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기억나냐고? 나지
경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선임들의 눈에 띄고 능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새내기 길드원.
대형 길드, 혹은 중견 길드에 들어가고자 분투하는 무소속 헌터.
함께 위로 올라갈 팀원을 모은다고 홍보를 해 대는 인물까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올라온 사람들이 저마다 실력을 뽐냈다.
이미 본선에 진출했다는 것만으로도 기본 실력은 검증됐다.
남은 건 화려하게 데뷔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거였지만.
“또라이 새끼, 저거.”
A조는 그러지 못했다.
탈모맨에게 전멸했으니까.
A조 최종 승자, 탈모맨.
당당히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사람들의 환호는 계속됐다. 그만큼 화끈한 경기였다.
맞붙는 상대를 일격으로 잠재우는 무력.
경기장에 올라올 때마다 쁘띠공듀를 찾는 집요함.
캐릭터까지 확실했다.
“오오오오오! 니머리 탈모 멋있다!”
“저 사람 무소속이라고 했지? 당장 영입 준비해!”
“상위층에 있는 선배들한테 개인 메시지 돌려! 영입 비용 상한선 올려 달라고!”
“대체 쁘띠공듀가 누구야?”
“순정남이다. 트로피 받아서 그 사람한테 줄 거래.”
“흥! 누군지는 몰라도 나보다 안 예쁠걸?”
아, 제발.
위에 스카우터들이 신나 하는 건 상관이 없는데 밑에 떠드는 애들이 문제다.
아니지. 탈모맨 저 자식이 제일 문제다.
“왜 날 걸고 넘어지냐고. 그리고 누구 마음대로 날 여자로 만들어!”
단 한 번도 여자라 한 적이 없을 텐데.
쁘띠공듀 그것 때문에 그런가?
세상 어떤 여자가 셀프로 공주라고 그래. 어지간히 자존감이 높아도 보통은 안 그런다.
이미 말투부터 콘셉트질이잖아.
“흐아.”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라 할 말이 많았지만 관뒀다.
어떻게 보면 이득이었다. 이런 식으로 성별이 엇갈리면 내 정체는 좀 더 감추어질 거니까.
애초에 그러려고 지은 닉네임이기도 하고.
문제는.
“하하하하! 순정과 낭만이 없는 자들의 패배다!”
A조 마지막 경기를 끝내고 호탕하게 웃고 있는 저 녀석.
무서울 지경이다. 연달아 세 번의 전투를 치렀음에도 지친 기색이 전혀 없다.
저런 놈이 내 편이라는 게 든든하기는 한데.
“내 정체를 알고도 그럴지는 모르겠단 말이지.”
[김진성 (최고 층수: 10층)]
-닉네임: 니머리 탈모
-권능: 괴력난신怪力亂神 (S)
-미친놈입니다. 하지만 낭만파죠. 도망치세요!
권능을 통해 보이는 그의 정보.
그가 어떻게 저런 피지컬을 보이는지는 알 것 같다.
무려 S급 권능인 괴력난신을 가지고 있으니까.
동급 권능이라 그런지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름만 봐도 어떤 능력인지 알 수 있었다.
걸리는 건 맨 아래.
“낭만파.”
시대가 어느 시댄데 저런 타이틀을.
이제야 그의 언행이 이해됐다.
그동안은 뇌 주름을 스팀다리미로 펴 버린 놈인 줄 알았는데. 그냥 성향 자체가 저쪽인 놈이었다.
‘일단 숨기자.’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놈에게 내 정체를 밝히는 건 득보다 실이 많다.
더 나가서 위험하다.
머리가 꽃밭이 녀석이라 쁘띠공듀의 실체를 알고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상 자체가 안 된다.
정상이라면 몇 번 놀리고 털어 낼 수도 있지만.
-미친놈입니다. 하지만 낭만파죠. 도망치세요!
무려 시스템이 공인한 미친놈이다.
갑자기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자신의 순정을 짓밟았다면서.
따지고 보면 내가 피해자 아닌가?
가만히 있다가 봉변당하게 생겼는데.
“A조 경기 종료! 이어서 B조 경기를 시작합니다!”
내 속이 뒤집히든 말든 경기는 지속됐다.
킬더레스의 지시 아래 경기장이 정돈되고 전광판에 B조 대진표가 떠올랐다.
B조 인원은 7명.
난 두 번만 승리하면 결승 진출이다.
부전승이라 맨 뒤 순번에 배치되어 있었으니 그전에 맞서 싸울 놈들을 살필 여유가 있었다.
탈모맨은 잠시 잊고 경기에 집중하자.
“B조 첫 번째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아!
킬더레스가 손짓하자 대진표의 빈칸이 채워졌다.
참가명과 그 위로 드러나는 얼굴.
“B조 첫 번째 경기! 무소속 헌터, 테이커!”
프로레슬링에서나 쓸법한 복면을 쓴 사내가 근육을 뽐냈다.
덩치가 크다. 척 봐도 육체파.
기본적으로 몸이 좋은 사람은 스타팅 스텟이 높다.
스카우터들 역시 흥미롭게 그를 지켜본다.
상대는 중소 길드 소속 헌터. 길드명이 낯선 걸 보니 그리 유명하지 않은 것 같다.
아니면 신생 길드라 알려지지 않았던가.
난 팔짱을 끼며 그들의 전투를 지켜봤다.
* * *
B조 다섯 번째 경기.
내 차례가 다가왔다.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계속 구경만 하고 있었더니 몸이 영 찌뿌둥해서.
“별로 건질 게 없네.”
10층 최대 이벤트라기에 평균 수준이 어느 정도 될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편향성이 컸다.
똑같이 예비전을 통과했음에도 극명히 갈리는 실력 차이.
A조를 탈모맨이 씹어 먹었다면, B조는 저 녀석이다. 심지어 구면.
“제5경기를 시작해 볼까요? 첫 번째 선수는 다들 아시겠죠? 전 6층 처리관 오지혁! 산군 길드의 엘리트입니다!”
-우오오오오!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6층을 거치고 올라왔다.
당연히 오지혁에 대해서는 알고 있고, 나름대로 유명인사다.
‘10층으로 올라올 거라 예상하기는 했지만 벌써 올라온 건가.’
난 입술을 씹었다. 빠르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탈모맨도 이제 막 올라온 타이밍. 놈은 탈모맨보다 늦게 위로 올라갔었다.
‘지원을 받은 건가.’
그것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모든 퀘스트를 진행하며 올라왔다고 가정했을 시 가장 시간을 많이 뺏기는 곳은 9층.
달칸을 잡는 퀘스트는 까다롭지만 신성력 무구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생각보다 쉽게 깰 수 있다.
놈은 대형 길드 소속. 나한테 당했다지만 쉽게 놓을 만한 인재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놈의 목적이 뭐냐는 건데.’
탑을 올라 투기장에 참가한 건 이상할 게 없다.
정석적인 루트니까.
신경 쓰이는 건 놈이 길드의 지원을 받았다는 것.
그것도 무려 신성력이 담긴 물건을 말이다.
당연하게도 신성 무구는 귀하다.
산군은 어떤 생각으로 그만한 지원을 한 걸까.
생각에 빠진 사이 오지혁에 대한 설명을 마친 킬더레스가 내 쪽을 가리켰다.
“이어서, 이번 경기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선수죠! 이블 아이입니다!”
-쿠르르르릉
심플한 설명과 함께 올라가는 철창.
스트레칭을 마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뭔지는 몰라도 싸우면 그만이다.
‘빠르게 해치우는 게 좋겠지.’
저놈은 나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괜히 치고받다가 정체가 들통나면 곤란해진다.
가면을 고쳐 쓰고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관중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실력 좀 보자!”
“가면이나 쓰고 말이야! 그래 가지고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어?”
“부전승까지 하고. 오지혁 믿는다! 발라 버려!”
내게 쏟아지는 욕설과 야유.
예선전 제치고 부전승까지 했다고 미운털이 단단하게 박힌 모양이다.
정작 스카우터들은 냉철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난 영입 후보 중 하나뿐일 테니까.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지만.’
어깨를 으쓱인 난 앞으로 다가온 오지혁을 바라봤다.
확실히 성장했다.
느껴지는 기세가 다르다.
여유롭지만 날카롭게 날 살피는 눈.
“이봐.”
서로를 응시하던 때, 오지혁이 내게 말을 걸었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놈은 내 목소리를 알고 있으니까.
시간이 지났다지만 혹시나 기억할 수도 있었다.
꿈틀. 내가 입을 다물자 눈썹을 추켜세운 오지혁이 삐딱하게 고개를 돌렸다.
위아래를 훑는 시선. 그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대답도 안 하는군. 말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우연이네. 내가 찾고 있는 놈도 그런 놈이거든. 체형도 비슷하고.”
이 새끼?
진짜 나를 잡으러 온 거였나.
“가면 안이 궁금하군. 곧 보도록 하지.”
오지혁이 진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난 대답 대신 중지를 들었다.
놈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린다.
-오오오오오!
도발이 마음에 든 걸까. 관중들이 소리를 질러 댔으며. 큭큭. 웃던 킬더레스가 나와 오지혁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하늘 위로 몸을 띄웠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경기 스타트!”
-콰앙!
킬더레스의 선언과 함께 놈에게 달려들었다.
순수하게 신체 능력으로만.
놈에게서 빼앗은 아티팩트는 쓸 생각이 없다.
더불어 파이어 밤도.
그러니까.
[버프 다이스 (C) Lv.4]
[4]
[잔상]
놈도 처음 보는 스킬을 위주로 간다.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순간적으로 내 몸이 두 개로 번지더니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검이 뻗어 나갔다.
“큽!”
-까강!
놈이 기겁하며 발차기를 날렸다.
경지에 오른 발놀림. 순간적으로 방향을 꺾은 발이 두 개의 검을 모조리 쳐 냈다.
당연하게도 마찰음은 하나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이번 버프는 잔상.
이런 식으로 작동되는 거였군.
‘좋은 게 걸렸어.’
놈이 자세를 잡는 타이밍에 횡으로 검을 그었다.
잔상 역시 마찬가지.
목으로 날아오는 게 한 개. 몸통을 노리고 들어오는 게 한 개.
골라라. 어디를 막을 건지.
“까다로운 능력을 쓰는군.”
오지혁은 막기보다 피하는 걸 선택했다.
확실히 센스가 있다. 지레짐작으로 움직이는 것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
그런데 말이야.
[디그 (F) Lv.2]
뒤는 살피셨나?
-쑤욱!
놈의 뒤쪽에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다리.
오지혁이 이를 악물며 몸을 틀어 보지만.
-카아아앙!
그보다 빠르게 내 검이 놈의 몸을 찔렀다.
정확히는 찌르려고 했다.
[쉴드 (D) Lv.5]
놈을 감싸고 있는 반투명한 막.
그동안 얼마나 써 댔는지 Lv.3이었던 스킬이 Lv.5까지 올라 있었다.
난 재차 검을 휘두르며 전진했다.
잔상을 통해 들어가는 페이크.
언제 꺼질지 모르는 바닥.
놈의 신경이 분산되는 것은 필연이었고.
“흐압!”
밀리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놈이 미들킥으로 위협했을 때는.
[워터 (F) Lv.3]
-촤아아아악!
물을 쏟아부었다.
한 번에 뒤집어쓴 물줄기.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녀석이 공격에 대비해 몸을 웅크렸다.
오케이. 원하는 대로.
-빠아아아악!
크게 한 바퀴 돌며 돌려차기를 넣어 줬다.
제대로 들어갔는지 오지혁의 몸이 기우뚱한다.
어때? 발차기만 하다 반대로 맞아 보니 기분이 산뜻하지?
“오오오! 저 녀석 뭐야? 꽤 하잖아?”
“잡다한 스킬을 많이도 익혔군. 조합을 잘했어.”
“머리 좋은데? 근데 저렇게 스킬 남발하면 마력이 버티나?”
“그보다 저거 잔상 남는 건 뭐지? 처음 보는 건데. 권능? 아니면 스킬?”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저 녀석 지금 오지혁을 압도하고 있다고!”
관중들이 열광했다.
오지혁은 그만큼 네임드였으니까.
난 서리 불꽃 검을 고쳐 쥐었다.
슬슬 끝내자. 버프가 지속되는 시간은 10분.
어느 순간 잔상이 사라지면 의아해할 거다.
결심을 굳힌 나는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순간.
-키릭
몸이 멈추었다.
도대체 무슨?
난 빠르게 주변을 살폈고 곧 내 몸을 감싸고 있는 실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얇은 줄. 색도 투명해 빛에 반사되지 않았다면 있는지도 몰랐을 그것.
[마나 라인 (C) Lv.2]
-마력으로 실을 생성합니다.
-컨트롤에 따라 길이, 강도를 조절합니다.
-끈적임 등의 특성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잡았다.”
비틀거리던 오지혁이 나를 노려본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 내 보지만 흔들리기만 할 뿐 풀어질 생각을 않는다.
스킬 성능이 좋은 건지 저놈의 컨트롤이 좋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대로면 무방비하게 당할 수밖에 없다.
남은 방법은 하나.
‘이 실은 마력으로 되어 있다. 더 강력한 마력으로 끊어 버리면 돼.’
파이어 밤을 터트리면 어떻게든 될 거다.
하지만 그러면 정체가 들통난다. 조금 느리겠지만 파이어로 조금씩 녹여……!
-콰아아아앙!
“크학!”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오지혁이 달려들어 발차기를 날렸다.
전통으로 들어간 데미지.
충격에 몸이 붕 떴다 떨어졌다.
오랜만에 맞아도 더럽게 아프네.
-카가가가각
한 대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걸까.
놈이 마라 라인을 이용해 날 잡아끌었고.
“네놈도 맞아야겠지?”
내게 달려오는 것과 동시에 파우치에서 뭔가를 꺼냈다.
검은색 구슬.
오지혁이 곧장 구슬을 내던졌다.
-푸화아아아악!
삽시간에 피어오르는 연막.
폭탄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연막탄이라?
이 타이밍에 왜?
모르겠다. 지금은 몸을 구속하는 실을 끊어 내는 것에 주력하자.
[파이어 (F) Lv.2]
-치지직, 치이이익
다행히 실이 녹아내린다.
이제 조금만 더!
난 마력을 돌렸으나 놈이 더 빨랐고.
충격에 대비해 몸에 힘을 주는 순간.
-타악
오지혁이 내 가면을 벗겼다.
[목걸이 투구를 활성화시킵니다!]
반사적으로 활성화한 투구.
덕분에 얼굴을 감추는 건 성공했지만.
“반갑다, 김정수.”
놈은 이미 이 투구를 본 적이 있었다.
우리를 에워싸듯 올라가는 연막.
당장이라도 발차기를 날릴 것 같던 놈이 멈춰 섰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
“네게 물어볼 것이 있다.”
그의 손짓에 몸을 구속하던 실이 사라졌다.
서로 마음먹는다면 공격할 수 있는 공간.
“넌 튜토리얼 때를 기억하나?”
오지혁은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