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내기할래?
“허억!”
난 숨을 크게 내뱉으며 정신을 차렸다.
땀으로 흠뻑 젖은 등. 피부에 달라붙는 천의 까끌까끌한 감촉.
뜨거웠던 열기는 사라진 채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갔다 나온다.
손톱만 한 발광석이 박힌 천장.
그리 밟지 않은 조명에 비친 평범한 침대와 테이블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크읍.”
미약하게 남아 있는 통증의 여파에 얼굴을 찌푸렸다.
서둘러 몸을 더듬었지만 단단한 갑옷만 느껴질 뿐이다. 흉갑을 제외한 팔다리는 배틀 슈트가 찢겨 맨살이 드러났지만…….
“으게에에에에.”
“덕춘아!”
침대 한구석에 엎드려 있던 덕춘이도 혓바닥을 내밀며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덕춘이의 등을 쓰다듬으며 정신을 가다듬기를 몇 분.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되기 시작했다.
“죽었구나.”
이곳은 내가 머무는 여관.
10층 안전지대에서 부활한 거다.
화갑룡의 비늘을 얻기 위해 발버둥 치다가 말이지.
스킬을 난발하고 진짜 개처럼 뛰었다.
마지막 기억은 거대한 뒷다리가 나를 덮치는 광경.
부르르, 몸이 떨린다.
산채로 뭉개지는 기분은 빈말로라도 좋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한 번에 죽어서 다행이네.”
어중간하게 다리나 팔이 뭉개져서 고통받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가는 게 나았다.
압도적인 차이.
사냥이 아니라 비늘 하나 뜯는 게 목적이었건만 결과는 참혹했다.
괜히 A급 헌터들이 나서는 게 아니다. 그럴 만한 수준의 몬스터니까 그렇지.
이쯤 되면 실제로 화갑룡을 잡는 헌터들이 실존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이러니저러니 험한 꼴을 보기는 했지만 당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할 수 있어.”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놈에게 무참히 밟힌 건 맞다. 내 공격이 거의 먹히지 않는 것 역시 사실이고.
대략 40초.
내가 놈의 발길질 사이에서 살아남았던 시간 동안, 난 한 가지 가능성을 보았다.
일단 파이어 밤으로 어떻게 할 수는 없다.
방어력이 워낙 뛰어나고 속성 자체가 불인 녀석이다.
파이어 밤은 상성이 좋지 않다.
남은 공격 스킬은 하나.
난 되갚기의 정보를 불러왔다.
[되갚기 (A) Lv.1]
-받은 데미지를 모아 방출합니다. 최대 10,000
-현재 데미지 누적량 (10,000/10,000)
-데미지 누적 시 충격을 완화시킵니다.
“와, 씨. 무식한 녀석.”
놈한테 밟히면서 데미지 누적량이 풀충전 됐다.
그 전에 내가 파이어 밤을 터트려댄 탓도 있겠지만 놈의 내려찍기가 강하다는 거겠지.
“풀충전 되갚기라면 놈한테 한 방 먹여 주는 것도 가능하겠는데.”
달칸에게 썼을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먹힐 것 같았다.
벌써부터 몸이 근질근질하다.
기분 같아서는 놈의 면상에 스킬을 꽂아 주고 싶지만 목적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난 놈과 싸우는 게 아니라 비늘을 뜯어내러 가는 거니까.
이미 머릿속으로는 그럴듯한 계획이 만들어졌다.
힘들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다는 확신도 들었다.
남은 건 작전 수행을 위한 준비뿐.
“상점창.”
먼저 망가진 장비부터 사자.
어째서인지 펠라인의 노란 몸통은 파괴되지 않았다.
방어력은 낮은데 내구도는 좋은 건가.
아니면 나조차 파악하지 못한 히든 옵션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이어도 나한테는 이득이니까 넘어가고.
[배틀 슈트 (E)를 구매합니다.]
[튼튼한 각반 (D)을 구매합니다.]
[날렵한 완갑 (D)을 구매합니다.]
안에 받쳐 입을 슈트와 팔다리 보호구를 사서 입었다.
파우치도 좀 너덜너덜하기는 했지만 못 쓸 정도는 아니니까 다음 바꾸도록 하고.
“검이 걸리네.”
난 혀를 찼다.
단 일격 만에 부러졌다.
그동안 사냥을 하면서 내구도가 닳은 것도 있지만 성능 부족이 더 크다.
D등급 무구로는 놈에게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는 말.
나한테 검술 관련 권능이나 스킬이 있으면 또 모르겠는데 지금은 없으니까.
“적어도 B급은 되어야 할 것 같지?”
“그에에. 궥궥.”
내 물음에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위해서라도 공격을 버틸 수 있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D급으로는 역부족이니까. C급은 되어야 하고.
C급 역시 얼마나 버틸지 미지수이므로 B급은 돼야 안심이다.
문제는 나한테는 그런 무기를 살 만한 곳이 없다는 것.
내 상점창은 브론즈 등급. 기껏해야 D등급이 한계다.
운 좋게 C등급 아이템이 목록에 생성되더라도 그게 무기일 거라는 보장이 없다.
엉뚱하게 워해머나 활, 메이스 같은 게 나오면 쓰지도 못할 거고.
“남은 건 안전지대에서 사거나 개인 거래를 하는 건데. 이것도 애매하단 말이지.”
시장은 이미 둘러봐서 어떤 상품을 파는지 알고 있다.
상점창이랑 크게 차이가 없다.
좀 더 취급하는 아이템의 종류가 많고, NPC와의 관계에 따라 할인받을 수 있다는 게 다를 뿐. C급 무기는 없었다.
남은 건 개인 거래뿐인데.
“더럽게 비싸네.”
“그에에에.”
한번 둘러보고 나니 살 생각이 싹 사라진다.
도검류가 인기가 많아서 그런지 다른 비주류 무기에 비해 가격이 셌다.
B급은 아예 쳐다도 못 볼 수준.
“어쩐다.”
아티팩트라도 팔아야 하나.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는 내가 써야 하니 안 되고.
중량 팔찌라도 팔아야 하나, 아까운데.
난 잠시 고민에 빠졌고.
“덕춘아, 가자.”
“궤에에.”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다.
물건들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찾아야 할 인물이 있다.
* * *
여관 프론트.
“저기. 혹시 릴카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난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는 NPC에게 말을 걸었고.
“음? 릴카? 글쎄. 워낙 여기저기 많이 다니는 애라. 아. 그쪽으로 가 봐, 투기장. 킬더레스랑 잘 노는 얘거든.”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숙박 일자 좀 더 늘릴게요.”
“하하하하! 좋지. 며칠로 계산해 줄까?”
“넉넉잡아 10일로 해 주세요.”
“그래. 수고하게.”
자동으로 포인트가 빠져나가는 걸 확인하고 여관 밖으로 향했다.
고마워서 머무는 기간을 늘린 건 아니다.
어차피 10층에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할 거 같아서 그렇지.
계약한 날짜가 지나면 자동으로 여관방에 대한 권리가 사라진다.
그 말은 무엇이냐.
광장에서 부활하게 된다는 거다.
안전장치는 제대로 마련해 두는 게 상책이었다.
여관은 그렇다 치고.
“투기장이라.”
난 빠른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전보다 많은 사람이 나와 있어 시끌벅적하다.
묘하게 흥분감이 감도는 공기.
무장한 이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어 댄다.
10층 최대 이벤트가 다가오는 게 실감됐다.
[투기장 이벤트까지 남은 시간 - 17:32]
아무래도 부활한 뒤에 오랫동안 정신을 잃었던 모양.
이제 하루도 채 남지 않았다.
서두르자.
반쯤 뛰다시피 걸은 지 10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행히 투기장 신청을 할 사람은 다 했는지 한가해 보였다.
여전히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펜을 만지작거리는 킬더레스.
그 옆에는 내가 찾던 NPC가 있었다.
“릴카!”
내 외침에 그녀의 귀가 쫑긋 서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오! 안녕! 안 그래도 너 얘기하고 있었어.”
“음? 그때 그 친구군.”
그래도 안면을 텄다고 반겨 주는 둘.
난 킬더레스에게 목례를 하고 릴카에게 다가갔다.
“나 좀 도와줘.”
“응?”
릴카가 고개를 갸웃한다. 케이크라도 먹고 있었는지, 생크림이 묻은 포크를 빨던 릴카가 흘낏 킬더레스를 바라봤다.
뭔가 아는 게 있냐는 눈빛이었지만 킬더레스라고 알 리는 없었고.
“네가 준 퀘스트 깰 수 있어. 먼저 이거, 혹시 몰라서 여분도 챙겨 놨다.”
난 빠르게 보물 보따리를 열어 11층에서 얻은 바이퍼의 가죽을 꺼내 넘겼다.
퀘스트라는 말에 흥미가 동하는지 릴카가 냉큼 가죽을 챙겨간다.
위로 올리고, 뒤집어서 살피고 품질을 확인하더니.
“좋네! 에헤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만족스러운지 엄지를 세운다.
킬더레스도 무슨 이야기가 오갈지 궁금한지 옆으로 자리를 슬쩍 옮기더니 남은 의자를 권했다.
“아,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
자리에 앉은 난 입술을 축였다. 이제부터 말을 잘해야 한다.
내가 릴카를 찾아온 이유.
그녀한테서 검을 받아내야 한다.
릴카는 상인이자 대장장이. 저번에 내게 보여준 아이템 목록만 봐도 범상치 않았다. B급 검 정도는 당연히 가지고 있겠지.
‘가능하다면 사거나 공짜로 얻고 싶지만 불가능할 거고. 빌리는 수밖에 없나.’
사실 빌리기도 어렵다.
날 얼마나 봤다고 장비를 빌려줄까. 빌린 다음에 위로 올라가 버리면 그만인데.
심지어 릴카는 상인이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데 도가 튼 인물.
여기까지만 보면 성립 자체가 안 되는 거래지만.
“검이 필요해. 화갑룡한테 통할 정도의 수준으로. 최소 B등급.”
난 바로 딜을 걸었다.
잠시 이해가 안 되는지 릴카가 머리를 갸웃한다.
“이제 막 10층에 올라오지 않았었나? 좀 비쌀 텐데?”
“알아. 그러니까 빌려주라.”
“와! 얘 엄청 뻔뻔해!”
눈을 동그랗게 뜬 릴카가 킬더레스를 바라보며 날 가리켰고.
“큭! 크흐흐흐! 이런 놈은 또 처음 보는군.”
킬더레스는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테이블을 쳐 가며 웃음을 삼켰다.
내가 생각해도 뻔뻔하기는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이렇게라도 해야지. 이게 다 저 여우 녀석 때문이다.
말 같지도 않은 퀘스트를 주니까 이러지.
“으으음. 싫어! 안 돼! 돌아가!”
역시나 바로 거절하는 건가.
여기까지는 예상했다. 바로 다음으로 넘어가자.
“네가 준 퀘스트. 지금까지 몇 명이 도전했지?”
조금은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
릴카가 고운 미간을 찌푸리더니 톡톡, 손가락을 두드린다.
대답을 안 들어도 되겠다.
“그중에서 퀘스트를 클리어한 사람은?”
“으으음.”
그녀의 귀가 살짝 접힌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없다.
커뮤니티를 다 뒤져도 그녀의 퀘스트 내용은 바뀌질 않았으니까.
한 번도 클리어된 적 없다는 거다.
“분명 네가 말했지. 주문 들어온 것을 만들기 위해 재료를 모으고 있다고.”
난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상인. 주문받은 물건을 공급할 의무가 있으며 그 대상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10년 동안 물건을 못 받고 있다.
상인으로서 신뢰감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인 동시에…….
‘물건을 주문한 사람이 몇 년을 기다릴 정도로 가치 있게 여기는 뭔가가 걸려 있다는 거지.’
릴카와 주문자, 나 세 명의 이해관계가 엮여 있다.
그 고리를 풀어줄 방법은 내가 퀘스트를 깨는 것뿐이고.
여기서 마침표를 찍자.
-잘그락
난 보물 주머니에서 손톱만 한 부스러기를 꺼내 릴카에게 건넸다.
이게 내가 가진 마지막 수다.
“이, 이건!”
“오호? 자네 설마?”
곧장 정체를 알아차리는 릴카와 킬더레스.
그건 화갑룡의 비늘 조각이었다.
정말 부스러기. 무언가를 만들 재료로 쓰기에는 품질도 크기도 별로다.
단순히 내가 놈과 싸울 수 있음을, 실제로 싸웠음을 증명하는 용도밖에 못 하지만.
“네가 준 퀘스트 반드시 깨줄게. 나랑 너, 물건을 기다리는 손님을 위해서. 싫으면 난 퀘스트를 포기한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단정 짓듯 말을 끝맺었다.
딜을 하고 있는 거다.
나를 포기하고 다시 오랜 기간 동안 퀘스트를 깨 줄 사람을 찾을 것이냐.
아니면 약간의 지원을 주고 완료할 것이냐.
릴카는 두 경우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하며.
“끄응. 그건. 으으으으!”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배짱부리는 거랑 다를 바 없었지만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위험을 감수해야지.
상인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던가.
“흐흐, 크흐흐! 역시 재밌는 친구야. NPC를 상대로 뻣뻣하게 굴 줄도 알고. 간만에 웃는군. 어때, 릴카? 좀 도와주지 그래? 어차피 그럴 생각이잖아.”
“킬더레스 너…….”
마냥 재밌는지 아까부터 웃어 대던 킬더레스가 끼어들었다.
탑 안에서 심심하기는 헌터들이나 NPC나 똑같은 모양.
누구는 갖은 수를 계산해서 딜 하고 있구만.
그래도 덕분에 릴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잠시 킬더레스를 노려보던 릴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대신 그냥 빌려주지는 않을 거야.”
-지이이잉
그녀의 손짓에 허공에서 검 한 자루가 나왔다.
기묘한 생김새. 한쪽 날이 백색 검신으로 되어 있는 검.
[보수된 서리 불꽃 검 (A)]
-불꽃을 잃은 서리 검.
-냉기가 감돕니다.
-민첩 +45
-마력 +30
-온전하지 않습니다.
-본신의 힘을 전부 발휘할 수 없습니다.
무려 A급 무기!
A급치고 총 상승 스텟 자체는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A급 장비의 평균 총 상승 스텟 100이니까.
이 무기는 기껏해야 75 정도고.
‘하지만 마력을 올려 주는 시점에서 최상급 무기라 볼 수 있지.’
무려 마력이 30이나 오르니까.
게다가 A급 장비치고는 드물게 착용 조건도 없다.
엄청난 메리트.
그뿐일까.
-우우우웅
미약하게 번지는 빛무리.
행운 스텟이 반응하고 있다. 이미 행운 스텟의 영향력은 여러 번 겪었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내 반응을 감상하던 릴카가 입꼬리를 올렸다.
“화갑룡을 상대로 할 거라면 냉기 쪽이 좋겠지.”
-파앗
그녀가 손을 휘젓자 신기루처럼 검이 사라졌다.
잠깐 홀렸던 거 같다.
난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다잡았고.
“내기 하나 할래? 결과에 따라서는 빌려주는 게 아니라 그냥 줄 수도 있는데.”
릴카의 말에 입을 딱 벌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