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구출 완료
투기장에서 굉음이 들리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이 울림은.
“뭐야?”
투기장 밖에서 들려왔다.
릴카 역시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고, 투기장의 주인인 킬더레스는.
“하, 이 새끼들이.”
얼굴을 굳히며 욕설을 내뱉었다.
-띠링
그와 함께 울리는 알림음.
커뮤니티를 확인한 난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레몬맨]: 야, 지금 투기장에서 탈모맨이랑 처리관이랑 싸운다!
└나도 보는 중. 이 새끼들 개 양아치임. 경기 끝나자마자 덮침.
└그거 아니야? 준우승 보상 뺏으려는 거?
└ㄴㄴ 쁘띠공듀 뭐라 하던데.
└그럼 걔한테 ㅈㄹ하던가 왜 얘한테 그러냐. 가뜩이나 탈모인 애한테. 스트레스 받으면 더 빠짐.
└제일 나쁜 새낔ㅋㅋㅋㅋ.
다른 이들에게는 흥밋거리에 불과하겠지만 나에게는 아니었다.
탈모맨이 대형 길드이 표적이 된 이유는 나 때문이니까.
선택은 탈모맨 본인이 한 거지만 나를 지지하며 생긴 부작용인 건 틀림없었고, 녀석과의 인연이 생긴 이상 나 역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친구가 두들겨 맞고 있으면 열받는 게 당연.
그것도 내가 싫어하는 대형 길드 놈들이 범인이라면.
“이봐, 친구.”
킬더레스가 나를 불렀다.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나 못지않게 화가 난 표정.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퀘스트 하나 받을 텐가?”
[준우승자를 구하라-돌발 퀘스트]
-투기장 이벤트의 준우승자가 공격받고 있습니다.
-명백한 비매너. 이벤트 기간 동안 참가자를 보호하는 것 역시 주최자의 의무.
-하지만 킬더레스의 활동 영역은 투기장뿐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투기장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킬더레스를 대신해 준우승자를 구하고 적대 세력을 물리치세요.
-보상: B급 영약.
“이벤트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참가자를 공격해? 이건 나에 대한 도전이지.”
킬더레스가 살기를 내뿜으며 말했고.
“저한테 맡기시죠.”
난 바로 수락했다.
보상이 탐나는 것도 있었지만 탈모맨이 신경 쓰인 탓이 컸다.
덕춘이 역시 문제가 생겼음을 느꼈는지 갑옷 안으로 들어왔다.
“갔다 오겠습니다.”
“나가는 길을 표시해 주겠네.”
킬더레스의 손짓에 바닥에 하얀색 선이 생성됐다.
탈모맨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
조급함에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렸다.
“젠장.”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다.
그들이 나를 믿고 움직여 준 만큼 나 역시 멤버들을 케어 했어야 했는데.
그나마 핥짝이나 냥펀은 정체를 숨기려는 시도라도 하지, 탈모맨 이 녀석은 진짜.
“지가 돌격대장인 줄 아나, 아오!”
난 가면을 고쳐 쓰며 검을 뽑았다.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처리관은 잡으려고 했다.
살인자 퀘스트. 놈들을 해치우면 스킬 일부를 얻을 수 있으니까.
원래는 좀 더 조심스럽게 움직이려고 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단숨에 끝내 버리자.
-쿠구구구구구
출구가 보인다. 선명해진 굉음.
사람들이 내뱉는 욕설과 비명.
탈모맨의 것으로 들리는 기합과 충격파가 터지는 소리.
“어어? 멈추십쇼. 지금 통제 중…….”
“비켜!”
출구를 막아서고 있는 다성 길드원을 옆으로 밀쳐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제야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출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인파.
다성과 이클립스의 길드원들이 다른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에워쌌으며, 20명가량의 전투조가 탈모맨을 공격하고 있었다.
게다가 2명의 처리관.
이진무와 박세혁의 지원까지 들어가자 속절없이 밀리고 있었다.
“으아아압!”
고함과 함께 탈모맨이 주먹을 휘둘렀고, 그와 동시에 충격파가 터지며 길드원 일부가 휩쓸려 나간다.
생겨난 빈틈. 그곳으로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어느새 날아온 화살이 탈모맨의 어깨를 때렸다.
그나마 그가 입고 있는 타이즈의 성능이 좋아 박히지는 않았으나 얼마나 버틸지는 알 수 없었고.
“계속 몰아붙여. 죽이지는 말고. 체력이 다 할 때까지 공격을 멈추지 마.”
이진무의 집요한 명령에 상황은 점점 악화됐다.
탈모맨의 움직임이 무디다. 나와 싸웠을 때의 반도 안 되는 것 같은데.
“나 때문에 컨디션이 떨어졌어.”
원인은 당연하게도 나였다.
나 역시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밤을 부르는 자 칭호 역시 쿨타임이 남았고, 일시적으로 스텟을 두 배로 늘려 주는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도 이미 사용했으니까.
A스킬, 되갚기 역시 누적했던 데미지를 전부 써 버려서 사실상 쓸모가 없다.
하지만.
“뭐 해! 오른쪽이 비었다! 달라붙, 크헥!”
상관없다. 이깟 놈들 전력이 아니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어.
부하들을 통솔하느라 정신이 팔린 이진무의 옆구리를 깔끔하게 걷어찼다.
괴상한 비명과 함께 바닥을 구르는 녀석.
순간적으로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이블아이?”
“우승자가 왜 여기에.”
“어, 어떻게 합니까?”
당황한 길드원들이 처리관을 바라봤고 이진무를 대신해 박세혁이 명령을 내렸다.
“저놈도 잡아! 처리관을 공격한 시점에서 이미 처벌 대상이다!”
하여간 약아빠진 놈들.
지들은 때리면서 맞기는 싫다 이건가.
[파이어 밤 (B) Lv.7]
-콰아아아앙!
한 번의 폭발.
땅이 터지며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에 휩싸인 길드원들은 저마다 다친 부위를 안으며 뒹굴었고.
“내가 왔다, 탈모맨.”
난 그때를 노려 웅크리고 있던 탈모맨을 일으켜 세웠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코피를 쓱 닦은 탈모맨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
왜 있기는, 처맞고 있는 친구 구하려고 왔지.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기는 뭐하고.
“쁘띠공듀의 부탁을 듣고 왔다. 말했잖아, 너보다 쁘띠공듀랑 친하다고.”
“무슨 소리! 내가 더 친하다니까?”
아니, 등신아. 그런 거에 발끈하지 말고.
뭐라 할 말은 많은데 말할 기운이 없다.
“정신 차리고 싸울 준비나 해. 너나 나나 정상 컨디션 아니고 적은 대형 길드에 처리관이 두 명이야.”
“저 정도쯤이야, 충분하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놈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권능을 통해 보이는 정보가 그걸 증명했다.
[디버프에 걸려 있습니다.]
[체력 저하]
[무기력증]
[감각 교란]
[슬로우]
[시야 제한]
디버프 종합 세트라도 받은 건가.
이 꼴로 싸운 것 자체가 대단하다.
‘전투는 나 혼자 해야겠군.’
판단을 마친 난 진형을 짠 놈들을 바라봤다.
탈모맨이 분발해 준 덕분에 부상을 입은 놈들도 제법 된다.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놈들은 16명 정도?
처리관 두 명은 멀쩡한 모습이고.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불리해지겠지.’
안전지대는 회복 효과가 적용되니까.
그러니 빨리 끝내자.
“솔직히 말해. 얼마나 더 싸울 수 있어?”
“길어야 5분. 빡세게 싸우면 3분.”
꽤 정확한 시간을 말한다.
이전에도 극한까지 싸운 경험이 있는 건가.
대충 3분으로 잡고 계산했다.
목표는 처리관 둘을 해치우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해. 길드원들을 부탁한다.”
툭. 난 탈모맨의 어깨를 쳤고.
“오케이.”
탈모맨이 패시브 스킬을 활성화하며 날뛰기 시작했다.
이걸로 장애물은 사라졌으니 가장 문제인 저놈들을 없애자.
처리관은 둘.
전방은 도끼를 쥔 이진무가, 후방은 활을 든 박세혁이 맡고 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그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난 이진무를 노려봤다.
시장에서 놈의 권능을 확인했으며 해치울 방법까지 생각해 뒀다.
‘가능하면 사람이 없는 곳에서 싸우되 이미 군중이 모였다면 분위기를 악화시킨다.’
놈의 권능은 집행인.
관객의 반응에 따라 능력치가 추가되는 버프형 권능.
원래라면 이 정도로 사람이 모여 있다면 꽤 많은 추가 스텟을 받았겠지만.
“개자식들아! 그만 안 해?”
“아, 씨. 위에서 왜 답이 안 나오는데. 포획령 취소하고 영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다른 대형 길드의 스카우터들은 욕을 하고 있었고.
“아무리 처리관이라지만 저건 좀 아니지 않냐?”
“이번 건 선 넘었지. 걍 양아치 짓이잖아.”
일반 헌터들 역시 이 싸움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경거리를 찾았다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대등합니다.]
[미미하게 능력치가 오릅니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은 덕에 놈은 별다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거면 충분하다.
“후우.”
난 숨을 내뱉었고.
호흡이 끝나는 시점.
-파앗!
놈에게 달려들었다.
박세혁이 활을 쐈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화살. 궤도가 휘며 사각지대를 파고들었지만.
-카앙!
오지혁과 싸우면서 사각지대를 노리는 공격은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검에 맞고 땅에 떨어지는 화살.
공격이 통하지 않은 것을 확인한 이진무가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었으나.
-까가가가각
난 사선으로 도끼를 밀어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묵직하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지혁보다 못하군.”
“닥쳐!”
내 도발에 놈이 반발했지만 진짜였다.
이진무, 박세혁. 두 명 모두 나보다 먼저 10층에 올라온 이들이다. 그 말인즉.
‘나나 탈모맨, 오지혁과는 달리 스타터 킷을 얻지 못한 놈들이라는 거지.’
스텟 자체에서 밀린다는 거다.
그 증거로 도끼를 쥐고 있는 손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으며.
[파이어 밤 (B) Lv.7]
“크하아아아악!”
정면에서 폭발을 맛본 녀석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나마 장비가 좋아서 버티는 것 같다만.
“그엑, 퉷!”
-치이이이익!
“뭐, 뭐야! 끄하아아악!”
방어구 틈으로, 덕춘이가 내뱉은 산성침이 들어가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거칠게 방어구를 벗으며 뒹구는 녀석.
맨살이 녹아 들어가니 고통스러울 거다.
착한 내가 편하게 만들어 줘야겠다.
-콰직
난 그대로 검을 꽂아 넣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전투 중에 방어구를 벗는 멍청이가 어디 있나.
[살인자 처치!]
[이진무의 스킬 일부를 획득합니다!]
[퀘스트 공헌도에 따라 스킬이 차등 분배됩니다.]
기분 좋은 알림이 울렸다.
남은 건 박세혁.
위기를 느낀 놈이 연달아 활을 쐈지만 내게 닿는 건 없었고.
“젠장! 막아! 저 새끼부터 막아!”
소리를 지르며 길드원들을 닦달했다.
물론 돕는 자는 없었다.
미친 듯이 날뛰는 탈모맨이 그들을 잡고 있었으니까.
거세게 놈들을 몰아붙이고 있었지만 탈모맨의 힘이 조금씩 빠지는 게 느껴졌다.
이미 탈모맨은 무리하고 있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전투를 이어 나가는 중.
[디그 (F) Lv.3]
난 박세혁의 발아래에 구덩이를 만들었다.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녀석. 그래도 내 경기를 봤다 이건지 어느 정도 반응을 한다.
그런데.
“느리네?”
“이런!”
나 역시 놈이 구덩이에 빠지길 바라고 쓴 스킬이 아니었다.
몸을 피하려고 주춤하는 그 시간을 노린 거지.
한순간에 놈에게 다가선 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중량 팔찌 (C)]
-콰지지지직!
몸의 무게를 한껏 올려 으깨 버리듯이.
활을 이용해 어떻게든 내 공격을 막으려고 했으나 부질없는 짓이다.
[서리 불꽃 검 (A)]
스텟뿐만 아니라 장비에서도 내가 우위였으니까.
어설픈 강자는 더 강한 자에게 무너지기 마련.
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지만, 오늘은 박세혁에게 통하는 말이었고.
-뿌드드득!
놈은 쇄골이 부러지며 바닥에 엎어졌다.
그대로 싸커 킥.
복부를 맞은 박세혁이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처리관님!”
“젠장! 막아, 개새끼들아!”
탈모맨에게 붙잡혀 있던 길드원들이 소리를 지른다.
그러면 뭐 할까. 이미 승부는 났는데.
[파이어 밤 (B) Lv.7]
벌어진 상처를 표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놈에게는 방어 수단이 없었고, 그 말은…….
-콰아아아앙!
[살인자 처리 완료!]
[스킬 일부를 획득합니다.]
[퀘스트 공헌도에 따라 스킬이 차등 분배됩니다.]
놈의 죽음을 뜻했다.
하얗게 물들며 사라지는 처리관.
고작 2분. 놈들을 해치우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남은 건 저놈들.
수적인 우위를 이용해 탈모맨을 압박하는 길드원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신을 잃었는지 탈모맨의 무릎이 풀썩 꺾였다.
-콰앙!
“크하악!”
“아흑!”
검을 칼집에 넣고 놈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녀석들.
처리관보다 못한 놈들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죽이지는 않을 거다.
이놈들은 살인자가 아니니까. 굳이 죽여서 살인자 칭호를 받고 실명을 공개할 생각은 없다.
“슬슬 탈출해야 하는데.”
보는 눈이 너무 많다.
길드원들을 후려치며 탈모맨을 확보했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오지혁?’
우리에게 시선이 집중된 타이밍을 틈타 투기장 외벽에 올라간 오지혁이 보였다.
신분을 가리기 위해서인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내 눈치를 피할 수는 없었다.
-까딱
마주친 시선.
그가 신호를 보내더니 품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던졌다.
투기장에서 싸웠을 때 썼던 연막탄.
-피쉬이이이!
“쿨럭! 뭐야!”
“입 가려! 독이 든 걸지도 모른다!”
“젠장. 탈모맨 확인해!”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연막에 길드원들이 당황했고, 난 그대로 투기장 안으로 탈모맨을 이끌었다.
살다 살다 오지혁의 도움을 받게 될 줄이야.
도움을 주겠다고 했던 건 진심이었던 모양.
-타다다다닥!
곧 3, 4위 결정전도 끝을 보일 거다.
투기장 내부에 사람들이 가득 차겠지. 놈들을 따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관중들이 아니더라도 킬더레스가 다 처리할 거고.’
그의 활동 영역은 투기장. 안으로 들어온다면 놈들은 킬더레스의 분노를 피할 수 없다.
다르게 말하면 10층 안전지대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이곳이라는 것.
난 킬더레스와 릴카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탈모맨을 구하기 위해,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들겠어.”
조만간 10층으로 올라올 핥짝이와 냥펀이 곤란한 일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방법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