 파괴된 곳이 마을 중앙.
다른 곳은 형태라도 남아 있는데 저곳만은 모든 걸 지워 버린 듯 깔끔하다.
남은 거라고는 잿더미, 다져지다시피 부서진 건물 파편.
그리고.
[미약한 신성력이 느껴집니다.]
신성력!
이단으로 분류된 신의 힘이 남아 있다.
저곳이 히든 퀘스트를 깰 수 있는 열쇠가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우우웅
“응?”
난 손을 내려다봤다.
미약하게 진동하는 서리 불꽃 검.
지금까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저 신성력에 반응하는 건가.
“가 봐야겠군.”
무너진 건물을 박찼다.
가디언 몇몇이 방해하기는 했지만 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콰아아앙!
파이어 밤으로 몸체 반을 날리고, 검으로 핵을 부수면 그만이었으니까.
상위 골렘이라면 모를까 흙이 베이스인 녀석은 그리 내구도가 좋지 않았다.
언데드 역시 가디언에게 덤벼들 뿐 내게는 관심이 없었다.
-솨아아아
가디언 4기를 무력화시키고 나서야 마을 중앙에 진입할 수 있었다.
공기가 달라졌다. 이질적인 느낌에 몸을 움찔했다.
“시원한데?”
진짜로. 10층대를 지나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시원함이 여기 있었다.
서늘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사방이 불타는 곳에 있다 들어오니 상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디서 찬 기운이 올라오는 걸까.
난 땅을 헤집다시피 주변을 뒤졌고.
-툭
검 끝에 뭔가가 걸렸다.
[디그 (F) Lv.4]
그곳을 중심으로 파 내려가자 모습을 드러내는 조각상 하나.
상체는 부러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지만, 지름 4미터가량의 밑판과 다리 일부는 알아볼 수 있었다.
[얼음의 여신 프렐리아 조각상]
-얼음과 불의 신전. 한 축을 담당하던 여신 프렐리아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조각상.
-불의 교단에 의해 얼음의 교단은 사라졌지만 소수의 추종자들은 남았습니다.
-고대에 존재했던 신성 왕국, 히알틴. 그곳이 본디 얼음과 불의 교단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미약한 신성력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얼음의 여신.
얼음과 불의 교단.
신성 왕국 히알틴.
“잠깐만, 히알틴?”
고개를 주억거리던 난 익숙한 명칭에 눈을 부릅떴다.
히알틴. 그거 내가 가지고 있는 유적 열쇠에 붙은 명칭 아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