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잘하면 만나겠는데?
커뮤니티를 통해 10층대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아놨다.
10층대는 극한의 열기에서 살아남는 것이 목표.
각성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쓰러지게 만드는 열기가 테마인 곳이었고,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자는 화상과 탈수, 갈증에 시달리게 된다.
“진짜 덥네.”
난 늪지대에 몸을 감춘 채 빈틈을 노리는 리자드맨을 갈랐다.
롱소드가 휘둘러질 때마다 목이 베여 나가떨어지는 녀석들.
달칸의 털목도리는 벗었다, 아무래도 그걸 끼고 있으면 사냥 자체가 힘들어서.
두려움 효과 때문에 몬스터들이 도무지 내 쪽으로 오질 않는다.
그렇다고 늪지대에서 첨벙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것도 힘 빠지고.
퀘스트 재료 획득과 최소 공략 조건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사냥은 반드시 해야 한다.
“키하아아악!”
“에비.”
-촤아아악
질리지 않고 덤벼드는 리자드맨의 복부를 그었다.
단단한 비늘이 뜯기듯 떨어지며 쓰러졌다.
파충류라 그런가. 학습 능력이 없는 모양.
주변에 동족의 시체가 널려 있어도 흉폭함이 줄어들질 않는다.
나야 알아서 찾아오니 편하지만.
[리자드맨 처치 (26/30)]
[바이퍼 처치 (34/30)]
사냥을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클리어 조건을 거의 다 채웠다.
10층대에 들어서면서 클리어 조건이 조금 높아지기는 했지만 이미 스타터 킷으로 성장한 내게는 어렵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쉬지 않고 빈틈을 노리는 놈들 때문에 방심할 수는 없었지만.
“쉬이이익!”
나무 위에서 알짱거리던 바이퍼 한 마리가 몸을 날렸다.
한번 물리면 해독제 없이는 살 수 없는 맹독을 가진 녀석.
독 내성도 없는 내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지만.
“소리가 다 들린단 말이야.”
예민해진 오감은 놈이 내는 소리를 전부 잡아냈다.
애초에 기습을 할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달려든다.
은밀하게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흥분해서 날뛰는 놈들이라니.
-서걱
가볍게 검을 내지르자 놈의 머리가 정확히 반 토막 난다.
잔뜩 벌렸던 아가리가 떨어지고 꿈틀거리는 놈의 몸을 밟았다.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는 녀석.
그 옆으로 아이템이 드랍 됐다.
[바이퍼의 가죽]
오. 이번 녀석은 가죽을 줬다.
릴카의 퀘스트 재료 중 하나가 이거다.
다행히 드랍률은 나쁘지 않다. 2, 3마리를 잡으면 나오는 정도?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잡는 족족 나오면 더 좋을 텐데.
“확 씨, 그냥. 내 손으로 벗겨?”
저거 막. 칼집 내고 잡아당기면 쑥 빠지는 거 아닌가? 하고 잠시 푸념도 해 봤지만 어쩔 수 없다.
“직접 해 봤자 쓸모가 없지.”
내게는 도축 스킬이 없다. 관련된 권능도 없고.
어떻게 가죽을 벗기더라도 재료 아이템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는 뜻.
그냥 평범한 뱀 가죽 중 하나가 될 뿐이다.
뭐, 그건 그거 나름대로 써먹을 수는 있다.
밖에서도 몬스터 가죽으로 만든 가방이나 지갑이 잘 팔리니까.
당연하게도 아이템이 아닌 만큼 특별한 옵션은 없다.
굳이 따지면 조금 더 튼튼한 물건?
“시스템이라는 게 참 신기해.”
난 어깨를 으쓱였다.
몬스터 부산물이 아이템으로 분류되기 위해서는 시스템의 개입이 필요하다.
도축, 손질, 가공 스킬이나 권능.
혹은 관련된 기능이 깃든 무구나 아티팩트가 있어야 한다.
그 외에는 드랍템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고.
“괜히 게이트 공략을 갈 때 부산물 처리반이 대기하는 게 아니지.”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사냥한 몬스터를 처리하는 건 따로 전문 업체가 있었다.
탑에서야 그런 업체가 없으니까 드랍템만 파는 거고.
상점창에서 취급하는 건 아이템뿐. 내가 벗긴 물건은 팔 수도 없다.
“그래도 도축 스킬이 엄청나게 귀한 건 아니니까.”
나중에 상점창 등급이 오르면 포인트로 구매할 수 있을 거다.
숙련도를 높이는 건 내 노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어쨌든 퀘스트에서 요구하는 재료를 얻는 건 드랍템으로 채우는 수밖에 없다는 말.
난 지금까지 모은 것들을 살폈다.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바이퍼 가죽 (13/50)
-화갑룡의 비늘 (0/1)
아직 재료를 모으려면 한참 남았다.
대충 100마리는 잡아야 채울 것 같은데.
이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고.
“후우. 덥다. 그치?”
“그에에에에.”
이놈의 열기가 문제다.
사냥 때문에 달칸의 털목도리를 벗고 있으니 열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수시로 워터 스킬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시원한 것도 잠시.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몸을 타고 흘러내려 불쾌함만 늘어났다.
역시 다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분명 환경 적응을 위해 준비해 둔 게 있다고 했는데.”
시스템이 말하지 않았던가. 등반자를 위해 안배를 놔두었다고.
난 현재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그걸 찾고 있었다.
불친절할지언정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그동안 사냥한 지역을 살폈다. 11층으로 넘어온 근처 필드는 전부 뒤졌다.
이제 남은 공간은 하나.
“저쪽뿐이야.”
늪지대 가운데 홀로 떨어진 섬.
질척이는 늪에는 리자드맨이, 섬으로 보이는 곳에는 바이퍼가 가득하다.
진입 자체가 골치 아픈 곳.
만약 다른 사람들이 저곳으로 가려면 고생 꽤 할 게 분명했다.
몬스터 숫자도 많고, 장비를 입은 것만으로도 늪에 발이 푹푹 빠지니까.
게다가 바이퍼가 쏘아 댄 독에 중독될 가능성도 있고.
물론 난 관계없었다.
늪이야 힘으로 빠져나올 수 있고, 놈들의 공격은 무리 없이 쳐 낼 실력도 있다.
“그에에에에.”
혹여나 바이퍼의 독이 몸에 침투해도 덕춘이가 해결해 줬다.
새롭게 얻은 특성, 독.
그걸 이용해 몸속의 독을 빨아먹었으니까.
역시 만능 개구리.
난 덕춘이의 머리를 긁어 줬다.
“다른 특성이 안 생긴 건 좀 아쉽다.”
“으게에에에.”
어젯밤 숙소로 돌아온 후, 남은 실패작 포션을 전부 먹였지만 새로운 특성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하루 만에 독과 화염, 두 특성을 얻었으니 충분한 수확이다.
[워터 (F) Lv.3]
어느새 레벨이 올라 버린 워터를 덕춘이에게 뿌려 주고 늪지대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푹푹 빠진다. 무장하고 있어 무게가 나가서 더 그런 것 같은데.
늪이 끈질기게 발을 붙잡았지만 힘차게 발을 내뻗었고.
“키헤에에엑!”
입을 벌리고 달려든 리자드맨은.
“궤에엑!”
-푸화아아악!
덕춘이가 내뿜은 불길에 노릇하게 익어 버렸다.
자고로 주인과 펫은 닮는다고 했던가.
새로 생긴 특성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불길 한번 뜨뜻하네. 나중에는 난로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잡생각을 하며 늪지대를 건너길 잠깐.
“아오! 다 왔다.”
난 반쯤 기다시피 늪을 지나 섬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바이퍼가 우리를 반겼다.
이게 섬인지 뱀 소굴인지 감이 안 잡힐 정도.
이빨을 내미는 놈들을 쳐 내고, 자르고, 밟아 으깨며 전진했다.
반복적인 행위의 연속.
올라오는 열기에 입안이 바싹 마를 때쯤.
-반짝
“오오오!”
“그에에?”
빛이 반짝였다.
섬의 중앙부.
다른 곳과 다르게 지면은 단단했고, 엄청난 두께의 나무 밑동 위에는 스킬북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화기 내성 (E)]
-모든 종류의 화기에 대한 내성을 지니게 됩니다.
-상시 적용.
“딱 필요한 물건이네.”
시스템이 말한 안배가 이거였던 모양.
난 망설임 없이 스킬북을 펼쳐 스킬을 익혔고.
[화기 내성 (E) Lv.1]
-후우우우우
더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열기에 땀이 흘러내렸지만, 아까에 비하면 훨씬 낫다.
열이 내려서 그런가 머리도 좀 개운해진 것 같고.
오랫동안 이곳에 머무른다면 탈수는 기본, 일사병까지 걸리지 않을까.
-사아아아악
-쉬이이익
약간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바이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역시나 뱀 소굴.
“알아서 찾아오니 편하네.”
컨디션을 되찾은 난 몸을 풀었다.
남은 바이퍼 가죽은 37개. 여기서 모두 모을 수 있을 것 같다.
* * *
5시간에 걸친 사투가 끝났다.
아니, 사투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하다.
일방적인 학살이나 다를 바 없었으니까.
바이퍼는 기껏해야 2성급 몬스터.
지금의 나에게는 별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바이퍼 처치 (114/30)]
[리자드맨 처치 (43/30)]
최소 공략 조건이 충족되며 포탈은 열린 지 오래.
난 퀘스트창을 살폈다.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바이퍼 가죽 (64/50)
-화갑룡의 비늘 (0/1)
약간은 여유 있게 챙겼다.
혹시 아는가. 품질이 별로라고 안 받을지.
같은 고생을 두 번 하는 건 사양이다.
그건 그거고.
“이게 뜨네.”
“그에에.”
난 손에 들린 스킬북을 살폈다.
드문 확률로 떨어지는 아이템.
바이퍼에게서 나온 거기 때문일까.
[독 내성 (E)]
-모든 독 종류에 내성이 생깁니다.
-상시 적용.
새로운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뭐든 패시브 형식의 스킬은 있으면 득이 된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탑. 대비할 수단이 있으면 챙겨야지.
난 독 내성을 획득했고.
“잠깐 쉬자.”
섬 중앙에 있는 그루터기에 걸터앉았다.
몸을 움직이니까 열이 올라와서 주기적으로 쉬어 줘야 한다.
지치기 딱 좋은 환경이었지만 장점도 있었다.
[화기 내성 (E) Lv.1]
[스킬 레벨 상승!]
[화기 내성 (E) Lv.2]
이번에 얻은 건 패시브 스킬이라 더운 곳에만 있어도 스킬이 올라간다는 것.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레벨이 올랐다.
그만큼 이곳의 더위가 심하다는 거겠지.
난 손부채질을 하며 커뮤니티를 켰다.
“애들은 아직 9층 공략 중이겠지?”
내가 10층에 올라오는 시점에 9층을 공략하기 시작했으니 며칠은 더 거기에 머물 거다.
9층 퀘스트는 일주일을 필요로 하니까.
나처럼 중간에 일정을 앞당기는 방법도 있지만.
“괜히 급하게 굴지 말고 천천히 하라 했지.”
겪어 본바 달칸은 봉인이 풀리지 않아야 상대할 수 있는 괴물이다.
혹여나 실수를 하더라도 하나, 절대 두 개 이상 풀리면 안 된다.
S급 권능 두 개, 상위 등급 스킬까지 도배하고 A급 공격 스크롤까지 보유한 나도 봉인 두 개가 풀린 달칸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사실 지금도 어떻게 잡았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쁘띠공듀]: 요이, 요이! 오늘도 옵텍터랑 신나는 술래잡기를 하고 있나요?
[정수리 핥짝]: 이, 씨이이이발 옵텍터 새끼들.
바로 반응이 오는 핥짝이. 그동안 당한 게 많은 모양이다.
[정수리 핥짝]: 오늘로 4일 찬데 스텟 뺏긴 것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아오!
[쁘띠공듀]: 후후후… 자고로 아프며 크는 법입니다. 어차피 보스몹을 잡으면 돌려받잖아요.
[정수리 핥짝]: 그치. 진짜 뒈졌다.
[니머리 탈모]: 네 봉인은 안 풀렸냐?
핥짝이와 대화하는 사이 탈모맨이 끼어들었다.
이놈은 괜찮나? 저번에 보니까 건틀릿 끼고 싸우는 것 같던데.
[정수리 핥짝]: ㅇㅇ 봉인은 아직 안 풀림. 한번 조질 뻔하긴 했는데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니머리 탈모]: ㄲㅂ 엉엉 우는 꼴 보고 싶었는데.
[정수리 핥짝]: 울게 해 줘?
[니머리 탈모]: 사나이 니머리 탈모, 함부로 울지 않는다.
[정수리 핥짝]: 다들 처음엔 그렇게 말하더라고. 쫌만 ㄱㄷ 10층에서 보자. 너 아직 9층이지?
[니머리 탈모]: 그렇긴 한데… 냐, 냥펀! 넌 어디냐? 우리 많이 따라잡았냐?
대놓고 화제를 돌리는 탈모맨.
그러게 왜 자꾸 이기지도 못할 거 까부는지.
그거랑은 별개로 나도 궁금했다. 냥펀은 비교적 느리게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냥냥펀치]: 나도 9층임. 3일 차.
[정수리 핥짝]: 오? 빨리 왔네?
[냥냥펀치]: 온 지 얼마 안 됨. 어제 왔나. 그냥 낮 스킵 하면서 달리는 중.
“으음? 낮을 스킵 한다라.”
신성력 무기라도 있는 건가.
평소 냥펀의 행동을 생각해 보면 확신이 드니까 속도를 올리는 걸 거다.
“이번에는 냥펀이 1등 찍나?”
비등비등하게 올라오는 녀석들.
난 문득 궁금해졌고.
[정수리 핥짝]: 다들 비슷한 것 같은데, 누가 먼저 올라가는지 내기 ㄱ?
[니머리 탈모]: 퀘스트 깨는 거 조건으로?
[정수리 핥짝]: 당연하지. 할 거지? 하는 거다!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
[냥냥펀치]: 후후… 무지몽매한 자들. 소원권 잘 받아 가겠다냥!
녀석들도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내기를 걸기 시작했다.
[니머리 탈모]: 공듀, 공듀. 너도 할 거지?
[정수리 핥짝]: 얘 이미 위에 있는 거 아니었냐?
[냥냥펀치]: ㅇㅇ 그럴걸?
[니머리 탈모]: 뭐 어때. 우리 셋 중에서 누가 1등 하는지 고르면 되지.
[정수리 핥짝]: 그렇네. ㅇㅋ콜 ! 컴온.
어느새 나까지 참여하게 됐다.
하여간 파이팅이 넘친다니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온다.
[쁘띠공듀]: 요정의 안목을 보여 드리죠☆
그래. 이런 게 또 재미지.
저마다 자신이 1등이라며 외치는 녀석들을 보며 난 턱을 괴었고.
“잘하면 10층에서 보겠는데?”
어쩌면 멤버들을 실제로 만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