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화갑룡
바이퍼 가죽을 모두 모은 시점에서 11층에서 볼일은 끝났다.
곧장 위로. 난 12층을 돌파했다.
시간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았으니까.
결투장 이벤트가 벌어지기 전에 릴카의 퀘스트를 해결하는 게 내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커다란 산을 하나 넘어야 한다.
릴카의 퀘스트가 괴랄 맞기로 유명한 이유.
모든 도전자가 실패할 수밖에 없던 이유.
“화갑룡의 비늘을 뽑아야 해.”
쉽지 않을 거다. 화갑룡은 5성급 괴물이니까.
지금의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이긴다.
진짜 이걸 깨라고 만든 퀘스트인가.
릴카 그 녀석, 다음에 만나면 꿀밤이라도 먹여 줘야겠다.
-후우우우우
복수의 의지를 다지는 것도 잠시.
상념을 지우라는 듯 열풍이 불어왔다.
화끈한 열기. 이전이라면 숨이 턱 막혔을 테지만.
[화기 내성 (E) Lv.2]
이 스킬을 얻은 덕분에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게에에.”
“덥지? 덕춘아.”
내성 스킬이 없는 덕춘이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지만.
그나마 특성 중에 화염이 생겨서 버티고 있다.
스스로가 불덩이가 될 수 있으니 열기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거겠지.
다만 태생 자체가 개구리라 지치는 모양.
어디 보자.
“상점창.”
[양동이를 구매했습니다.]
[얼음을 구매했습니다.]
평범한 양동이와 얼음.
[워터 (F) Lv.3]
거기에 워터 스킬 한 번이면 훌륭한 얼음물이 된다.
이대로 마셔도 좋지만.
“들어가, 덕춘아. 풀장이다!”
“궤에에에엑!”
-풍덩!
지금만큼은 덕춘이 전용 수영장 되시겠다.
개구리가 얼음물에 들어가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덕춘이는 영물이니까 괜찮을 거다.
반응도 좋고.
“그에에에에.”
많이 더웠는지 머리만 빼꼼 내밀고 전신을 얼음물에 담그고 있다.
이제 살겠다는 표정.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이 앙증맞다.
“개구리 팔자가 상팔자야, 그냥.”
주인 잘 만난 거 같지, 덕춘아?
난 톡톡, 덕춘이의 코를 두들겼고.
“궤엑.”
덕춘이는 만족하는지 엄지를 치켜세웠다.
피식. 웃음을 흘리고 나도 물을 꺼내 마셨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11층을 깨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12층도 최소 공략 조건을 만족시키는 건 쉬웠다.
[머드 골렘 처치 (32/30)]
[폭탄 도마뱀 처치 (34/30)]
[12층 클리어]
[포탈이 생성됩니다.]
일정 수 이상의 몬스터를 잡아 자격을 증명하면 되는 거니까.
권능을 통해 확인해 본 결과 히든 피스도 없는 층이었다.
사냥에만 열중하면 되는 곳.
덕분에 12층을 클리어하는 건 금방이었다.
과격하게 움직인 통에 몰골은 별로지만…….
몬스터의 피와 살점이 갑옷 곳곳에 껴 있다.
롱소드도 마찬가지.
“후우. 징그러운 놈들.”
-치이이익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살 조각이 뜨거운 땅바닥에 맞닿으며 고기 굽는 소리가 난다.
확실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다. 몬스터나 겨우 살까.
그런 것치고는 나 역시 멀쩡한 편이지만.
사냥하면서 다친 곳은 없고,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이대로 직행해도 좋을 정도.
난 마지막으로 워터 스킬로 머리를 적셨고.
“바로 13층으로 올라가자.”
“궤에에엑.”
포탈 안으로 들어갔다.
일그러지는 시야.
허공을 걷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스친다.
깊게 숨을 내쉬며 감각을 세웠다.
13층은 쉽지 않을 테니까.
-파아아앗!
시야가 트이며 새로운 환경이 나를 반겼다.
[13층에 진입합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열기.
“이번에는 화산 지대로군.”
그것도 용암이 끓어오르는 활화산 지대.
화산재가 곳곳에 내려앉았고, 하늘은 태양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다.
구릿하면서도 쾌쾌한 유황 냄새가 나는 건 덤.
그뿐일까.
“크헤에엑!”
암석 사이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튀어나오기까지.
-콰직
난 꼬리를 내미는 스톤 스콜피온을 발로 찍었다.
끽해야 1성급인 놈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커뮤니티에서 보기는 했지만 진짜네.”
허공에 떠오른 알림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내뱉었다.
13층. 화산 지대. 이곳의 클리어 조건은 사냥도, 포탈 탐색도 아니었다.
[13층]
[생존하십시오. (남은 시간-07:59)]
생존. 딱 그거였지.
8시간 동안 살아만 있으면 포탈이 자동 생성된다.
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맵 자체의 열기도 어마어마했지만, 단순히 더위 때문에 생존이 힘든 건 아니었다.
-쿠르르륵
간헐적으로 솟아오르는 용암과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
발을 살짝만 잘못 디디면 바로 용암 파크에 입장한다.
이것만으로도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건만, 위대하신 탑은 더욱 대단한 시련을 주셨다.
-크오오오오오
멀리서 울려오는 포효.
그 안에 담긴 살기와 흉폭함은 듣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화갑룡.”
[화갑룡火鉀龍]
-5성급 고룡족 몬스터.
-시스템 제약이 걸려 있습니다.
-피하십시오.
13층에는 그놈이 나오니까.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보이는 덩치.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지가 울렸고, 붉게 빛나는 비늘과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돌기는 놈의 난폭함을 표현하는 듯했다.
거대한 머리통에 날카로운 이빨, 유독 발달된 뒷다리가 특징인 몬스터.
“고룡족古龍族이라.”
몬스터 중에서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게 용종 몬스터다.
4성급에는 드레이크가 있다면 5성급에는 고룡족이 있다.
한마디로 상위종이라는 것.
원래라면 절대 10층대에서는 마주칠 수가 없는 몬스터다.
-쿠르르르르
-콰아앙!
놈의 몸에 부딪힌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진다.
피지컬만 해도 재앙인 녀석.
난 몸을 숨겼다.
릴카의 퀘스트를 위해서는 저놈의 비늘이 필요하다.
사실 13층에 올라오기 전만 하더라도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물을 마주하니 그 마음이 쏙 들어갔다.
“저런 놈한테 어떻게 덤비라는 거야, 미친.”
거짓말 안 하고 정면으로 싸우면 1분 안에 죽을 자신이 있다.
애초에 저놈은 잡으라고 만든 놈이 아니다.
13층의 클리어 조건은 살아남는 것.
당연히 사람들은 은신처를 만들어 존버 메타를 이용했다.
적당히 주변만 정리하면 몬스터에 당할 일도 없고, 용암에 빠질 일도 없으니까.
일종의 편법.
그 모습을 탑이 그냥 보고만 있을까?
‘그럴 턱이 있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강요하는 거다.
저놈을 피해서 도망치라고.
용암과 몬스터 틈바구니에서 24시간 동안 이어지는 스펙터클 숨바꼭질.
일종의 집중력 싸움이다. 극한의 상황과 스트레스에서 살아남는.
가뜩이나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말이지.
그게 13층에 화갑룡이 있는 이유다.
-쿠오오오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뛰지도 않고 브레스도 안 뿜는다.
하긴 그랬으면 13층을 통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
따지고 보면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사람이 있으면 밟아 죽이거나 꼬리로 내려치는 게 전부기는 한데.
“덩치가 크니까 걸어만 다녀도 빠르네.”
난 혀를 내둘렀다.
아 씨, 몸을 돌렸다.
망할 용가리. 왜 이쪽으로 오고 난리인지.
“키헤에에엑!”
“카학!”
운 나쁘게 걸린 몬스터 두 마리가 그대로 밝혀 죽었다.
그저 움직이는 경로에 있었다는 이유로 핏물이 되어 버린 놈들.
나라고 다를까?
제약이 걸렸다 한들 5성급 괴물의 공격을 버티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또 모르지.
우리의 스트롱 하고 핸섬한 덕춘 님께서는 다를지.
무려 나보다도 서열이 높은 영물이시다.
“덕춘아, 너 쟤 잡을 수 있겠냐? 비늘 하나만 뜯어 주라. 진짜 필요해서 그래.”
“개굴? 개굴개굴.”
-꼬르르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개구리라며 순박한 울음소리를 내고는 물속으로 잠수해 버리는 덕춘이.
이럴 때만 개구리인 척이지, 그래.
영물이어도 아닌 건 아닌 모양.
얼음물에 족욕이나 하고 있어라.
‘단순히 클리어가 목적이었다면 이준석이 말해 줬던 걸 이용하면 그만인데.’
아쉽게도 난 화갑룡이 목적이었다.
별수 없지.
일단은 덤벼보는 수밖에.
가만히 노려본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꿀꺽.
난 침을 삼켰고.
“가자, 덕춘아.”
“으게에. 궤에에.”
양동이에서 덕춘이를 꺼냈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어쩔 수 있나.
주인이 가면 가는 거지.
-쿠구구구궁
다행히 화갑룡이 방향을 틀었다.
지금이 기회다.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자극하지 않도록 놈에게 다가갔다.
바위에 숨고, 돌 틈에 몸을 기대다가 타 버린 나무 기둥에 모습을 감추며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이제 대략 50미터.’
놈과의 거리가 가까워져 간다.
시스템 제약을 받고 있음에도 박력이 대단하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는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
여태껏 치열하게 싸워 왔다고 생각했지만, 저놈을 기준으로 잡는다면 전부 장난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제 30미터.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느껴진다.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비늘들.
과연 검이 박히기나 할지 의문이다.
5성급부터는 차원이 다른 괴물인데.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어야 한다.
20미터.
이제는 놈의 근육까지 보인다.
비늘로 덮여 있음에도 발달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질 정도.
세로로 찢겨 있는 눈동자는 최상위 포식자의 포악함과 살기가 깃들어 있다.
가만히 있음에도 느껴지는 압박감.
전신을 찌르는 살기.
난 힘겹게 앞으로 조금씩 몸을 옮겼고.
10미터.
하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다.
더 이상의 접근은 위험하다.
아무리 시스템의 제약을 받고 있다지만 화갑룡은 5성급에 달하는 괴물이다.
내 존재를 눈치챌 수 있다는 것.
기회가 생기기 전까지는 침묵해야 한다.
난 조용히 놈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쿠르르르르르.”
와, 세상에. 저게 뭐야.
상상도 못 한 광경을 볼 수 있다.
5성급 몬스터라 이건가. 아니면 브레스를 뿜어 대는 놈이어서 그런가.
몸을 구부린 녀석이 용암에 코를 처박고 마셔 댔다.
도대체 위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다.
놈의 시야가 제한된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으니.
후우.
심호흡 한번 하고.
‘간다!’
롱소드를 움켜쥔 난 앞으로 돌진했다.
기회는 한 번이다. 기습이 실패한 순간 놈에게 죽을 테니.
전력을 다해야 한다.
-콰광!
거세게 발을 박찼다.
굉장히 빠른 속도.
“크르?”
발소리에 화갑룡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난 놈의 뒷다리에 도달했고.
[버프 다이스 (C) Lv.4]
[2]
[속도 향상]
버프를 두르는 동시에.
[끓어오르는 힘의 브로치 (B)]
[중량 팔찌 (C)]
내가 가진 아티팩트를 활성화했다.
[파이어 밤 (B) Lv.5]
-쒜에에에에엑!
발밑으로 폭발을 일으켜 추진력을 증가.
상승된 스텟과 가중된 중량을 이용.
놈의 뒤꿈치를 향해 폭발적으로 날아갔다.
스스로도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속도.
검을 몸에 최대한 붙여 고정했고.
놈과 부딪치기 직전.
[파이어 밤 (B) Lv.5]
[파이어 밤 (B) Lv.5]
[스킬 레벨 업!]
[파이어 밤 (B) Lv.6]
.
.
.
한 번에 터트릴 수 있는 최대치까지 파이어 밤을 발동시켰다.
타이밍 좋게 올라가는 스킬 레벨.
거기에 이어 내뻗은 검.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과 비늘이 맞닿았다.
-뿌드드득!
충격을 이기지 못한 뼈가 불안한 소리를 낸다.
온몸이 저릿할 정도의 통증.
-챙강!
부하를 이기지 못한 검이 부러진 게 느껴졌다.
피어오른 연기로 한 치 앞도 확인하기 힘들다.
실눈을 뜨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1초.
-후우우웅!
불어온 바람에 연기가 씻겨 나간 순간 난 보았다.
“그을린 게 다라고!?”
상처라고 불릴 만한 흔적조차 없었다.
달칸과는 차원이 다른 방어력이다.
-까득!
난 파우치에서 꺼낸 포션을 입에 부으며 몸을 던졌다.
금이 갔던 팔이 회복되며 통증이 가신다.
부러진 검을 버리고 땅에 착지하는 순간.
-콰아아앙!
화갑룡이 발을 내려찍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덕에 공격을 피해 낼 수 있었다.
놈은 크다. 당연히 피격 범위도 넓다.
‘하지만 발을 쓰는 건 좀 다르지.’
상대적으로 덜 발달된 앞발. 놈은 두 다리로 서 있다.
그 말인즉, 짓밟기 위해서는 한쪽 다리는 고정될 수밖에 없다는 뜻.
공격 범위가 한정된다는 거다.
사선으로 빠지면 그만이니까.
문제는.
“젠장!”
직접적인 공격을 피했음에도 깨져 나간 대지의 파편이 날 노리고 들어온다는 것.
말 같지도 않은 중량과 파괴력이다.
튕겨 나간 파편이 바위를 꿰뚫고 땅에 박혔다.
저 정도면 스쳐도 죽겠는데.
역시 정면 대결은 불가능하다.
-파아아앙!
[안개 질주 (B) Lv.2]
절대 피할 수 없는 각도로 날아온 돌을 안개 질주로 피하고 다시 놈의 다리에 접근했다.
검이 파괴된 이상 공격 수단은 하나뿐.
[파이어 밤 (B) Lv.6]
발목을 노리고 터트린 스킬.
한번이 아니다. 내 마력이 버텨 주는 한 계속해서 쓸 생각.
난 연달아 스킬을 발휘했고, 폭발에 폭발을 거듭하면서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 왔다.
동시에 미약하게 느껴지는 단백질 탄내.
조금이지만 놈에게 피해를 줬다.
붉게 달아오른 비늘이 그 증거겠지.
덕분에 마력의 3분의 2는 거덜 난 거 같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보였다.
‘내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건 아니야.’
난 미소를 지었다.
물론 대단한 상처는 아니다.
놈의 입장에서는 살짝 데인 거에 불과할 테니까.
움직임에 변화가 없는 걸 보니 확실하다.
[공략 불가능한 대상에게 도전!]
[무모한 용기의 도전자에게 응원을!]
[1,0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이런 거로도 포인트를 주네.”
하기야 이것도 목숨을 걸고 하는 짓인 건 틀림없으니까.
이것 참 좋네. 노잣돈 받는 거 같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전까지는 날뛰어 봐야겠는걸.”
난 온몸의 마력을 쥐어 짜냈고.
-콰아아아앙!
화갑룡의 비늘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