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50화 (50/740)

50화 더 볼 것도… 있네?

소매치기범과 처리관. 둘의 싸움은 고래와 새우의 싸움이었다.

압도적인 격차.

처리관 이진무의 도끼는 둔중한 동시에 날카로웠다.

다루는 폼에서부터 오랜 기간 도끼를 사용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탑에 올라오기도 전부터 사용할 무기를 정해 두고 연습해 왔다는 거겠지.

반면 소매치기범은 나름대로 위협적이었지만 어설픔을 숨길 수 없었다.

필시 아무런 대비 없이 살다가 탑으로 불려온 거리라.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는 건 튜토리얼과 성장 구간에서 살아남았다는 건데.

‘이 정도로 차이가 나나.’

정말 같은 층에 있는 사람인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소매치기가 유독 못난 건 아니다.

일반인이었던 걸 감안하면 독기도 있고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도 하니까.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은 예리한 공격이 이어지기도 한다.

근력도 어느 정도 받쳐 주는지 지치기는 해도 검을 놓치지는 않았고.

빈틈을 찾기 위해 빙빙 도는 것 역시 좋게 봐줄 만했다.

‘어디까지나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가뜩이나 속도, 체력, 실력 모든 면에서 뒤떨어지는데 상대보다 많이 움직인다?

그냥 제 살 깎아먹기나 다를 바 없다.

얕보였을 때 모든 걸 걸고 도박수를 던져야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높아질 텐데 탐색전을 거치고 싸운다니.

절대 못 이긴다.

애초에 상대방이 강자라는 걸 인식했으면 그에 걸맞은 전략을 써야 하는 법이었다.

“언제까지 빙글빙글 돌기만 할 거야! 그래 가지고 소매치기하겠어?”

“검도 못 쓰는 게 뭐 하러 롱소드를 들었대? 창이나 들어, 인마!”

“손목 어디 잘릴지 내기 갑니다잉. 왼손 아니면 오른손. 배팅하실 분, 모여라!”

“여기! 난 왼손에 걸지. 100포인트!”

“아, 뭘 모르네. 오른손 아니냐? 200포인트 건다!”

관중들 역시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구경거리를 즐길 뿐. 어느새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도박이 한창이었다.

처리관이 이기는 건 기정사실이라는 거겠지.

“크하악!”

“좀 더 발악해 봐라.”

이진무의 도끼날이 소매치기범의 어깨를 훑었다.

얕지만 길게 난 자상. 피가 후두두 떨어진다.

가장 자극적인 오락은 피가 쏟아지는 결투.

“오오오오!”

“아, 씨. 감질나네. 거 화끈하게 하쇼!”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열광할 때마다 소매치기범의 몸에 상처가 늘어난다.

본인의 관종끼와 권능을 위해 쇼를 벌이는 모습.

반쯤은 장난스러운, 악의가 가득한 허초와 기습.

그러면서도 일부로 빈틈을 내줘 상대방이 포기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악랄함까지.

다성 길드의 처리관, 이진무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데이터가 쌓였다.

‘더 볼 필요는 없겠군.’

제대로 된 실력을 구경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었다.

생사결을 펼칠 상대였다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도 않았을 테니.

이미 저 대결은 오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난 몸을 돌렸다.

“지나갈게요. 좀만 비켜 주세요.”

“야야, 자리 생겼다.”

“개꿀이네.”

어느새 더 몰려든 사람들을 피해 시장으로 나아갔다.

모이는 사람만 많지 나가는 사람은 없어서 빠져나오는 건 금방이었다.

마냥 걷기만 한 건 아니었다.

조금 전 본 처리관의 움직임을 떠올리고 있었지.

지금 본 게 이진무의 전력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약간이나마 가늠할 수는 있다.

‘쇼맨십 때문에 가려지기는 했지만 기본이 탄탄해. 페이크를 즐겨 쓰고, 소매치기범을 상대할 때는 화려한 동작을 많이 했지만 실제로 싸우면 카운터를 주로 노릴 거야.’

머릿속으로는 시뮬레이션을 굴렸다.

체급 차이는 없었다. 사용하는 무기는 전혀 달랐지만 나나 그놈이나 비슷한 수준.

무거운 도끼를 지탱하기 위함일까. 도낏자루가 제법 긴 편에 속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리치 차이는 크지 않겠지만 변칙적으로 놈의 공격이 깊숙하게 들어올 수 있다.

‘힘이 되는 만큼 비정상적인 궤도에서 공격이 날아들 수도 있지.’

헌터와의 싸움은 일반인이었을 때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된다.

이미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동작이 가능할 만큼 신체 능력이 강화됐으니까.

그나마 10층이라서 그 정도가 약할 뿐.

스킬을 배제한 채 이진무와의 전투를 진행시켜 봤고.

“생각보다 쉽겠네.”

“궥궥.”

충분히 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은 구경꾼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 과장된 움직임을 많이 했다.

비효율적이지만 화려한 동작.

목숨을 노리는 적 앞에서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실전에서야 그 정도가 다르지만 글쎄, 습관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권능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라도 그 부분을 줄일 수는 없겠지.’

관중의 반응이 좋을수록 올라가는 능력치가 많아지니까.

반대로 놈이 밀려도 비슷한 상황이 나올 거다.

관중에게 처리관이라는 인물을 중요한 게 아니다.

자극을 주고 흥분만 할 수 있으면 그만이니까.

누가 당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즉, 놈이 당하고 내가 압도하는 그림이 나와도 놈은 버프를 받는다.

어느 쪽이든 놈이 이득인 상황.

그렇다 한들 빈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람이 없으면 돼.”

파훼법은 간단했다. 놈의 권능이 쓸모없는 자리를 만들면 그만.

기습, 변두리, 시선 분산. 방법은 많았다.

만약 이런 것들도 여의치 않는다면.

“그 방법을 쓰면 되겠지.”

“게에. 궥궥.”

내 생각을 읽은 덕춘이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처리관은 잠시 넣어 두자. 어차피 10층에서 얻을 걸 다 얻기 전까지는 부딪칠 생각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본래의 목적에 집중하자.

때마침 소란이 일어 시장은 한산하여, 한결 편하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구경했다.

특별해 보이는 건 없는지. 권능이나 행운 스텟이 발동하지는 않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선은 상가를 중심으로 돌아다닐 생각.

NPC들이 파는 물건이 어떤 건지도 궁금했다.

-딸랑

“어서 옵쇼!”

카운터에 앉아 있던 NPC가 반갑게 맞이했다.

가슴에서 타오르는 파란색 불꽃.

볼 때마다 신비로운 현상이다.

빤히 보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 주인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무기를 좀 보려고 하는데요.”

“무기라 함은 어떤 거? 검? 도끼도 창도 있고. 말만 하십쇼.”

“찾고 있는 게 있는데 일단 쭉 둘러보겠습니다.”

“예예. 편하게 보세요.”

대놓고 숨겨진 옵션이 있는 무기는 없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무기와 방어구, 잡다한 물건들을 살폈고.

‘애매하네.’

결국 찾아내기는 했다.

[튼튼한 단검 (F)]

-특별하지는 않지만 단단한 단검.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보이는 정보.

하지만 권능을 통해 드러난 정보는.

[튼튼한 단검 (F)]

-주인의 피를 머금으면 혈괴의 저주가 생길 수 있습니다.

-흡수한 피 (0/100)

-가장 먼저 먹은 피를 주인으로 인식합니다.

-단, 저주는 주인에게만 적용됩니다.

조건을 채울 시 저주가 깃든 단검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혈괴血壞의 저주.

뼈와 살도 아니고 피 자체가 썩어 버리는 강력한 저주다.

등급으로 따지면 A는 그냥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다만 문제는 주인한테만 적용된다는 것.

‘걍 저주받은 물건이잖아.’

이걸 어디에 써.

마음에 안 드는 애한테 줄 선물용으로 써야 하는 건가?

선물 받은 사람이 손이 베일 가능성과 그게 저주의 발현까지 갈 가능성을 따져 봤지만 역시 답이 없다.

F급이라서 그런 건가.

난 잠시 고민을 했고.

“이게 얼마죠?”

“200포인트 되겠습니다.”

“계산해 주세요.”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가격이 얼마 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구매했다.

일단은 특별한 기능이 있으니까.

난 보물 주머니에 단검을 넣고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3시간.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상가를 돌아다니며 물건들을 살폈다.

결과는 아쉬웠다. 처음에 얻은 게 전부였으니까.

“하긴 숨겨진 옵션이 달린 물건이 많을 리가 없지.”

“그에에에.”

따지고 보면 나도 숨겨진 옵션이 있는 물건이라고는 펠라인의 노란 몸통밖에 없다.

상점은 이 정도로 하고 지금부터는.

“노점상을 노리는 수밖에.”

“으겍?”

NPC가 파는 물건을 그렇지만 헌터들이 파는 물건 중에는 있을 수도 있지.

또 돌아다닐 거냐며 덕춘이가 울상을 짓는다.

갑옷 안에서 가만히 있으니 답답한 모양.

나도 말캉한 게 안에 있으니 기분이 좀 묘하다만 별수 있나.

자고로 기회는 스스로 만드는 법.

발품을 팔아서라도 이득 볼 건 이득을 보는 게 맞았다.

그래도 덕춘이한테 미안하니까.

“노점상 볼 때 간식거리 같이 사자. 아까 오면서 보니까 닭꼬치 냄새가 장난 아니던데, 어때?”

“그에엑! 궥!”

벌써부터 침을 흘리는 녀석. 갑옷 속에 손을 넣어 녀석의 머리를 긁어 주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골라 골라. 잡템 떨이합니다.”

“상점창에서 안 파는 물건이 필요하십니까? 한번 둘러보세요.”

“수공예로 만든 생필품 팝니다. 이거 상점에서 안 파는 거예요. 칫솔도 있어요!”

확실히 NPC들이 파는 물건들보다 품질 자체는 떨어지지만 그들만의 아이디어가 빛났다.

몬스터의 털과 나무로 만든 칫솔이라든가. 뼈를 가공해 만든 효자손 같은 거.

그것도 있다, 면도기. 어떻게 만든 건지는 몰라도 면도 크림도 판다.

밖에서 들어왔기에 만들고 팔 수 있는 것들.

나 역시 칫솔을 몇 개 샀다. 그동안은 나뭇가지 끝을 씹어서 칫솔로 사용했는데…….

그리운 한국 음식들도 몇 개 보였다.

10층에 거주한 지 오래된 이들이 김장을 한 모양.

솥에서 끓는 김치찌개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때깔 미쳤다. 저건 무조건 먹어야 한다.

결국 노점상을 돌며 얻은 건 생필품 몇 개와 한 손 가득 든 음식 바구니가 전부.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안전지대는 낮과 밤이 확실한지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다.

피곤함을 떠나서, 노점을 펼쳤던 헌터들이 장사를 접고 있어서 더 둘러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아쉬우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보자.”

“으게게게게.”

덕춘이가 짜증을 냈지만 호두과자를 입에 넣어 주자 금세 조용해졌다.

어떠냐 이놈아. 한번 맛보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지?

숙소에 들어가서 김치찌개를 먹어 보면 아주 기절을 할 거다.

개구리한테 먹일 만한 건 아니지만 덕춘이는 영물님이니까 상관없다.

알게 모르게 덕춘이의 입맛 한국화를 꿈꾸며, 정리 중인 노점상에게 다가갔다.

“아직 장사합니까?”

“아? 예. 한번 둘러보시죠.”

로브를 쓴 30대 남자.

아무렇게나 자란 턱수염에, 손끝은 뭐가 묻었는지 거무튀튀하다.

그가 팔고 있던 것은.

“포션?”

“예. 제가 연금술 쪽 권능이 있어서요. 아. 탑이 참 오르기가 뭐 같아서. 얻은 스킬도 전투랑은 거리가 멀고. 그냥 가면 밑바닥 헌터밖에 더 되겠습니까. 진로를 좀 바꿨죠.”

투박하게 만든 나무 상자에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생긴 건 산적인데 목소리는 얇았고 말이 많았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 영업직이었나, 아니면 투머치토커인가.

별 관심도 없는데 주저리주저리 말을 해 댄다.

“이렇게 된 김에 안전지대에서 물약 제조 숙련도나 올리려고요. 나가면 연구소나 길드 공방에서 일하면 되니까. 역시 사냥하는 것보단 안에서 일하는 게 낫죠. 화이트 컬러가 최고 아닙니까.”

“그렇군요.”

“여기서는 싸게 팔고 포인트 모아서 재료 사고 그러면서 있는 거죠.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자수성가한 물약 제조사! 크흐! 분명 제 능력을 알아봐 준 대형 길드가 러브콜을 보낼 겁니다.”

대충 그의 말에 맞장구쳐 주며 하나하나 물약을 살폈다.

자체 제작인지 등급은 그리 좋지 않았다.

효과도 별로고.

[연습용 포션 (F)]

-가벼운 외상을 치료한다.

[애매한 해독제 (F)]

-해독이… 되나?

사용 자체가 가능한지 의심되는 물건도 있었다.

싼 맛에 구매한다면 어찌저찌 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목숨이 오가는 전투 시에 먹을 만한 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특별한 옵션이 숨겨진 것도 없었고.

미안하지만 저 사람 말대로 대형 길드가 러브콜을 보낼 일은 없을 거다.

“읏차. 잘 봤습니다.”

더 볼 것도 없다.

난 슬쩍 굽혔던 몸을 일으켰고.

[행운 스텟이 반응합니다.]

그가 앉아 있는 나무 상자에서 빛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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