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포션
행운 스텟이 반응했다.
포션? 아니다. 그것들은 봤다시피 쓰레기다.
빛의 근원은 남자가 앉아 있는 나무 상자.
내가 멈칫한 것도 모르는지 포션 장수는 말을 이어나갔다.
“나중에 할 일은 다 정해 뒀습니다. 물약으로 돈을 싹 끌어모은 다음에 일단 집부터 사고. 요트도 하나 아, 그건 좀 힘들려나. 해양 몬스터 때문에. 그거야 뭐 호수 같은 데서 하면…….”
“저기요.”
난 끊임 없이 떠들어 대는 그를 불렀다.
“아이고, 내가 말이 많았네. 상품은 잘 고르셨는지?”
“혹시 그 상자에도 포션이 있습니까?”
“여기에요? 있기는 합니다만.”
머리를 긁적인 포션 장수가 일어서더니 주섬주섬 나무 상자를 열었다.
자투리 천을 깔아 완충제로 쓰고, 나름대로 칸을 나눠 포션이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놨다.
색이 다양하다. 정제되지 않았는지 탁한 것들도 있고.
20개의 포션. 다른 것들과 달리 마킹이 되어 있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떴다.
‘구체적으로 빛이 나오지는 않네.’
무엇을 사라고 딱 정해 주면 좋으련만, 빛은 애매하게 흔들릴 뿐이었다.
설마 포션이 아니라 상자가 핵심인 건 아니겠지?
그가 파는 포션의 옵션을 봤기에 생겨난 의심이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빛무리는 상자 안에서 감돌고 있었으니까.
“요것들도 포션이기는 한데, 팔려고 가져온 건 아닙니다.”
“따로 주인이 있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실패작이라서요. 딱히 돈 받고 팔만 한 게 아닙니다. 이따 집 가는 길에 버리려고 가져온 건데…….”
좌판에 깔아 놓은 것들도 팔면 안 될 것 같았지만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야 저것들을 사면 그만이니까.
“저것들로 구매하겠습니다.”
“이걸요? 굳이 사시겠다면 팔긴 하겠지만 환불은 안 되고, 나중에 문제 생겨도 보상은 못 해 줍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
난 실패작 물약들을 살폈고.
[실패한 화염 내성 물약 (F)]
-불의 기운이 살아 있다.
-추운 날 길가에 뿌려 보는 건 어떨까?
[실패한 근력 강화 물약 (F)]
-마시면 힘이 넘치지 않습니다.
[실패한 해독 물약 (F)]
-독이 남아 있습니다.
-해독이 아니라 중독이 됩니다.
말 그대로 실패작. 양심상으로라도 절대 권해서는 안 될 것들만 있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저 꼴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난 행운이 반응하는 이유를 알아냈으니까.
가볍게 흉갑을 쓸어내렸다.
“그에?”
품속에 있던 덕춘이가 의아한 소리를 냈다.
빛은 포션에만 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덕춘이에게도 나고 있었지.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
덕춘이에게 포션을 먹이라는 것.
‘6층에 올라왔을 때 백환을 먹고 회복 특성을 얻었었지.’
그렇다면 저걸 먹으면 어떨까?
일단 먹어도 되는지가 의문이기는 하지만, 행운 스텟이 발현한 걸 봐서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억지로 먹일 수는 없는 노릇.
덕춘 님은 나보다 강력하시니까.
가져가 보고 덕춘이가 오케이 하면 그때 줘 볼 생각이다.
“실패작이니까 대충 병값만 받도록 하죠. 20개 다 사는 겁니까?”
“예. 전부 사죠.”
“그럼 싸게 200포인트만 받죠.”
병값이 언제부터 그렇게 비싸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순순히 포인트를 지급했다.
나한테 200포인트는 그리 큰돈이 아니었으니까.
흥정을 하며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기도 싫었고.
그래도 약간 괘씸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
한번 노려봐 주고 포션을 챙겼다.
“가방이나 바구니는 챙겨 오셨어요? 상자는 제가 써야 해서.”
“상관없습니다.”
보물 주머니를 열어 포션을 챙겼다.
확실히 이게 있어서 편하다.
아공간 아이템을 본 남자의 눈이 욕심으로 번들거렸다.
‘이 녀석 봐라?’
본인 딴에는 바로 표정을 숨긴 것 같았지만 내 눈을 피할 수는 없었고.
난 그 눈빛을 기억해 뒀다.
“가 보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예. 들어가세요.”
모르는 척 자리에서 일어서자 확연하게 말수가 줄어든 남자가 좌판을 정리하는 척을 한다.
해는 떨어진 지 오래.
다른 층이었다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깔렸겠지만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여전히 문을 열고 있는 주점과 여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있었으니까.
천천히 걸었다.
드문드문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을 스치고 떠들썩한 식당을 지났다.
각성하며 예민해진 오감으로 수많은 정보가 들어온다.
웃음소리, 음식 냄새. 창문을 통해 흔들리는 그림자.
그리고 발소리.
“덕춘아, 뒤에 그놈 따라오고 있지?”
내 물음에 갑옷 속에 있던 덕춘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뒤를 살폈고.
“궥궥.”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눈깔에 욕심이 가득하더라니, 날 미행하고 있었나.
어쩐지 집에 간다는 놈이 좌판을 정리하는 시늉만 하나 했다.
너무 티 나지 않은가. 나한테 집중하고 있다는 걸 숨기려거든 더 자연스럽게 행동했어야지.
밝은 곳을 지나 한적한 거리로, 이어서 골목으로 향했다.
[야간 시야 (E) Lv.4]
어두컴컴했지만 9층에서 단련한 스킬 덕에 보는 건 문제가 없었고.
-타앗
아무런 예비 동작 없이 발을 박차 담벼락 위로 몸을 날렸다.
자세를 낮추고 숨을 골랐다.
인기척을 지웠다. 손은 언제든 검을 뽑을 수 있게 손잡이에 가져다 댄 상태.
놈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왜 그놈이 나를 노리는 건지.
보물 주머니가 탐이 나서? 아공간 아이템인 만큼 값진 물건이기는 하다.
‘그렇다 쳐도 무모한 거 아닌가?’
필드도 아니고 안전지대에서 강도짓을 하려 하다니.
처리관에게 처벌받아도 할 말이 없을 텐데.
당장 오늘에도 소매치기범이 손목을 잘렸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다.
‘분명 놈은 자기 입으로 전투에는 재능이 없다고 했어.’
사냥하기 무서워서 물약 제조 쪽으로 가려고 한다고.
그런 놈이 강도짓을 하려고 한다?
앞뒤가 안 맞는다. 애초에 놈에겐 마땅한 무기와 방어구가 없었다.
편한 로브 하나. 무기라고 할 만한 건 딱히 보이지 않았는데…….
뭐든 확인해 보면 알 일이었다.
-부스럭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습을 드러내는 물약 장수.
골목 입구에서 얼굴을 내민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엉성하다. 심지어 겁에 질렸는지 목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어딜 봐도 강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대체 왜 미행한 거지?
“으으, 어디로 간 거야.”
용기를 냈는지 그가 벽을 더듬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앞을 보는 스킬이 없는지 한 발, 한 발 내밀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렇게 10미터 정도 움직였나.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했는지 그가 멈춰 섰다.
“더럽게 빠르네. 아 씨, 어떡하지. 그냥 보고만 해도 영입해 주려나?”
‘영입?’
난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영입이 왜 나와?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게 있다.
놈이 허공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휘적였다.
커뮤니티를 확인하고 있는 것 같은데.
“분명 놈이 쓰던 게 보물 주머니 같았단 말이야. 숙소만 파악해서 알려 주면 대형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생기는데.”
말이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 혼자 있을 때도 떠들어 대는구나.
덕분에 정보를 얻긴 했다만…….
대형 길드에서 따로 내려진 공지가 있던 모양.
‘보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으면 신고를 하라고 한 건가.’
뭐 하러? 길드 차원으로 아공간 아이템을 모으기라도 하는 건가.
확실히 있으면 좋은 아이템이기는 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형 길드에 영입까지 시켜 줄 이유는 없는데.
보물 주머니, 대형 길드. 난 둘 사이의 관계를 따졌고.
‘영악한 새끼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7층 공략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이미 위로 올라간 이들은 보물 고블린을 사냥하지 못한다.
즉, 현시점에서 보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는 건.
‘나일 확률이 높다는 거야.’
내가 가장 빠르게 공략하며 올라오고 있으니까.
선두권을 차지하는 탈모맨과 핥짝이, 냥펀도 아직 10층에 오르지 못했다.
후발주자 중에 보물 주머니만 얻고 10층으로 직행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거의 없겠지.’
스타터 킷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등반 속도는 늦어질 수밖에 없을 거다.
내가 경솔했다. 다음부터 사람들이 있을 때 보물 주머니를 쓰는 건 자제해야지.
적어도 보물 주머니를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일단 보고해야겠다. 괜히 꿈지럭거리다가 다른 사람이 선수 치면 곤란하니까. 그래! 내가 만든 포션도 선물로 드려야겠어. 내 유능함을 보시면 분명 영입해 주실 거야. 흐흐흐.”
포션 장수가 중얼거리더니 골목을 빠져나갔다.
길드 건물로 향하는 거겠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놈은 내 얼굴을 봤으니까.
역시 죽이는 편이 좋을까?
탑 밖으로 내보내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안 돼. 위험 부담이 커.’
저놈을 해치우면 살인자 칭호가 생긴다.
처리관과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것.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방식으로 처리해야겠어.”
간접적인 방법으로 정리할 생각이다.
난 그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 * *
다성 길드원들이 묵고 있는 여관, 나무 울타리.
늦은 저녁이지만 불이 켜져 있었다.
처리관 이진무를 찾아온 이가 있었기 때문.
1인실로 보이는 공간. 침대를 치워 회의실로 쓰는 방에 두 남자 앉아 있었다.
이진무와 포션 장수.
“그래서 보물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확실하겠지?”
“예. 확실합니다. 저한테 포션 20병을 사서 주머니에 넣는 걸 확인했습니다.”
포션 장수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처리관. 10층 안전지대에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포션 장수는 최대한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 혹시 약속은 어떻게 되는지. 항상 다성 길드를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목숨을 바쳐 충성할 자신이 있고, 또 제가 포션에 재능이 있어 공방에서도 일할 수 있습니다.”
“그거에 대해선 지금은 말해 줄 수 없군.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야.”
피식, 한쪽 입꼬리를 올린 이진무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자가 우리가 찾는 사람이라는 게 분명해지면 약속은 꼭 지키지.”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자가 묵고 있는 숙소는 찾았나?”
“그, 그게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 보지 못했습니다만 그자가 사라진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른다는 말.
포션 장수는 주눅이 들어 이진무의 눈치를 살폈지만 의외로 이진무의 표정은 밝았다.
위험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 올라간 입꼬리.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포션 장수가 침을 삼켰다.
“좋군.”
“예?”
“미행할 걸 염두에 두며 움직였다는 거 아닌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건.”
“어어, 그렇게 볼 수 있죠?”
“마침 우리가 찾는 자가 그런 녀석이거든. 철두철미하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하지.”
툭. 이진무가 포션 장수의 등을 두들겼다.
“이만 가 봐. 나중에 연락하지.”
“가,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쇼!”
긍정적인 답변에 포션 장수가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후다닥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에게 있어 이진무는 두려운 대상이었으니까.
“처리관님, 괜찮을까요? 썩 도움이 되지 않는 거 같은데.”
포션쟁이가 사라진 곳. 문을 닫으며 길드원 하나가 물었고.
“아니. 이 정도면 충분해. 놈이 10층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니까. 저놈 말을 들어 보니 한동안 이곳에 머물 거 같더군. 먹을 걸 잔뜩 샀다고 하니까.”
“미행을 눈치챘으니 곧장 위로 향했을지도 모릅니다.”
걱정스럽게 길드원이 첨언했지만 이진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올라가려고 했다면 진작에 올라갔겠지. 그놈은 대형 길드를 두려워하지 않아. 모습을 숨기고 본인이 원하는 걸 차지하려 들었을 거야.”
이진무는 이미 산군 길드의 협조를 통해 쁘띠공듀로 추정되는 인물이 오지혁 처리관과 직접 마찰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리관, 더 나아가 대형 길드와 무력으로 부딪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뜻.
정말이지 골 때리는 놈이었다.
“물론 저 녀석이 한 말이 거짓일 수도 있지. 대형 길드에 영입시켜 준다, 탐낼 만한 놈은 많으니까. 그거야 그때 가서 대가를 치르게 해 주면 될 일이야.”
이진무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포션 장수가 놔두고 간 상자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선물이라고 준 물건. 본인 말로는 잠재력이 뛰어난 포션 제작자라고 했다.
탑에서는 상점이 있지만 밖은 아니다. 자체적으로 포션을 생산해야 한다는 말.
그의 말대로 유능하다면 이번 일과는 별개로 영입을 추진할 수도 있었다.
‘크게 기대는 안 한다만.’
잠깐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능력은 없고 허풍이 강한 타입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이진무는 포션 하나를 들어 옵션을 살폈고. 이내 혀를 찼다.
“쓰레기네. 네가 쓸래?”
“괜찮습니다.”
“역시 좀 그렇지? 갖다 버려. 자리만 차지한다.”
“알겠습니다.”
그의 지시대로 길드원이 상자를 치우려던 그때.
“잠깐 스톱.”
이진무가 포션 하나를 들어 올렸다.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에 의문을 느낀 길드원이 옵션 정보를 읽었다.
점점 붉게 달아오르는 얼굴.
“그 개자식이! 당장 잡아 오겠습니다!”
길드원이 검을 움켜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진무의 손에 들린 포션.
[독이 섞인 신경 이완제 (E)]
-신경독이 섞여 있습니다.
그건 독극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