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9화 (69/740)

69화 대학살의 흔적

정화의 희생양.

언뜻 보면 15층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의 조합이었지만 실체를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역병과 마녀. 그로 인해 타 버린 마을 통가누스.”

내가 서 있는 곳은 마을의 입구.

무너진 외벽과 마을의 이름을 알리는 간판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지구에는 없는 언어였지만 내게는 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있었고.

[통가누스-마을]

-평화로운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죠.

-억울한 원혼들이 가득합니다.

대략적인 정보를 읽을 수 있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10여 년간 15층을 오른 사람은 많았고, 그들 중에는 이계의 언어를 읽거나 정보를 모을 수 있는 권능이나 스킬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니까.

커뮤니티를 통해 알아본바 마을 곳곳에 존재하는 장식물과 글귀, 타다 남은 자료에 의해 대략적으로나마 15층의 배경이 드러났다.

몬스터들의 행동 방식과 반응을 통해 유추해 낸 것도 있고.

간단히 요약하자면 그거다.

“마녀가 역병을 퍼트렸고, 안전성의 이유로 이단의 마을로 선정. 불태웠다는 거였지 아마?”

반쯤은 헌터들의 상상이 섞인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만약 가장 먼저 만나는 인위적인 던전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을 거다.

인류에게 있어 자잘한 필드의 배경보다는 등반하여 강해지는 것이 중요했으니.

다른 이들 역시 사냥을 하는 것에 집중하겠지만.

“분명 냄새가 나.”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 정도 배경을 가진 필드가 나타났는데 단순히 사냥만 하라는 건 난센스다.

“일단 잡기는 해야지.”

히든 피스는 피스고, 공략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사냥은 해야 했다.

그래도 무작정 쓸어 담는 건 비효율적이니까.

“덕춘아, 마을 한 바퀴 돌아볼까?”

“그에에에.”

이왕 사냥하는 거,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 볼까 한다.

당당히 걸어 들어간 마을 초입.

입장과 동시에 거리를 배회하던 몬스터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말 없는 압박.

솜털이 바짝 선다.

망자들의 텅 빈 눈동자와 근원을 알 수 없는 적의는 살아 있는 사람에게 위화감을 주니까.

“그어어어어!”

가장 먼저 덤벼든 건 차콜 좀비.

타들어 간 몸. 역한 탄 내와 잿가루를 뿌리며 손을 휘두른다.

속도가 그리 빠른 편은 아니지만 상처가 생기면 감염당하는 동시에 화상을 입는다.

-텅

“그어?”

물론 제대로 장비를 입은 내게는 생채기 하나 내기 힘들었지만.

하기야 차콜 좀비는 기껏해야 1성급이니까.

스켈레톤도 마찬가지. 스켈레톤 워리어나 아처와 같이 특수 직업을 가졌다면 또 모르겠다만.

-서걱

서리 불꽃 검을 휘둘렀다.

깔끔하게 잘려 나가는 단면.

치이이익.

냉기와 열기가 맞부딪치며 물 끊는 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좀비의 목이 날아올랐다.

생명체도 그러하지만 언데드의 약점은 머리.

-퍼억!

난 땅에 떨어진 좀비의 머리를 밟아 터트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끼에에에엑!”

펄스 위치가 비명을 질렀다.

저주를 쓰지 않는 마녀.

그렇다고 아무런 마법을 쓰지 않는 건 아니다.

[펄스 위치의 비명에 해당 구역의 언데드들이 강화됩니다.]

먼저 언데드를 강화시키는 버프를 가지고 있고.

“아으으으으!”

“우아아아아!”

본능으로 움직이는 언데드들을 체계적으로 조종하는 중추 역할까지 가능했다.

기본 등급 2성. 부리는 언데드 군단의 규모에 따라서는 3성급까지 올라가는 몬스터였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우르르 몰려오는 차콜 좀비와 스켈레톤.

보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이 물씬 든다.

시체 썩는 내와 단백질 타는 냄새, 뭔지 모를 것을 흘리며 다가오는 놈들.

[파이어 밤 (B) Lv.7]

-콰아아아앙!

난 폭발을 일으켰다.

신나게 터져나가는 놈들.

언데드를 잡는 두 번째 방법.

“아예 못 움직이도록 몸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거지.”

화력만 받쳐 준다면 이쪽이 더 효율성이 좋다.

1성급 몬스터 따위 내게 있어서는 장난감이나 마찬가지.

조금씩 자리를 옮기며 폭발을 이어 나갔다.

마을을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한곳에 오래 머물러서 포위되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언데드의 무서움 중 하나는 물량이었으니까.

가능성은 낮지만 변종이나 상위 개체가 나타나면 험한 꼴을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째 애들이 더 난폭해지는 것 같다?”

“그에엑.”

내 물음에 덕춘이 역시 이상함을 느꼈는지 작게 울음소리를 냈다.

여기저기 폭발이 일어나는 만큼 가만히 있는 게 더 이상하기는 하다.

나 같아도 사방으로 몸을 던졌을 테니까.

그래도 저거는 뭐랄까. 공격을 피하려는 움직임이라기보다는.

“오오오오오!”

“아아아아!”

“키이이이이!”

발광에 가까웠다.

혼란. 다른 언데드를 통솔해야 할 펄스 위치까지 정신 줄을 놓고 울부짖는다.

조잡하지만 꾸준하게 나를 노리고 덤비던 놈들 역시 방향을 잃고 날뛰었다.

바닥을 헤집고, 허공에 손톱을 긁고.

내가 아니더라도 손에 닿기만 한다면 공격성을 띄었다.

아무리 뇌까지 썩어 버린 좀비라지만 보통은 공격하는 대상을 우선순위로 노리기 마련인데.

도무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다른 공격에도 이런가?”

난 폭발을 멈추고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언데드 사이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스킬을 쓰지 않고 순수하게 육탄전만 할 생각.

검을 휘두르고 찌르고 손잡이로 내리찍었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 하고 머리를 내주는 좀비와 스켈레톤.

저기 멀리 떨어져 있는 펄스 위치는.

-퍼억

돌멩이를 던져 머리를 깨트렸다.

아마 바로 죽지는 않았을 거다. 일단은 2성급 몬스터라 돌팔매 한 번으로는 어쩌기 힘드니까.

그럼 뭐. 여러 번 던지면 되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펄스 위치의 머리통에 연달아 두 개의 돌덩이를 더 던져 줬다.

빠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난 것도 같고.

그렇게 30분.

[스켈레톤 처치 (12/20)]

[차콜 좀비Charcoal Zombie 처치 (18/30)]

[펄스 위치False Witch 처치 (9/20)]

꽤 많은 몬스터를 해치울 수 있었다.

워낙 격차가 심한 탓도 있고, 놈들이 마구잡이로 움직여 상대하기 쉬웠던 것도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하기 시작했지만.

정신을 차린 펄스 위치가 다시금 언데드들을 통솔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확실하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별다른 반응이 없어.”

폭발에만 이상 반응을 보인 거지.

파이어 밤이 특별한 건가? 아닐 것 같은데.

어쩌면 이게 히든 피스로 가는 열쇠가 아닐까.

난 놈들을 피해 마을을 돌았다.

언데드야 차고 넘쳤으니 굳이 한 곳에서 난동부릴 필요가 없었다.

“이쪽에는 스켈레톤이 많군.”

마을의 서쪽. 외곽 부근에는 스켈레톤의 수가 월등히 많았다.

여기저기 그을려 기괴하게 생겼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드르륵, 턱!

빠르게 놈들 사이로 지나며 머리통을 돌려 주었다.

몇 바퀴나 회전하더니 병뚜껑처럼 떨어지는 해골바가지.

“그에. 퉷!”

덕춘이가 뱉은 산성침과 독침에 놈들의 머리가 빠르게 녹아내린다.

돌도 녹이는 위력인데 뼈 정도야 손쉽게 녹이지.

“어디 이놈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봐 볼까.”

첫 번째는 파이어 밤.

몸이 터진 스켈레톤의 뼈가 사방으로 날아갔지만 아까 만난 놈들처럼 발광하지는 않았다.

워터에는 반응을 하려나?

[워터 (F) Lv.4]

-촤아아아악

거센 물줄기가 스켈레톤에 쏟아진다.

당황스러운지 멈칫거리기는 했으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내게 달려든다.

이빨을 부딪치며 허우적거리는 꼴이 우습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 약한 내가 편하게 해 줘야지.

-까앙

검의 옆면으로 머리통을 부숴 주었다.

아무래도 스켈레톤은 자르는 것보다는 부수는 쪽이 사냥하기 좋아서.

“불에도 반응 없고. 물도 별 효과가 없군.”

여러 가지 실험을 했기 때문일까.

어느새 내 주변에는 스켈레톤이 가득했다.

그 수가 얼추 40마리는 될 것 같은데.

일일이 상대하기는 귀찮으니까.

[디그 (F) Lv.3]

[디그 (F) Lv.3]

[스킬 레벨 업!]

[디그 (F) Lv.4]

난 스켈레톤이 몰려드는 방향에 구덩이를 만들어 냈다.

중첩해서 사용한 디그.

삽시간에 나를 중심으로 깊이 2미터의 해자가 만들어졌다.

딱히 물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해자는 아닌가.

“따닥! 딱!”

“덜그럭.”

날개도, 도랑을 뛰어넘을 각력도 없는 스켈레톤들이 구덩이 안으로 떨어진다.

역시 뇌가 없는 친구들.

돌아갈 생각도 없이 들어오는구나.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냥 이대로 묻어 버려도 되겠는데?

[파이어 밤 (B) Lv.7]

-푸콰아앙

난 땅에다 폭발을 일으켰다.

대지가 터지며 토사가 쏟아져 내린다.

“까각. 까가가가각!”

“까드드득!”

이상 반응이 온 건 그때였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스켈레톤이 미친 듯이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벽을 긁고 바닥을 긁고.

아가리를 들이밀어 흙을 파냈다.

옆에 달라붙는 동료 스켈레톤을 밀치고 잡아당기고, 엎어진 놈 위에 올라탔다.

광폭화에 빠진 것처럼 텅 빈 눈구멍에 귀기가 서리더니 서로를 물어뜯고 공격하기까지.

해골 수십 개가 엉키며 위로 올라오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은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절박함이 느껴질 정도.

생매장 아니, 이미 죽었으니까 그냥 매장인가.

땅에 묻히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지만 이건 정도가 심하다.

“쯥.”

미간을 좁힌 난 가차 없이 폭발을 일으켜 뼈 탑을 만들어 가는 스켈레톤을 날려 버렸다.

새카맣게 그을린 땅에 뿌려진 하얀 뼛조각.

기분이 더럽다.

괜히 사람들이 10층대에서 가장 기분 나쁜 곳이라 말한 게 아니었다.

놈들의 움직임에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자리를 옮기자.”

“그에에.”

몸에 묻은 잿가루를 털어 내고 마을의 북쪽으로 향했다.

주거 지역이었던 건가. 벽만 남은 건물들이 즐비했는데 마을 곳곳에 기묘한 모양의 석조 인형이 보였다.

한 손은 가슴을, 다른 한 손은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

턱까지 내려간 입꼬리와 역으로 꺾인 무릎이 기괴하다는 느낌을 줬다.

어째 하나같이 기분 나쁜 것만 모아 둔 것 같냐.

“이래서 이단이라는 건가.”

난 시커멓게 그슬린 석조 인형을 들어 올렸다.

발휘된 권능.

[이단의 증표]

-이단으로 판단된 자들에게 부여한 증표이자 경고문.

-이틀 내로 선택하라. 개종할 것인지, 정화될 것인지.

정보를 보아하니 일종의 경고용 장식품 같았다.

정화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척 봐도 죽이겠다는 뜻일 테고.

난 쥐고 있던 석조 인형을 던졌다.

괜히 찝찝하다. 세상이 바뀌고 헌터들이 활동하면서 사람들은 미신을 많이 믿었다.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져서.

나 역시 그중 한 명이라 부정 탄 물건을 만지작거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빠져나갈까? 있으면 있을수록 찝찝하다.

스켈레톤은 잡을 만큼 잡았고, 좀비랑 펄스 위치만 좀 잡으면 16층으로 향하는 포탈이 열릴 거다.

어차피 올라가야 할 층은 많으니 하나쯤 건너뛰어도 될 것 같은데.

“에이 씨. 뭔 생각이야. 할 거면 끝까지 해야지.”

난 뺨을 두드리며 정신을 다잡았다.

한번 안일해지면 이후에도 똑같다.

집중하자.

차분하게 지금까지 모은 정보를 정리했다.

“차콜 좀비, 펄스 위치는 불에 발광하고 스켈레톤은 구덩이에 미쳐 날뛴다라. 거기에 이단?”

이 무슨 기묘한 조합인가.

애초에 차콜 좀비는 불에 타 죽은 자가 언데드로 부활한 거고, 스켈레톤은 땅에서 썩은 놈이 기어 올라온 거 아닌가?

펄스 위치야 어떻게 탄생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불에 기겁하는 걸 보니 마녀사냥으로 화형이라도 당했나 보지. 이단의 증표라는 것도 있고.

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이 불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언데드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어?”

잠깐만.

이단? 화형?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언데드들의 비정상적인 반응.

물을 끼얹어져도 꺼지지 않는 불.

계속해서 타오르는 마을과 그 안에서 배회하는 언데드.

만약 이 모든 게 그들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면 설마…….

“화형에 생매장.”

난 고개를 돌렸다.

다른 곳에 비해 유독 스켈레톤이 많은 서쪽 구역.

무너진 구덩이 사이로 하얀 뼈들이 엿보였다.

내가 사냥한 스켈레톤이 아닌 뼈들. 애초부터 그곳에 묻혀 있었을 게 분명한 것.

어떻게 저곳에 묻히게 됐는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불타는 마을 안에서 돌아다니는 차콜 좀비?

마을 안에 있다가 불타 죽었겠지.

마녀지만 저주를 쓰지 않는 펄스 위치는 말할 것도 없다.

이단이라 낙인 찍혀 죽은 희생양일 게 분명하니까.

어쩌면 이 마을에 마녀와 역병은 없었을지 모른다.

역병에 걸린 사람을 생매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애초에 사람이 있는데 불은 왜 질러.

마을에 들어오기 전 봤던 정보가 떠올랐다.

-억울한 원혼들이 가득합니다.

어쩌면 억울한 원혼이라는 것들은…….

“이 필드에 있는 언데드 전체.”

그리고 이 필드는…….

“대학살의 흔적.”

-띠링!

[통가누스 마을의 비극을 엿보았습니다.]

[조건 충족]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승낙하시겠습니까?]

퀘스트가 생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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