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개구리 팔래?
퀘스트. 탑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는 거였지만 예외가 있다.
클리어가 불가능한 퀘스트.
탈출구가 없는 퀘스트.
페널티가 막대한 퀘스트.
대표적으로 이 세 가지가 있는데 이 대단한 NPC가 주는 퀘스트는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이 더 들어간다.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발동하는 것.
9층에서 발생한 퀘스트도 강제기는 했다.
트리거 한 번 건드렸다고 저절로 퀘스트가 시작됐으니까.
‘그런데 그건 중간에 포기할 수가 있었잖아.’
뿔 늑대 10마리를 잡은 시점에서 포탈은 이미 열렸고, 원한다면 퀘스트를 포기하고 위로 올라가는 방법도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퀘스트 하자!”
탈출구도 뭣도 없다.
말 그대로 찾아오는 재앙. 모두에게 빅엿을 뿌리는 끔찍, 깜찍한 수인.
심지어 NPC라 덤비지도 못한다. 무력으로 제압당하니까.
“저 사람 봐. 릴카한테 걸린 거 같은데?”
“운도 더럽게 없네, 이제 막 10층으로 올라왔나 보지?”
“그렇겠지. 신입 아니면 말도 안 걸잖아.”
“탑 생활 꼬였네. 쯧쯧. 나중에 어떡하냐.”
“그래도 이번에 한 명 걸렸으니 한동안은 안전해질걸?”
릴카의 등장에 이목을 끈 걸까.
지나가던 사람들이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헤헤. 잘 해 보자구.”
다른 이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릴카가 날 붙잡았다.
이러면 곤란한데.
퀘스트고 나발이고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한다.
괜히 대형 길드의 눈에 띄면 피곤해지니까.
“어? 어디 가! 야!”
릴카를 뿌리치고 인파를 피해 달아났다.
빠른 걸음. 이내 뛰다시피 난 골목 안으로 숨어들었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도망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뭐야. 벌써 따라왔다고?”
누군 숨이 차게 뛰어왔는데 저 NPC는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NPC가 더럽게 세다더니. 진짜였던 모양.
그건 알 바 아니고.
난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하지 못한 일을 했다.
“으아아아! 이런 개똥 같은 퀘스트를 봤나!”
“개, 개똥?”
바로 하늘을 향해 소리 지르는 것.
릴카가 충격을 받았는지 흠칫했지만 내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릴카가 내게 준 퀘스트는.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릴카는 NPC들의 상인이자 대장장이입니다.
-수많은 주문 요청으로 그녀 혼자서는 감당하기 버거울 지경입니다.
-그녀를 도와보는 건 어떨까요?
-바이퍼 가죽 (0/50)
-화갑룡의 비늘 (0/1)
-보상: 릴카와 NPC들의 호감도 상승
-실패 시 NPC들과의 관계가 틀어집니다.
-릴카의 퀘스트가 최우선시됩니다. 10층 안전지대에서 퀘스트를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재료는 직접 공수해야 합니다.
하나 같이 주옥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으니까.
먼저 모든 퀘스트 재료를 직접 구해야 한다.
상점창이나 개인 거래로 살 수 없다는 이야기.
여기서부터가 에러다.
어떻게 재료를 모으더라도 퀘스트를 진행하려면 무조건 한 번 이상은 죽어야 한다.
릴카는 10층에 있으니까.
‘그나마 이건 무한 코인이 있어서 괜찮다 치는데 나머지가 문제야.’
바이퍼 가죽? 괜찮다. 기껏해야 2성급 몬스터니까. 나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화갑룡은?
“5성급 괴물이잖아!”
“으게게게!”
나도 울고 덕춘이도 울부짖었다.
안 그래도 9층에서 달칸과 싸우느라 반쯤 죽었던 나다.
기껏 살아남았더니만 이번에는 뭐? 화갑룡?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
‘이러니까 사람들이 최악이라고 하지.’
이뿐만이 아니다.
이놈의 퀘스트 때문에 10층에서 할 수 있는 퀘스트는 전부 받을 수 없게 됐으며, 실패 시 수많은 NPC와의 관계가 악화된다.
당연하게도 NPC와 사이가 안 좋으면 퀘스트를 받는데 애로 사항이 생기고.
즉, 퀘스트를 포기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페널티를 입게 된다는 거다.
‘하다못해 보상이라도 좋던가.’
특별한 아이템이라던가 스킬 같은 거. 아니면 칭호를 준다면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퀘스트는 보상이 호감 상승 딱 하나다.
난이도는 극악. 보상은 미묘.
어쩜 이렇게 쓰레기 같은 조건만 가득 채워 놨지?
개꿀잼 몰카인가?
정말 놀랍게도 아직 안 끝났다.
[릴카의 부탁-강제 퀘스트 (1)]
무려 연계 퀘스트 되시겠다.
한 번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
이야. 신난다. 즐겁다. 행복하다.
자기 암시를 통해 멘탈을 수호해 보려 했지만.
“괜찮아. 괜찮아. 탑도 다 사람 사는 곳이야.”
슬쩍 다가와 등을 두드려 주는 릴카를 보니 혈압이 치솟는다.
누구 때문에 이러는데.
이 사단을 만든 녀석치고는 지나치게 태평하다.
정수리에 딱밤이라도 날려 주고 싶다. 그러고 싶은데.
[릴카-NPC]
-붉은 여우 수인.
-NPC상인이자 대장장이.
-격차가 커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권능을 통해 보이는 정보를 보아하니 덤빌 만한 상대가 아니다.
격차가 커서 정보를 읽을 수 없습니다.
그 강한 달칸도 저것보다는 정보가 많이 읽혔는데.
“저 정도로 강하면 직접 재료를 모으면 될 거 아니야.”
난 나직이 중얼거렸고.
“아. 저것들을 얻을 수 있는 곳은 내 영역이 아니어서. 좀만 힘내 봐.”
릴카가 앙증맞은 주먹을 움켜쥐며 파이팅을 외쳤다.
뭐지?
친화력이 좋은 건가 아니면 뻔뻔함이 도를 넘은 건가.
초면치고 친한 척이 과하다. 누가 보면 예전부터 알던 사이인 줄 알겠네.
됐다. 이해하려 하지 말자.
애초에 NPC 중에는 또라이가 많다고 들었다.
나사 한두 개 빠진 놈이 널렸다는 이야기.
하기야 탑에 속한 것 중에 정상이 있는 것도 이상하다.
그래도 하나는 물어봐야겠다.
“왜 하필 나야.”
얼굴을 쓸어내렸다.
억울하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나한테 퀘스트를 찔러 넣은 거냐고.
친절하기도 하지. 고운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만지던 녀석이 답을 내놓는다.
“음. 여기 있는 애들은 나만 보면 피해 다녀서. 이제 막 올라온 신참을 노리고 있었지.”
한 마디로 본인도 사람들한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안다는 거 아냐.
젠장. 나도 피했어야 했는데. 설마 올라오자마자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거고 너 재밌는 거 많이 가지고 있더라? 너라면 할 수 있을 거 같아.”
눈을 반짝인 릴카가 내 위아래를 살핀다.
호기심과 탐욕이 반반 섞인 눈.
강렬한 기세에 순간 몸이 떨릴 지경이다.
7층에서 싸운 보물 고블린이 저런 눈빛이었던 거 같은데.
“달칸의 털목도리라, 귀한 거지. 촉감도 엄청 좋고 탐낼 사람도 꽤 있을걸?”
꼬리를 살랑이며 내 주변을 도는 녀석.
아이템을 감평 하듯 진지한 얼굴이다.
“보물 주머니도 흔하긴 하지만 괜찮은 물건이고. 오호? 안에는 재밌는 게 들었네?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도 가장 흥미가 동하는 건 역시.”
-톡톡
“이 녀석. 카오스 속성이 깃든 개구리라니. 이거 나한테 팔 생각 없어? 알지 모르겠지만 난 대장장이 겸 상인이거든.”
“그에?”
무슨 묘기를 부린 걸까.
얌전히 갑옷 속에 숨어 있던 덕춘이가 어느새 릴카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덕춘이 역시 당황스러웠는지 버둥거렸지만 꿈쩍도 않는다.
저래 보여도 덕춘이 힘이 장사인데.
보기 드문 광경인지라 조금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잠시 참았다.
“안 팔아. 남의 펫에 눈독 들이지 마.”
“궥궥!”
내가 손을 내뻗자 의외로 순순히 내게 덕춘이를 돌려준다.
혹시나 땡깡을 부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궤에에엑!”
다시 만나니 반가운지 덕춘이가 내 얼굴을 꼭 붙잡는다.
빨판에 살이 빨리는 기분이 묘한데.
애정 표현이라고 생각하자.
“흐음. 아쉽네.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라 비싼 값을 치러서라도 데려갈까 했더니만. 대충 요정도?”
-우우웅
릴카가 손을 흔들자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인벤토리라도 되는 걸까. 격자로 나뉜 칸에는 갖가지 물건이 있다.
흘낏 날 보는 것이 한번 봐 보라는 느낌이다.
건방진 녀석.
무엇을 주더라도 덕춘이를 팔아넘길 생각은 없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니까.
“크흠.”
작게 헛기침을 하며 목록을 살펴봤다.
어디 보자. 가장 앞에 있는 건 망치 같은데.
[대지의 망치 (S)]
-후포푸코 대륙의 정기가 모여 생성된 망치.
-땅 위에 있을 시 모든 능력치 +100퍼센트
-대지의 축복 적용.
-슈퍼 아머 적용.
-대지의 정령과 친화도 상승. (하급 정령 명령 가능 20/20)
.
.
.
“엉?”
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잘못 읽었나?
S급 아이템? 탑 밖에서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그거?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얻기조차 불가능하다는 그거 맞지?
난 뒤이어 다른 아이템도 확인했다.
[전장의 붉은 잎사귀 (S)]
[역병을 부르는 피리 (S)]
[괴악병정怪惡兵丁 (SS)]
뭔가의 재료로 보이는 것도 있었고 아티팩트도 존재했다.
맨 마지막에는 무려 SS급 스킬북까지.
실제로 있었구나. SS급 스킬이란 게. 난 다 추측인 줄 알았는데.
스킬명만 봐도 엄청나 보인다. 아니. SS급이면 뭐라도 좋겠지.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갔다.
당장 내가 가지고 있는 B급 스킬 파이어 밤도 준수한 파괴력을 자랑하고 유일한 A급 스킬, 되갚기도 가히 사기적이라 할 정도의 성능을 낸다.
S급조차 뛰어넘은 저건 어떨까?
‘저것만 익혀도 밖에 나가면 최정상급 헌터로 분류되겠지.’
당연히 그럴 거다.
지금까지 공개된 스킬 중에 SS급은 없었으니까.
물론 자세한 스펙을 공개하는 걸 꺼리는 게 헌터계인 만큼 있을지도 몰랐지만, 있다 하더라도 극히 일부일 게 분명했다.
“에헤헤헤. 어때 관심 있어?”
홀로그램을 옆으로 치우며 릴카가 얼굴을 내민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홀로그램을 쫓아갔다.
그 모습을 본 걸까.
가뜩이나 올라간 릴카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더욱 진해진다.
“지금이라면 선심 써서 쬐끔 더 좋은 조건에 구입할 의향이 있는데.”
여기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다고?
순간적으로 솔깃했지만.
“궤에에에엑!”
-철퍽!
덕춘이의 혓바닥이 정신을 차리게 해 줬다.
아. 혓바닥으로 뺨 맞는 거 오랜만이네.
돌아가 버린 목을 원상태로 복구시키고 볼에 묻은 침을 닦아 냈다.
걱정 마라, 덕춘아.
나도 의리가 있지 널 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난 덕춘이의 등을 쓰다듬었고.
“거절한다.”
최대한 단호하게 말했다.
솔직히 욕심난다.
보물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들. 욕심이 안 나면 그게 이상하지.
그것도 S자로 도배가 되어 있는데.
‘어차피 난 100층까지 올라가야 하잖아.’
지금이야 굉장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에 가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물론 있으면 등반은 쉽게 하겠지.
몸도 편하고 시간도 아끼고 밖에 나가서도 떵떵거릴 수 있는…….
다시 유혹에 흔들렸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릴카는 상인. 상인은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덕춘이에게는 저만한 대가를 지불할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방증이나 마찬가지다.
내가 잘 키우면 되지.
언젠가 S급이니 SS급이니 하는 걸 다 씹어 먹을 만큼 스트롱 하고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 주지 않을까?
그렇지, 덕춘아?
“그에에에에.”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무시하자.
그리고 이미 덕춘이와는 정이 많이 들었다.
도움을 받은 적도 많고. 내게 있어서는 소중한 존재라는 것.
흔들렸던 마음이 다잡아진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릴카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생각 바뀌면 말해! 퀘스트 잘하구. 난 따로 볼일이 있어서 이만!”
홀로그램을 지운 릴카가 자기 할 말만 내뱉더니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수인이라 그런지 속도가 굉장하다.
한순간에 점이 되어 버렸으니까.
잠시 멀어져 가는 그녀를 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정신없다.”
“궤에에에.”
덕춘이도 마찬가지인지 혀를 빼문다.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간 느낌이랄까.
강제 퀘스트에 흥정이라니.
게다가 지 할 말만 하고 사라졌다.
원래 NPC들은 다 이 모양인가.
“정신 차리자.”
마른세수를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은 벌어졌다.
릴카의 퀘스트. 그로 인해 많은 계획이 꼬여 버렸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모두가 꺼리는 퀘스트. 지금까지 클리어된 적 없는 미지의 퀘스트.
무한 코인이 있는 나니까 도전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남들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지게 된 만큼 내게도 도움이 될 거다.
덕분에 한동안은 10층에서 다른 퀘스트를 못 하게 됐지만.
“상관없어. 퀘스트 말고도 10층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더 있으니까.”
나 역시 준비를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이벤트. 그것 먼저 노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