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65화 (65/740)

65화 대기 중인 사람들

차가운 바닥. 정신을 잃었던 탈모맨이 눈을 떴다.

벌떡 몸을 일으켜 보지만 극심한 고통에 멈출 수밖에 없었고.

“아. 졌네.”

정신이 깨기가 무섭게 경기의 결과가 떠올랐다.

경기가 끝나면서 철창 너머 대기실로 이동됐는지, 탈모맨의 눈앞에 촘촘하게 쌓은 벽돌만이 보였다.

‘맞서 싸웠던 이블아이는 어디 있을까.’

혹시나 싶어 탈모맨은 경기장 쪽을 살폈지만 3, 4위를 가리기 위한 시합이 진행되고 있을 뿐, 어디에서 이블아이 가면을 쓴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10층 투기장 이벤트에서 2등을 차지했습니다.]

[상금 3,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알림창과 함께 허공에서 내려오는 상자 하나.

킬더레스가 말한 2등 보상이었다.

[그린 드래곤의 숨결 (B)]

-강력한 몬스터, 그린 드래곤의 숨결을 모아 만든 영약.

-그린 드래곤 특유의 강인함과 독성 에너지가 담겨 있습니다.

“트로피였으면 좋았을 텐데, 쩝.”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무슨 소리냐며 고함을 질렀겠지만 탈모맨은 아쉬웠다.

영약보다는 쁘띠공듀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잠시 미련을 가진 탈모맨이 입안으로 영단을 넣었다.

톡 쏘는 동시에 지독한 맛이 탈모맨의 혀끝에 맴돌았고.

[그린 드래곤의 숨결 (B)의 효과!]

[힘 +15]

[민첩 +12]

[체력 +26]

[마력 +19]

[모든 독에 강한 내성을 가집니다.]

효과가 적용됐다.

뜨겁고 독한 무언가가 몸속을 기어 다니는 느낌.

이질적인 기운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탈모맨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에게 있어 고통은 익숙한 것이었고, 그의 인내력 또한 범인을 초월했으니까.

적어도 육체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탑클래스였다.

“역시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구나. 솔직히 10층 투기장에서 우승할 줄 알았는데.”

탈모맨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탑에 들어오기 전, 그는 수많은 헌터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고 대형 길드 못지않은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그와 관련된 교육도 받았었고. 그렇기에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이 동층에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서 월등히 강하다는 것을.

탈모맨의 자신감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고 원래라면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쁘띠공듀, 조현수만 아니었다면.

-짝짝

뺨을 때리며 정신을 다잡은 탈모맨이 일어섰다.

여전히 중상을 입은 몸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10층은 안전지대. 자체 회복 효과가 적용되는 곳이었기에 이벤트 참가자가 부상을 당해도 별도의 치료 없이 방치했다.

참가자들이 체력과 부상을 염두에 두며 싸웠던 이유도 이 때문.

다르게 말하면 조현수가 일으킨 대폭발에서 탈모맨이 죽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죽었다면 신체가 새로 재생됐을 테니까.

탈모맨에게는 비장의 한 수가 더 있었다. 다만, 조현수의 공격이 그것을 뛰어넘었을 뿐.

약간 절뚝이며 탈모맨이 출구를 찾아 나섰다.

투기장 이벤트는 킬더레스의 소관.

그는 허례허식 없이 제법 쿨한 편에 속했으며 그 성격을 대변하듯 수상식을 거행하지 않았다.

순위가 결정된 이들에게 보상을 주고 끝냈지.

어찌 보면 매정한 것 같았지만 일종의 배려기도 했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가야겠다.”

투기장 이벤트는 길드들의 영입 전쟁터기도 하다. 많지는 않지만 그런 영입을 불편해하는 참가자들도 있었고.

알아서 타이밍에 맞춰 나가라는 거다.

영입을 원한다면 모든 이벤트가 끝나고 나가면 되는 것이었고, 원하지 않는 이는 남들 몰래 나가면 그만.

탈모맨은 후자였다.

트로피를 얻지 못한 순간 이곳에서 볼일은 끝났으니까.

“후우. 아직 멀었네. 더 강해져야지.”

담백하게 스스로를 평가한 탈모맨이 커뮤니티를 확인하며 복도를 걸었다.

탈모맨은 입맛이 썼다.

쁘띠공듀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일방적인 약속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부르르 몸을 떤 탈모맨이 빠르게 글을 적었다.

[니머리 탈모]: 미안하다 쁘띠공듀! 1등 못했다!

이번에는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며 탈모맨이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그때.

-띠링

알림이 울렸다.

‘설마 쁘띠공듀? 져도 상관없으니 만나자는 걸까?’

일말의 희망을 품은 탈모맨이 알림을 클릭했고.

[정수리 핥짝]: 떨어졌냐? 떨어졌어? 꺄르르륵. 그럼 난 1등 해야지. 분발해라, 탈모쉨.

“으아아! 핥짝이 너냐!”

앙숙과도 같은 녀석의 댓글에 탈모맨이 소리를 질렀다.

분노의 타이핑. 탈모맨이 답글 달았다.

“요놈이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웃기게도 핥짝이 덕분에 에너지를 되찾은 탈모맨이었지만 자각하지는 못한 모양.

기운을 차린 탈모맨이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 밖으로 나섰다.

-파앗

여전히 낮.

밝은 태양이 탈모맨을 맞이했으며.

“나왔군, 니머리 탈모. 기다리고 있었다.”

“연행한다. 반항 시 즉결 처분이 가능한 걸 잊지 마라.”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기를 쥔 채 주변을 가로막고 있었다.

빠르게 그들을 살피자 익숙한 길드 마크가 보였다.

대형 길드 서열 6위 이클립스.

7위인 다성 길드.

그리고 유독 위험해 보이는 놈이 둘.

[이진무-살인자]

[박세혁-살인자]

머리 위로 떠오른 살인자 칭호에 그들의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저 표식을 가진 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이는 딱 한 종류니까.

“10층의 처리관들?”

이놈들이 왜 여기에 몰려 있을까, 탈모맨이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이벤트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다.

즉, 놈들이 처리관의 역할을 하는 이상 이벤트로 혼잡한 경기장을 통제할 의무가 있다는 말.

하지만 이 정도 전력을 이끌고 왔다는 건 처음부터 준비했다는 거다.

‘더 이상한 건 뒤에 있는 애들인데.’

탈모맨이 이마를 긁었다.

이클립스와 다성 뒤에 모여 있는 이들.

하나같이 유명한 길드 마크를 가지고 있었다.

대형 길드는 전부 모인 느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분명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너희 새끼들, 10층이라고 막 나가는구나?”

“상부에 보고 올렸으니 결과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너희가 뭔데 영입 방해하고 지랄이야!”

뭔지 모를 소리를 내뱉고 있다.

다성 길드의 처리관 이진무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저놈들 못 들어오게 막아. 10층은 우리가 관리하는 곳. 신경 쓸 것 없어.”

“아직 상부에서 내려온 건 아무것도 없지. 지금은 기존에 있던 명령대로 하는 게 맞다.”

이클립스의 처리관 박세혁이 거들었다.

그의 말대로 10층은 그들의 영역.

더 서열의 높은 길드의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통제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룰이었고, 각 대형 길드의 장이 결정한 통제 시스템이었으니까.

“너희도 모르진 않겠지? 놈은 쁘띠공듀와 연관이 있다. 신병 확보는 필요하다.”

“꼬우면 너희들이 쁘띠공듀를 잡던가.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박세혁과 이진무의 말에 다른 길드원들이 인상을 쓰면서도 물러섰다.

10층만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칼을 빼 들 기세.

건들면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지만 한 사람.

탈모맨 만큼은 개의치 않았다.

-철컥

탈모맨이 건틀렛을 장착했다.

움찔하며 경계하는 길드원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듣자 하니 너희도 쁘띠공듀한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좋은 의도는 아닌 것 같고.”

-쩌엉!

건틀릿을 부딪치며 투기를 내뿜는 탈모맨을 본 이들이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었다.

명백한 적의. 탈모맨은 자신을 찌르고 들어오는 살기를 느꼈다.

‘뚫을 수 있을까?’

탈모맨은 자신의 상태를 체크했다.

조금씩 몸이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은 정상 컨디션이 아니다.

평소의 절반 정도의 퍼포먼스나 낼 수 있을지 의문.

그에 반해 적대감을 가지고 노려보는 길드원의 숫자는 대략 20명.

중앙에 선 처리관 둘이 내뿜는 기세도 심상치 않았으니.

‘뚫는 건 힘들 것 같은데. 길게 싸워 봤자 30분?’

절망적인 상황임은 분명했다.

보통이라면 순순히 항복하는 게 나았을 테지만.

“우르르 몰려서 덤비는 꼴이라니. 쯧. 낭만 없는 것들.”

탈모맨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내가 또 공듀 괴롭히는 꼴을 못 보지. 시간 끌지 말고 들어와, 씹새들아.”

역으로 도발을 했다.

피식 웃은 이진무가 손짓했다.

돌격 명령.

스무 명에 달하는 길드원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 * *

투기장 이벤트에서 우승한 뒤, 대기실로 이동됐다.

부상이 있기는 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기에 움직이는 건 문제가 없었다.

마력을 많이 써서 피곤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릴카, 이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거야.”

덕춘이를 찾아야 한다.

릴카가 준 퀘스트도 클리어해야 하고.

릴카와 킬더레스는 막역한 사이. 투기장 어딘 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우승을 축하하네.”

“아, 킬더레스.”

복도를 따라 투기장 내부를 헤매는데 킬더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경기장에서 3, 4위전이 한창일 텐데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결승전을 봤더니 다른 경기가 시시해져서 말이야. 자네를 보러 왔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내 표정에 의문이 가득해서인가.

킬더레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릴카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덕춘이를 데려올까 하는데.”

“오? 화갑룡의 비늘을 얻었나 보군. 역시 대단한 친구야. 내가 안내해 주지.”

킬더레스가 턱짓하며 앞장섰고 난 그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 있던 NPC 몇몇이 킬더레스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NPC 사이에도 상하 관계가 있는 걸까.

“자네가 우승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결승전 상대 역시 만만치 않더군.”

조용히 걷던 킬더레스가 말을 꺼냈다.

올라간 입꼬리. 눈빛이 반짝이는 게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녀석도 강하니까요. 저보다는 못하지만 빠르게 탑을 오르고 있기도 하고.”

“아는 사이인가?”

잠시 고민했다.

말해도 되는 걸까. NPC라고는 하나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세세한 부분을 빼고 말하는 건 상관없겠지. 내가 쁘띠공듀라는 것만 안 밝혀지면 되니까.

그동안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기도 했고.

“아는 사이기는 하죠. 실제로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사정이 있어서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았거든요.”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군.”

“그런데 탈모맨은 왜……?”

“별거 아니야. 옛날 생각이 나서. 그 친구도 마음에 들더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던 킬더레스가 문을 열었다.

“다 왔네. 릴카, 손님 왔다. 그만 노닥거리고 튀어나와.”

그의 외침과 함께 방 안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넘어졌는지 팔꿈치를 문지르며 얼굴을 들이미는 릴카.

“너, 너너너! 벌써 온 거야?”

곧장 나를 살피더니 눈을 크게 뜬다.

여우 꼬리까지 빳빳이 세우는 게 많이 놀란 모양.

감정 한번 확실하게 느껴지네.

“덕춘이 데리러 왔다. 빨리 내놔.”

난 보물 주머니에서 화갑룡의 비늘을 꺼내 넘겼다.

믿기지 않는지 비늘은 만지작거리며 굳는 얼굴.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고 싶은 모양이지만 도축 스킬로 훌륭하게 뽑아온 비늘이다.

아이템으로 분류되는 걸 확인까지 했으니 릴카도 어쩔 수 없겠지.

점점 울상이 되며 귀가 접히는 게 측은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덕춘아, 나 왔다!”

난 별 신경 쓰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덥썩 릴카가 나를 잡았다.

“마, 말도 안 돼! 왜 벌써 온 거야아! 내기 끝나고 오란 말이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퀘스트나 클리어나 해 줘라. 덕춘이는 어디, 오.”

팔에 매달린 릴카를 질질 끌며 안으로 들어가자 보고 싶었던 덕춘이가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뻗으려는 것도 잠시.

난 보기 힘든 광경에 몸을 멈췄다.

10평 남짓한 방. 황금과 보물이 가득하고 뭔지는 몰라도 비쌀 것 같은 예술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고급스러운 원목 테이블. 덕춘이의 사이즈에 맞춘 듯한 의자.

실크로 된 옷을 입은 덕춘이의 머리에는 앙증맞은 왕관이 씌워져 있었고, 한 손에는 와인 잔이 들려 있었다.

테이블에는 온갖 음식이 가득.

얼마나 잘 먹고 잘살았는지 덕춘이의 얼굴에 윤기가 흐른다.

다만 얼굴은 시무룩했는데.

“궤에? 궤엑!”

나를 본 덕춘이가 반쯤 잠긴 눈을 번쩍 떴다.

단숨에 생기가 드는 눈동자.

권태롭게 늘어져 있던 몸을 세우고 왕관을 집어 던지더니 곧장 내게로 점프한다.

“그에에에에!”

“아아! 아파! 악!”

어찌나 세게 날아왔는지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다.

얼굴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아. 빨판에 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은 좀 그런데.

그래도 나를 많이 보고 싶어 한 게 느껴져서 기쁘다.

이런 반응이 충격인지 눈을 동그랗게 뜬 릴카가 다가왔다.

“내,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나한테 안기지 않고!”

“궥!”

릴카가 미련 어린 눈으로 손을 뻗었지만 냉정하게 손을 쳐 내는 덕춘이.

상처받았는지 비틀거린 릴카가 벽을 짚었다.

“안 돼애애. 아직 다 못 입혀 봤단 말이야.”

입혀? 뭘 입혀?

난 고개를 갸웃했고 덕춘이는 입고 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궥궥.”

개운한 표정으로 우는 덕춘이가 한쪽을 가리켰다.

벽장으로 보이는 곳에는 옷이 가득했다.

덕춘이 사이즈로 만들어진 정장도 있고, 캐주얼도 있고, 드레스도 있고.

드레스?

너, 그런 거 입니?

난 덕춘이를 바라봤고.

“그에!”

-철썩!

내 마음을 읽은 덕춘이가 혓바닥으로 뺨을 때렸다.

그래. 이래야 덕춘이지.

“으으으. 내 덕춘이, 내 검.”

릴카가 우는 시늉을 했다.

누구 마음대로 내 덕춘이야, 덕춘이는 내 펫인데.

[릴카의 부탁 (1)을 클리어합니다.]

[절대다수의 NPC들의 호감도가 올라갑니다!]

[내기에 이겼습니다. 서리 불꽃 검 (A)의 소유권이 조현수 님에게 양도됩니다.]

결국 체념했는지 릴카가 퀘스트를 완료시켰다.

호감도가 올라갔다라.

아직은 어떤 건지 체감이 안 된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앞으로도 NPC들은 많이 만날 테니까.

그렇게 덕춘이와 재회하고 서리 불꽃 검을 얻은 시점에.

-쿠구구구궁

폭발음이 들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