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내 사람 건든 건 못 참지
난 탈모맨을 들처 업었다.
그의 말대로 무리를 한 탓이 정신을 잃은 상태.
사실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반쯤 정신을 놓고 싸운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할 수준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실전과 훈련을 겪어야 할까.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지만 덕분에 하나는 알겠다.
‘탈모맨이 위로 올라온 건 우연이 아니야.’
말이나 행동은 좀 모자라 보일지 몰라도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충분히 상위권으로 탑을 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녀석이었다.
나도 S급 권능이 아니었다면 탈모맨보다 뒤처졌겠지.
“그럼 이놈이랑 비등하게 올라오는 놈들은 또 어떤 괴물이라는 거야.”
핥짝이와 냥펀. 두 녀석도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니 멤버들이 하나같이 비범하다.
내게 연락을 취한 이준석이라는 녀석도 마찬가지고.
어떻게 인연이 생긴 오지혁도 확실히 뛰어난 인재다.
긍정적으로 진행된다면 큰 힘이 되어 주겠지.
오지혁과 이준석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은 보호해야 한다.
적어도 남들과 동일 선상에 설 수 있도록.
안전지대에서마저 죄인처럼 도망 다니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난 해결 방안을 모색했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냈다.
혼자로서는 불가능하다, 도움이 필요하지.
당연하게도 도움을 줄 대상은.
“킬더레스! 탈모맨을 구했어요. 상태가 안 좋습니다.”
10층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두 녀석.
킬더레스와 릴카다.
“이쪽으로 눕히게.”
내가 오고 있는 걸 미리 알고 있었는지 방 한편에는 침대 하나가 준비되어 있었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치료 장비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탈모맨을 받아든 킬더레스가 곱게 침대에 눕히더니, 포션을 먹이고 치료 장비를 연결했다.
“무리했군. 조금만 더 심했으면 죽었을 거야. 몸이며 마력이며 남아나는 게 없군.”
“괜찮아질까요?”
난 조심스럽게 물었고.
“그럼. 어차피 숨만 붙어 있으면 안전지대에서는 다 낫는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난 좀 빠르게 갈 생각이고.”
-우우우우웅
킬더레스의 조작 아래 치료 머신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창백하던 탈모맨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진다.
“하루 정도 놔두면 멀쩡해질 거다. 그때까지는 푹 자게 놔두면 그만이지.”
“다행이군요.”
“그래. 그건 그거고. 퀘스트를 무사히 완료했군. 보상으로 말했던 영약을 주겠네.”
킬더레스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지만 난 손을 내저었다.
영단. 좋다. 나도 가지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욕심을 접을 생각.
“킬더레스, 가능하다면 보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으음?”
무슨 소리냐며 눈썹을 꿈틀거리는 킬더레스.
당연한 말이지만 퀘스트 보상은 원하는 것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부여된 것을 받아 가는 것이지.
지금과 같이 NPC가 직접 준 퀘스트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애초에 NPC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반감을 가질 수도 있는 행동.
“들어나 보지.”
다만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른 점이 있다면 릴카의 퀘스트를 통해 NPC들과의 호감도가 상승했다는 것.
그전에도 킬더레스는 내게 호의를 보여 왔다.
어느 정도 호감도는 있다는 것.
“그전에 릴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나? 뭔데?”
은근슬쩍 다가와 덕춘이를 빼낼 궁리를 하고 있던 릴카가 눈을 깜빡인다.
“NPC와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이지? 그것도 절대 다수의 NPC가.”
“일종의 신뢰가 생겼다는 거지! 후후. 어떻게 수많은 NPC가 그럴 수 있냐고? 난 마당발이거든. NPC계의 아이돌이 이 몸이시다!”
허리에 손을 얹은 릴카가 당당하게 말했다.
킬더레스는 못 볼 꼴을 봤는지 얼굴을 쓸어내렸지만.
“릴카 이 녀석이 상인이라 각층에 있는 NPC를 자주 만나거든. 그나마 시스템 제약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애라 우리들이 많이 의지한다네.”
각 층의 NPC를 만난다라.
상인이라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정말 다른 층으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건가.
생각해 보면 릴카가 주로 10층에 머물기는 했지만 항상 보였던 건 아니었다.
안 보였던 그때는 다른 곳으로 가 상인으로서 활동한 모양.
“아. 맞다. 너 다음 퀘스트 받아야 해! 설마 한 번만 하고 관둘 거 아니지? 어차피 할 수밖에 없겠지만. 헤헤. 고객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파이팅 하라구.”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릴카가 귀를 새운다.
그와 동시에 생겨나는 퀘스트창.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2)]
-릴카의 부탁 (1)을 성공적으로 완료해 신뢰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항상 바쁘죠. 수많은 NPC가 릴카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의뢰한 물건도 함께요!
-혹시 아나요? 릴카를 도우면 좋은 일이 생길지?
-애꾸 예티의 눈물 (0/30)
-눈의 정령의 화관 (0/1)
-신뢰를 얻었기에 다른 NPC의 퀘스트를 수행할 수 있습니다.
-보상: 오델토의 반지 (B), NPC들의 관심.
난 가만히 퀘스트를 바라봤다.
역시나 괴악하기 그지없는 퀘스트.
애꾸 예티는 24층에 나오는 몬스터고, 눈의 정령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퀘스트 걱정은 하지 마. 10층에서 볼일도 끝났으니 20층 안전지대도 왔다 갔다 할 거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이번에도 잘 부탁해!”
“어, 음. 그래.”
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의 뻔뻔함과 정신없음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신뢰가 생겼다라. 하기야 10층에 올라온 사람이 화갑룡의 비늘을 뜯어 왔는데 신뢰가 안 생기는 게 더 이상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네는 우리에게 신뢰가 생겼다고 생각하면 편하네. 관계가 지속된다면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맞아. 우리도 나쁜 사람 아니야! 요즘 탑에 오르는 것들은 우리를 무슨 로봇인 것처럼 대하지만.”
킬더레스와 릴카가 말을 덧붙인다.
대충 어떤 의미인 줄 알겠다.
서로의 입장과 관계에 따라 부탁을 할 수도 있는 사이가 된다는 거니까.
상점 NPC가 할인을 해 준다거나, 특정 NPC가 남들에게 주지 않는 퀘스트를 준다든가.
“킬더레스, 보상을 포기하는 대신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난 침대에 누워 있는 탈모맨을 잠시 바라봤다.
또라이 같지만 싫어할 수는 없는 녀석.
“이 녀석도 그렇지만 곧 제 친구들이 10층에 올라올 겁니다. 정수리 핥짝, 냥냥펀치. 혹시 들어보셨나요?”
“대충은, 우리도 귀가 있거든. 근데 그 녀석들이 네 친구라는 건…….”
“예. 제가 쁘띠공듀입니다.”
솔직하게 털어놨다. 다른 이에게는 말하지 못했던 사실.
NPC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원래라면 말하지 않으려 했다.
이건 내가 보이는 신뢰의 증표. 더 나아가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의 발버둥이었다.
감추고 싶은 것을 스스로 내보인 것이니까.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킬더레스가 미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으엑. 너 취향 이상하다. 너 변태야?”
릴카 저 녀석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진짜 딱밤 한 대만 때리면 소원이 없겠는데.
지금은 부탁하는 입장이니 가만히 있어야 한다.
“…사정이 있어. 정체가 들통나면 안 돼서.”
“들어보나 마나 저놈들 때문이겠지. 이해하네.”
킬더레스가 방금 소란이 일었던 방향을 턱짓하며 손을 내저었다.
대형 길드가 탈모맨을 공격하는 걸 알고 있으니 대략적인 상황은 짐작한 모양.
“제 친구들이 안전지대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릴카, 너도. 내가 반드시 네가 준 퀘스트 전부 깨 줄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원한다면 계약서도 쓸 수 있어.”
난 본론을 꺼냈다.
탑에 들어온 이상 등반은 계속된다.
언제까지고 10층에 머물며 멤버들을 보호할 수는 없다는 것.
위층도 마찬가지. 지금이야 내가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단순히 클리어 조건만 채우고 올라가는 게 아니라 각 층에 숨겨진 히든 피스를 찾으며 올라가고 있으니까.
적어도 멤버들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는 NPC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우웅. 좋아! 계약서는 필요 없고 다른 조건은 있어.”
역시 상인이라 이건가. 릴카가 조건을 달았다.
뭘까. 퀘스트 보상을 줄이기라도 하려는 걸까. 아니면 따로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려고?
약간은 긴장하면서 그녀가 말하기를 기다렸고.
“안전지대에 올 때마다 덕춘이 만지게 해 줘!”
“그엑? 궤에에엑!”
기겁하는 덕춘이. 껌딱지처럼 내게 달라붙는 녀석.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인데.
“덕춘아, 부탁 좀 하자. 응? 도와주라.”
“으게에에에.”
도리도리 고개를 흔든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이틀에 한 번 스페셜 도시락. 메뉴 선택 1회권 줄게. 먹고 싶은 거 아무거나 사. 금액 제한 없이.”
난 상점창을 열어 식품 카테고리를 열었다.
주르륵 나열되는 온갖 음식과 식재료.
스페셜 도시락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그 못지않은 먹거리가 가득하다.
스크롤이 내려갈 때마다 덕춘이의 눈동자도 함께 움직였고.
“어때. 콜?”
“그으으. 궤엑.”
한참을 망설이던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식충이 아니, 영물님.
하해와 같은 마음씨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덕춘이의 머리를 긁어 줬다.
이걸로 릴카는 됐고. 남은 건 킬더레스인데.
“크큭! NPC로 있으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네. 나쁘지 않아. 그놈이랑 똑같아.”
그가 고개를 저으며 웃어 댄다.
그놈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반응이다.
“안 그래도 대형 길드 놈들이 설치는 게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군. 이참에 좀 나서야겠어. 도와주마, 특히 이 녀석.”
킬더레스가 탈모맨을 가리켰다.
표정이 미묘하다.
“이놈은 내가 책임지고 맡도록 하지.”
“엥? 네가?”
릴카가 눈초리를 새웠지만 킬더레스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아, 그리고 자네가 쁘띠공듀인 건 비밀로 해 주겠네.”
“감사합니다. 릴카, 너도 비밀로…….”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을까 봐. 걱정 말라구.”
난 마지막으로 탈모맨을 살폈고, 킬더레스와 릴카에게 인사를 한 뒤 방을 빠져나왔다.
“잠깐.”
그런 나를 불러 세우는 킬더레스.
그가 물건을 던졌고, 난 반사적으로 받아들였다.
[거인의 심장 정수 (B)]
-거인의 심장을 뽑아 만들어 낸 영단.
-거인 특유의 강인함과 방어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훌륭한 인간 샌드백이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이건?”
“선물이다. 위로 가라.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을 때까지.”
뭐라 말하기도 전에 킬더레스가 손가락을 튕겼고 자동으로 문이 닫혔다.
난 가만히 B급 영약을 바라보다 문 너머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킬더레스.”
사람도 아니고 NPC한테 이런 감정을 느낄 줄은 몰랐는데.
대가 없는 호의를 받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인 난 복도를 따라 걸었다.
뒤는 이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나는.
“처리관 새끼들 한 번만 더 조지고 가야지.”
코인이 남아 있다면 지금쯤 살아났을 거다.
난 워낙 쪼잔해서 나를 건드는 놈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복수해야 직성이 풀리고, 내 사람을 건드는 놈은 다시는 그럴 수 없게 만들어야 발 뻗고 잔다.
한마디로.
“너희 사람 잘못 건드렸어.”
* * *
조현수가 되살아난 이진무와 박세혁을 해치워 탑 밖으로 퇴출시킨 시점.
투기장 안에 남은 킬더레스와 릴카는 탈모맨을 옆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너, 좀 낯설다?”
침대에 턱을 댄 릴카가 킬더레스를 바라봤다.
그 의미를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다른 곳을 보는 킬더레스.
그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릴카가 옆구리를 찌른다.
“말 좀 해 보시지? 천하의 킬더레스가 말이야. 이제 막 10층대를 돌파하는 애 부탁이나 들어주고. 모르는 놈을 치료해 주기까지? 무슨 꿍꿍이야.”
“별거 없다. 계승자를 구했을 뿐. 사지는 멀쩡해야 훈련을 따라오지.”
“아하! 그렇구, 으엥? 계승자!?”
고개를 끄덕이던 릴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릴카가 킬더레스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미쳤어? 계승자는 한 번만 고를 수 있는 거 몰라? 이상한 놈이면? 멍청이면 어떻게 하려고 덜컥 계승자를 골라!”
“이미 결정했다. 치료와 함께 내 힘의 일부도 주입해 뒀지.”
킬더레스가 탈모맨의 몸에 꽂혀 있는 치료 머신을 보며 이야기했고, 말문이 막힌 릴카는 이마를 탁 치며 자리에 앉았다.
“아. 골 아파. 예전이나 지금이나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피식 웃은 킬더레스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내 물려 줬다.
냉큼 받아먹는 릴카.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이다.
“쁘띠공듀라. 이상하게 그 친구를 보면 그 녀석이 떠올라. 너도 그러니까 녀석한테 퀘스트를 준 거겠지. 내기로 서리 불꽃 검도 걸고.”
“아니거든!”
“억!”
킬더레스의 옆구리에 발차기를 꽂은 릴카가 눈꼬리를 올렸다.
옆구리를 감싸며 부르르 떠는 킬더레스.
쌤통이라며 릴카가 혀를 내민다.
그것도 잠시 자리에 도로 앉은 릴카가 코를 찡그렸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과하게 반응해 버렸다.
‘짜증 나.’
아득. 릴카가 아이스크림을 씹었다.
지금은 볼 수 없는 그 녀석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