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스타터 킷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시피 한 고블린.
정상적인 숫자가 아니다.
어쩐지 고블린 10마리를 잡으라기에 왜 이렇게 쉽나 했다.
“이건 10마리만 잡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잖아!”
-콰직!
난 달려오는 고블린의 몸통을 걷어차는 동시에 옆에서 몸을 던지는 녀석을 검으로 베어 냈다.
저항감 없이 그어지는 검로.
“쿠헥!”
반 토막 난 고블린이 바닥에 떨어진다.
이미 내 스펙은 상당히 올라간 상황.
처리관을 처치했을 정도니까 10층에서는 최강이 아닐까?
못해도 상위권일 것 같기는 한데.
다르게 말하면 고블린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거다.
애초에 고블린은 건장한 성인 남성이면 누구나 이길 만큼 허약하다.
“키루루룩!”
“크룩! 크룩!”
문제는 더럽게 많다는 것.
[고블린 처치 (4/10)]
[29포인트를 획득합니다.]
놈들을 베어 넘길 때마다 클리어 조건과 포인트가 차오른다.
평소라면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제발 꺼져!”
“케헤에엑!”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 생각이 바뀌었다.
위험하다.
한 마리씩 상대한다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한다면?
“크윽!”
크든 작든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어서 몇 대씩 맞는 건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고 버틸 수는 없다.
아니, 그나마 몽둥이 정도는 참을 만한데.
-피슉
-팅!
[목걸이 투구 (D)가 자동 활성화됩니다.]
저놈의 독침이 문제다.
투구 아티팩트가 없었다면 진작에 독침에 당했을 거다.
운 나쁘게 방어구 틈으로 독침을 맞는다면?
그때부터는 뭐. 고블린과 뒹굴면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거지.
-콰직!
난 독침을 날린 녀석의 머리를 두 쪽 내고 앞으로 달렸다.
이대로는 안 된다. 포위망부터 벗어나야 한다.
-파앙!
[질주 (E) Lv.1]
“비켜!”
“크헤에엑!”
“키햐악!”
난 질주를 사용하며 고블린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기껏해야 내 허리밖에 오지 못하는 놈들.
힘과 무게로 밀어붙이면 밀려날 수밖에 없었고.
-쿠웅!
마지막까지 달라붙던 녀석을 나무에 밀쳐 내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트였다.
약간의 안도감이 찾아올 법도 하건만.
내 눈에 들어온 건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키루루룩
-크르르르
‘더 있다고?’
당장 날 공격하던 개체만 스무 마리가량.
기껏 포위망을 뚫고 나왔더니 다른 무리가 더 있다.
말이 되나? 이걸 지금 깨라고 만든 거야?
-티잉!
“크읍!”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발목에 뭔가가 걸려 엎어졌다.
어설프게 만든 밧줄.
수풀에 가려져 있어 미처 살피지 못했다.
망할 녀석들, 함정까지 준비하다니.
이를 악물 사이도 없이 놈들이 덮쳐 온다.
“캬하아악!”
“키헥! 키에에!”
놈들의 손에 들린 조악한 단검과 몽둥이.
대롱을 쥐고 독침을 발사하려는 녀석과 큼지막한 돌덩이를 움켜쥔 놈까지.
타액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초록색 피부는 이질적이었고, 날 것 그대로의 생동감은 야성적이다 못해 역겨웠다.
일렁거리는 초록빛 물결.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쳤고.
풀과 나무보다 고블린이 더 많아 보이는 그 시점.
[파이어 밤 (B) Lv.2]
-콰아아아앙!
“키하아악!”
“크헤에엑!”
난 폭발을 일으켰다.
충격이 온몸을 휩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내 위에서 폭발을 일으켰으니.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지금 당장 쓰지 않으면 죽을 거라는 확신.
무한 코인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죽음의 공포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투두두두!
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타격감.
투구가 활성화되어 머리를 보호했으며, 달아오른 열기에 땀이 삐져나온다.
굉음에 귓가가 멍멍하고 알 수 없는 뭔가가 몸을 두드리는 것도 잠시.
-후우우웅
사방에서 들리던 고블린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매캐하고 역겨운 탄내만이 진동할 뿐.
“끄으읍.”
난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 위로 올려져 있던 물컹한 살점들이 떨어져 내렸다.
나를 기점으로 둥글게 뻗어 나간 그을림.
익어 버린 고블린의 사체가 곳곳에 놓여 있고, 완전히 터져 버린 놈들은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진득하게 새어 나오는 핏물.
내장이 터지며 쏟아진 오물.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참아 냈다.
많이 봐 왔고 앞으로도 보게 될 광경이니까.
학생 때라면 몰라도 이제 와서 토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우선 상황 파악부터 하자.
“키, 키루룩.”
“크에에. 켁!”
몇몇 살아 있는 놈들이 있다.
난 뻐근한 팔을 움직여 검을 들었고.
-푸욱
하나씩 확실하게 숨을 끊어 주었다.
괜히 놔둬서 위험 요소를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고블린 처치 (12/10)]
[포탈이 개방됩니다.]
-우우우웅
정신없는 나와 달리 시스템은 신속하게 움직였다.
곧장 앞으로 8층으로 이어진 포탈이 생성되었으니.
폭발 한 번으로 8마리를 잡은 건가.
하기야 방어력이 낮은 놈들이니 살 재간이 없기는 하다.
“그에에에.”
덕춘이가 킁킁 냄새를 맡더니 혀를 내두른다.
톡. 녀석의 코를 터치한 난 포탈 앞에 섰다.
-꿀꺽
나도 모르게 넘어가는 침.
선택해야 한다.
넘어갈지, 아니면 좀 더 이곳에 머무를지.
마음은 빨리 넘어가자고 아우성을 쳤지만 이성은 아니었다.
‘분명 7층에는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
근거 없는 생각은 아니다.
7층에서 9층은 성장 구간.
성장이 테마인 것이다.
튜토리얼이 앞으로 겪게 될 것들을 미리 체험하는 역할을 가진 것처럼.
[고블린 처치 (12/10)]
[7층 클리어]
저건 말 그대로 최소 조건이다.
지나가도 좋다는.
“성장이라.”
난 미간을 좁혔다.
참으로 두루뭉술한 주제.
그만큼 강해질 방법은 많았으니까.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확실히 도움이 된다.
경험을 쌓게 해 주는 건 물론이요, 포인트도 주니까.
그걸로 상점창에서 장비를 업그레이드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건…….
“너무 간접적이지 않나?”
심지어 클리어 조건은 고블린 10마리를 잡는 것이다.
비록 물량에 밀려 정신없이 싸웠지만 차분하게 대처했다면 별다른 위험 없이 잡았을 거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도망치듯 빠져나간다면 10마리는 충분히 잡을 텐데…….
-키르르르
-쿠륵, 쿠르륵
결정을 내려야 한다.
파이어 밤의 폭음이 너무 강했다.
산속에 숨어 있는 다른 무리가 다가오고 있다.
어느 한 방향이라고 정의할 수 없이 울리는 울음소리.
아마 모든 방향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거겠지.
방금처럼 둘러싸이는 건 사양이다.
-저벅
난 조금씩 앞으로 향했고.
“아! 몰라!”
-파악!
포탈을 지나쳐 앞으로 달렸다.
후회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죽어서 6층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그곳에 대기 중인 산군 길드에 잡혀 험한 꼴을 볼 가능성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오지혁 그놈이랑 다시 싸우는 건 피하고 싶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치면 죽도 밥도 안 돼.”
탑의 특성상 10층을 넘어서면 다시는 7~9층 성장 구간으로 내려올 수 없다, 그 누구도.
그때부터는 10층 안전지대에서 부활할 테니까.
“즉, 힘들다고 그냥 10층으로 올라가 버리면 다시는 7, 8, 9층에 있는 히든 피스를 얻을 수 없다는 거지.”
안 될 말이다.
무한 코인이 있는 이상 무조건 100층까지 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는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까.
최대한 스펙을 쌓아야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알아내야지.”
이곳이 왜 성장 구간인지.
정답은 모른다.
권능도 반응이 없고, 반짝이는 것도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사냥을 이어 나가는 것뿐.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기껏해야 고블린.”
대중적으로 알려진 만큼 난 놈들의 습성을 잘 알고 있다.
조금만 조심한다면.
몇 가지 장치와 함정으로 놈들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그에에.”
자신도 잊지 말라는 듯 우는 덕춘이.
그래. 내게는 슈퍼 개구리도 있다.
씨익. 난 입꼬리를 올렸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고블린들을 움직일 미끼는 이미 뿌렸다.
파이어 밤으로 놈들의 시선을 끌었으니까.
-파박!
이곳으로 다가오는 무리의 발소리가 가까워질 때쯤 난 나무 위로 올랐다.
유독 이파리가 우거진 나무.
가뜩이나 체고가 낮은 놈들이 확인하기에는 높았고.
-구구구구구!
“키헤아!”
“크헤헤헤!”
좋다고 몰려오는 놈들은 서로 먼저 가겠다고 다투느라 내 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하여간 뭐 하나에 꽂히면 정신을 못 차린다.
-두두두두
한차례, 고블린 무리가 몰려간 후.
“켁. 헤엑!”
난 느긋하게 기다렸다.
저기. 무리에서 낙오된 허약한 놈을 잡기 위해.
멀리서부터 뛰어왔는지 헐떡이는 놈이 하나.
다른 놈들에게 휩쓸려 밟혔는지 온몸에 멍이 든 놈이 하나.
평범한 고블린보다도 체구가 왜소한 놈이 또 하나.
총 세 마리.
-툭
“키헤?”
-푸욱!
나무 위에서 뛰어내린 난 곧장 한 마리의 몸에 검을 꽂았고.
[위협 (E) Lv.1]
오지혁을 잡으며 새롭게 얻은 스킬을 발동했다.
-쿠화아악!
한 번에 뿜어져 나오는 기세.
마력의 영향 덕분인가 박력이 상당했으며.
“키히이이익!”
“케흑!”
기세에 눌린 고블린들이 주춤거린다.
위축된 녀석들은 무기조차 들어 올리지 못했고.
-서걱!
-촤아아악!
난 손쉽게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다.
처음 이 스킬을 얻을 때만 해도 쓰레기 같았는데.
나보다 약한 놈들을 처리하는 데는 충분히 쓸 만하다.
‘그런데 이거 원래 Lv.2 아니었나?’
분명 놈이 썼을 때는 Lv.2였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스킬북으로 지급되면서 초기화된 것 같다.
등급은 유지되어 있으니 다행인가.
[21포인트를 획득합니다.]
[고블린 처치 (15/10)]
어깨를 으쓱인 난 바로 자리를 이탈했다.
또 언제 어디서 놈들이 나타날지 모르니까.
“계속 잡아 보자고.”
7층에 숨겨진 뭔가가 나올 때까지.
방법은 간단했다.
파이어 밤으로 놈들을 유인하고 무리에서 뒤떨어진 놈들은 해치웠다.
포위당할 것 같으면 질주로 벗어나고 도망칠 곳이 없으면 파이어 밤으로 길을 뚫었다.
배낭에서 로프를 꺼내 놈들이 했던 것처럼 간단한 함정을 설치하기도 했다.
“게엑, 퉤!”
“덕춘이 나이스.”
내가 놓치거나 발견하지 못한 놈들은 덕춘이가 해결해줬다.
역시나 영물. 침 한 방이면 고블린이 그냥 녹아 버린다.
[7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역시 펫이라 이건가.
덕춘이가 사냥한 것도 내가 잡은 거로 인정이 되었으니.
[고블린 처치 (39/10)]
그렇게 반나절을 뒹굴어 고블린 39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키, 키루루.”
아. 취소. 저놈 한 마리를 잡으면 40마리 채운다.
10자리 수로 딱 맞아떨어져야 깔끔하지.
난 빙글 검을 돌리며 놈에게 다가갔고.
-푹
가슴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알림.
[고블린 처치 (40/10)]
-고블린을 40마리 이상 처치했습니다.
-보상, 스타터 킷이 지급됩니다!
“오?”
난 위에서 떨어지는 물건을 잡았다.
캡슐? 알약?
직사각형의 조그만 물체였는데 은근하게 올라오는 향기가 꽤 좋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내가 받은 물건의 정체지.
설명을 읽을수록 내 입꼬리는 올라갔고.
[스타터 킷 (A)]
-7, 8, 9층 성장 구간에서 사용. (섭취하십시오.)
-몬스터 사냥 시 스테이터스가 향상됩니다.
-열심히 싸워 보는 건 어떨까요?
-몬스터 종류에 따라 상승되는 스텟의 한계가 존재합니다.
“이거였어!”
어째서 이곳이 성장 구간인지 알 수 있었다.
난 스타터 킷을 삼켰다. 기껏 얻었는데 망설일 필요 없지.
“크으. 맛은 더럽게 없네.”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진다.
향은 로즈마리인데 맛은 복잡미묘하다.
고양이 사료? 해독주스? 아님 둘 다 섞은 건가.
뭐든 상관없다. 강해질 수만 있으면.
가뜩이나 각성하면서 스텟이 크게 오른 나다.
여기에 추가 스텟이 붙으면 더 이상 고블린들을 피해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거고.
정면으로 깨부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으득. 이가 갈린다.
고블린 새끼들 다 죽었다. 그동안 개처럼 뛰어다니느라 고생한 것만 생각하면 내가…….
“게에. 그에에.”
“응? 왜?”
속으로 고블린들을 때려잡을 생각에 빠져 있는데 덕춘이가 내 볼을 잡아당긴다.
시선을 돌리자 알림창을 가리키는 녀석.
뭔가 싶어서 살펴보니 스타터 킷을 먹으면서 설명 하나가 추가됐다.
-섭취 완료.
-효과가 적용됩니다.
-고블린 (0/100)
0이라니…….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숫자는 변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스타터 킷을 먹은 후 사냥을 해야 스텟이 오르니까…….
그 말은 곧.
“…어. 처음부터 다시 잡아야 하네?”
다시 한번 노가다를 뛰어야 한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