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6화 (56/740)

56화 얻다

릴카의 꼬리가 살랑거린다.

의기양양한 표정. 반드시 이길 내기를 걸겠다는 건가.

아니면 확신이 있다는 건가.

“어떤 내기지?”

저 검을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만하다.

잘만 하면 A급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물건이다.

‘미완성이라고 했지. 완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후에 업그레이드할 가능성도, 잠재력도 높은 무기.

행운 스텟까지 반응했으니 범상치 않은 물건인 건 확실하다.

킬더레스도 아는 물건인지 눈썹을 까딱이며 입꼬리를 올렸다.

“릴카, 그걸 걸 생각인가? 저 친구가 재밌는 건 맞지만 너무 감상에 젖은 걸지도 몰라. 고작해야 10층이네.”

“알아. 그런데 나도 탐나는 게 있어서 말이야.”

릴카가 눈을 빛내며 날 주시한다.

“이 검을 빌려주지. 물론 무작정 줄 생각은 없어. 가지고 위로 올라가면 내 손해잖아?”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사기를 당한 경험이 있을지도 몰랐다.

릴카가 10층에서 퀘스트를 준 지는 오래됐으니까.

지쳐서, 혹은 일말의 가능성을 품고 아이템을 빌려줬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담보로 네 개구리를 데리고 있어야겠어.”

“궤에?”

“어? 덕춘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흉갑 안에 숨어 있던 덕춘이가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언제 뺏은 거지? 움직이는 건 보지도 못했는데.

덕춘이 역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지 당황한 눈치.

저번에도 겪은 거지만 어떤 방법을 쓴 건지 예측조차 안 되었다.

스킬? 아니면 권능? 아니면 신체 능력이 말도 안 되게 빠른 건가?

긴장감에 목 뒤가 빳빳하게 굳었다.

“으휴. 그 손버릇은 여전하군.”

“손버릇이라니. 훔친 거 아니거든? 담보야, 담보.”

경계하는 나와 달리 태연한 둘.

고개를 젓는 킬더레스의 말에 릴카가 콧방귀를 뀐다.

아담한 다리를 용케 꼰 릴카가 턱을 괴었다.

“대여 기간은 일주일. 그 안에 화갑룡의 비늘을 가져오면 너의 승리야. 검을 줄게. 하지만 기간을 넘거나 도망치면…….”

-문질문질

“에헤헤헤헤. 이 개구리는 내 거야. 이름도 정해 뒀다고. 만쥬 어때! 말랑말랑한 거 너무 좋아.”

“그, 궤에에엑!”

반쯤 풀어진 얼굴로 덕춘이를 조몰락거린다.

약간 맛이 간 거 같은데.

기겁을 한 덕춘이가 손바닥으로 릴카의 머리를 쳐 댔지만 데미지가 전혀 안 들어갔다.

나도 한 대 맞으면 고개가 돌아가건만 릴카한테는 투정 정도로 느껴지는 모양.

처음 볼 때부터 덕춘이를 노리더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지만 그런 내기라면 덕춘이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없어. 펫이라고는 하지만 동료에 더 가까운 애라고.”

“개, 개구우울!”

감동을 받았는지 덕춘이가 촉촉한 눈으로 올려다본다.

실상은 멋대로 내기를 받아들였다가는 덕춘이가 날뛸 거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진담이다. 대충 70퍼센트 정도?

흠흠. 아무튼.

“덕춘아, 나 믿냐?”

난 담보로 잡힌 덕춘이의 허락을 구했고.

잠시 턱을 문지르며 고민하던 덕춘이는.

“궤에.”

비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케이. 이걸로 내기 성립이다.

릴카와 시선이 오갔다. 서로 내기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약간의 신경전. 그걸 가만히 바라던 킬더레스가 웃음을 흘렸다.

“크큭! 진짜 재밌는 놈들이군. 너도 그렇지만 카오스 개구리라니. 개구리 형태는 처음 보네.”

얼굴을 쓸어내린 킬더레스가 나와 덕춘이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저거 스킬북이다.

“덕분에 구경거리가 생겼어. 가져가라. 필요할 거다. 내기는 정당하게 가야지.”

[도축 (C)]

-몬스터를 도축합니다.

-도축한 몬스터의 부산물이 아이템으로 인정됩니다.

“무작정 비늘을 뜯어 봤자 아이템이 아니면 쓸모가 없지 않나.”

“엥? 뭐야. 너 도축 스킬도 없었어?”

“계속 말하지만 릴카, 고작 10층이다. 이제 막 기본을 다질 때라고. 방금 그 부스러기도 아이템 인정을 못 받지 않았나.”

“끄응. 그렇긴 하네.”

킬더레스의 꾸중에 릴카가 볼을 부풀렸다.

여관 주인의 말대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모양.

둘의 관계야 관심이 없고.

“고맙습니다, 킬더레스.”

난 바로 스킬을 익혔다.

어째서인지 도움을 많이 주는 킬더레스다.

왤까. 단순한 호기심?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나?

어쩌면 저번 사고가 신경 쓰여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준비가 다 됐으면 가 보게. 가만히 있어도 시간은 흐르지. 투기장 이벤트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투기장 이벤트까지 남은 시간 – 16:24]

벌써 시간이 이만큼 흘렀나.

킬더레스의 말대로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자, 받아. 내기 시작이다. 잘 갔다 와! 늦게 와도 좋고 아니야, 그냥 오지 마!”

본인의 퀘스트를 망각했는지 검을 내민 릴카가 소리쳤다.

품에는 덕춘이를 안은 상태. 덕춘이 역시 얼른 갔다 오라며 손을 까딱였다.

“분명 일주일이라고 했지?”

검을 받아든 난 입꼬리를 올렸다.

준비는 끝났다. 모든 건 순조로웠고 그녀와의 내기는.

“하루면 충분해.”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

* * *

단 6시간.

11층과 12층을 빠르게 돌파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이미 한번 겪은 필드. 서식하는 몬스터까지 파악이 끝났다.

새롭게 얻은 서리 불꽃 검까지 있으니 날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포탈이 개방됩니다.]

눈앞에 생성된 포탈.

난 컨디션을 살폈다.

부상은 전무. 장비도 새로 맞춰서 그런지 제 기능을 다 해 주고 있다.

게다가.

[화기 내성 (E) Lv.3]

빠르게 레벨이 오르고 있는 화기 내성 덕분에 체력도 잘 보존한 상태.

10층대는 폭염 지대에서의 적응하는 것이 테마였다.

그 의도 대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남은 시간은 10시간 남짓.”

얼핏 보면 긴 시간이다.

무리한다면 13층에 두 번 도전할 수도 있을 정도.

물론 그런 짓은 할 생각은 없다.

“한 번에 제대로 끝낸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몬스터는 5성급 괴물.

요행을 바라고 무작정 달려들어서는 답이 없다.

확실한 순간, 놈이 가장 방심했을 때를 노려야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올라간다.

‘죽은 다음 부활했을 때 얼마나 기절해 있을지도 알 수 없고 말이지.’

길면 6시간. 운 좋게 일찍 깨더라도 몇 시간은 버릴 게 분명했다.

죽음에 이르는 충격을 받았으니까.

부활하더라도 어느 정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대충 4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거군.”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부디 화갑룡이 허점을 빨리 드러내기를 바랄 수밖에.

-우우우웅

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또렷하게 살아 있는 감각.

언제든 반응할 수 있게 준비하며 기다렸고.

[13층]

13층. 화산 지대로 넘어왔다.

역시나 뜨겁게 달아오른 필드.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난동을 부리는 화갑룡이 눈에 들어왔다.

우선 자세를 낮춰 놈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지금부터는 인내의 시간이다.

‘놈은 주기적으로 용암을 마신다.’

목이 말라서 마시는 건지, 브레스를 쏠 때 쓰려고 마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노리는 건 그 타이밍.

시작은 같지만 결과는 다를 거다.

그렇게 3시간.

열기를 견디며 놈의 뒤를 쫓았고.

“크르르르르르.”

원하던 타이밍이 왔다.

튼튼한 뒷다리로 몸을 받치며 용암으로 고개를 숙이는 녀석.

난 앞으로 달렸다.

지금이다.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 (B)]

[버프 다이스 (C) Lv.4]

[충격파]

버프를 둘렀다.

2배로 높아진 스텟으로 인해 향상된 신체 능력.

게다가 충격파라는 효과.

-파아앙!

발을 박차자 충격파가 터지며 가속됐다.

“크르르르!”

대놓고 달려간 탓일까. 고개를 든 놈이 꼬리를 휘둘렀다.

대지를 박살 내며 들어오는 공격.

워낙 꼬리가 거대해 버스가 날아오는 것만 같다.

안개 질주를 쓰면 간편하게 피할 수 있지만.

“지금은 안 돼!”

[파이어 밤 (B) Lv.6]

-콰아아아앙!

묘기를 부리듯 점프하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로 인해 붕 떠 버린 몸.

다리 밑으로 놈의 꼬리가 지나가고.

여기서 한 번 더.

[파이어 밤 (B) Lv.6]

“크읍!”

등이 터져 나가며 놈을 향해 방향이 틀어졌다.

난 곧장 중량 팔찌를 활성화했다.

마력이 빠져나가며 늘어나는 중량.

-콰아아앙!

내리꽂히다시피 지면에 착륙한 난 앞으로 달렸다.

이걸 위해 중량 팔찌를 아끼고 있었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통증은 무시했다.

부러졌더라도 지금은 멈춰서는 안 된다.

“크하아아아악!”

화갑룡이 포효했다. 두 번째 패턴.

발 구름이다.

시스템 제약으로 브레스를 쓸 수 없는 놈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육탄전뿐이니까.

-쾅! 쾅! 쾅! 쾅!

-콰르르르!

아니나 다를까. 놈이 미친 듯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깔리면 게임 오버.

파편에 맞아도 전투 불능. 혹은 치명타.

순수한 내 실력만으로는 절대 피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밤을 부르는 자-칭호]

[인위적인 밤이 찾아옵니다.]

힘을 더해야 한다.

-스아아아아아!

한순간에 찾아온 어둠.

뜨거운 용암만이 세상을 붉게 물들이는 세상 속 난 검을 휘둘렀다.

[칭호 효과!]

[밤에 활동 시 스텟이 상승합니다!]

-콰가가가각!

-쩌어엉!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속도로 내뻗은 검.

내게로 날아온 돌덩이들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고.

-쩌저저적!

서리 불꽃 검에 깃든 냉기가 공간을 얼리기 시작했다.

다시금 돌진.

-콰직!

서리 낀 대지를 박차며 놈의 다리 사이를 통과했다.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놈을 상대할 수 있을까.

어디를 공격해야 비늘을 뜯을 수 있을까.

놈이 물을 마시는 동안 항문 쪽을 노려 볼까도 했다.

적어도 거기는 내구도가 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꼬리 때문에 불가능해.’

그 생각은 접었다. 애초에 놈의 비늘은 파이어 밤도 통하지 않는 강도.

이미 놈의 발목 관절 부근을 공략해 본 적이 있지 않던가.

놈에게 특별히 약한 비늘은 없다.

그렇다면 노릴 곳은 하나.

“역린.”

목 가운데 단 한 개. 뒤집혀서 자라난 비늘.

매끄러운 몸통에서 유일하게 겉으로 튀어나온 그곳을 노려야 한다.

“크르르르르!”

살기로 가득한 놈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심장이 조이는 듯한 패기.

절대적인 강자의 앞에 오금마저 저렸지만.

[옵텍터를 소환합니다.]

“눈 가려!”

-키키키키키키!

칭호의 특수 효과로 소환한 옵텍터가 놈의 얼굴을 뒤덮었다.

화갑룡이 짧은 팔로 떨쳐 내려 했지만 옵텍터는 암흑 속성. 떨쳐 낼 수 없다.

데미지는 줄 수 없겠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나에게 필요한 건 잠깐의 틈이니까.

-쿠웅!

강하게 땅을 박차며 도약했다.

[파이어 밤 (B) Lv.6]

[안개 질주 (B) Lv.2]

[스킬 레벨 업!]

[안개 질주 (B) Lv.3]

파이어 밤으로 가속.

그대로 발동시킨 안개 질주.

레벨 업을 하며 늘어난 안개화 시간.

-스아아아악!

1초도 되지 않은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내 집중력은 최고조에 달했고.

‘닿는다.’

옵텍터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드는 화갑룡의 역린에 근접할 수 있었다.

[안개화가 종료됩니다.]

안개화가 풀리며 돌아온 실체.

속도는 줄지 않았다.

날아가는 속도 그대로, 관성을 따라 서리 불꽃 검을 내질렀다.

팽팽하게 당겨진 전신의 근육.

마력을 불태우는 일격.

하나의 점이 되어 이어진 찌르기!

-쿠득

놈의 몸에 검이 맞닿았다.

거꾸로 뒤집힌 비늘.

드러난 틈새.

검의 끝은 그 사이를 정확히 파고들었고.

-뿌드드득!

그대로 검을 틀어 공간을 만들었다.

이제 시작이다.

난 입술을 깨물며 틈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크하악!”

검날에 닿은 손이 찢겼다.

용암도 삼키는 화갑룡의 체온에 손이 익었다.

그럼에도 난.

[버프- 충격파]

[파이어 밤 (B) Lv.6]

[파이어 밤 (B) Lv.6]

[파이어 밤 (B) Lv.6]

-콰르르르릉!

마력을 쥐어 짜내 추진력을 넣었다.

손가락이 잘린 걸까. 아니면 화상 때문일까.

손에 감각이 없다. 끔찍한 통증만이 척추를 타고 뇌를 찌를 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경련한다.

고문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1센티미터라도 깊숙하게.

강박에 가까운 집착으로 손을 쑤셔 넣었고.

“비늘 잘 가져간다, 자식아.”

[되갚기 (A) Lv.1]

[도축 (C) Lv.1]

-구그그그그극

-쿠와아아아아앙!

내부에서부터 폭발을 일으켰다.

몸속의 마나가 단번에 빠져나가는 기분.

-콰아아아앙!

가공할 만한 충격이 전신을 휩쓸었다.

이때만큼은 화기 내성도 버프로 강화된 신체도 의미를 잃었다.

-삐이이이이이!

폭음에 귀가 먹고 섬광에 눈이 먼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이명만이 폭발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 줄 뿐.

손끝부터 사라지는 몸뚱이를 껴안고 이로 비늘을 악물었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는데.

절대 혼자서는 돌아가지 않는다.

손이 없으면 입으로라도 비늘을 물고 갈 생각.

-파스스스스

세포까지 모조리 타 버렸는지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안개화를 했을 때와는 또 다른 부유감.

이내 몸은 가루가 되고 의식은 꺼져 갔지만.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바이퍼 가죽 (64/50)

-화갑룡의 비늘 (1/1)

[퀘스트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릴카를 찾아가세요!]

성공했음을 직감했고.

그렇게 나는 죽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