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7층
털썩.
포탈을 넘고 안전한 걸 확인하자마자 난 자리에 주저앉았다.
6층에 회복 효과가 있는 만큼 조금이라도 머물렀다면 상태가 나았겠지만.
“괜히 그러다가 죽을 필요는 없지.”
적이 득실득실한 곳에서 발을 뻗고 있을 만큼 대담하진 않다.
바닥에 반쯤 누워 오지혁과의 전투를 상기했다.
정말이지 한계였다.
이긴 것도 기적이나 다를 바 없었고.
여기서 느낀 점 하나.
“장비빨도 중요하구나, 이게.”
스테이터스, 권능, 칭호, 스킬.
전부 중요하지만 장비도 무시할 게 아니었다.
놈과의 전투. 지금 되짚어 봤을 때 아이템으로 변수가 생기지 않았다면 더 빠르게 끝낼 수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나 역시 강한 적을 마주했을 때 그럴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수확이 없지는 않았다.
“흐흐. 좋은 걸 두 개나 얻었단 말이지.”
놈이 사용하던 힘을 끌어올리는 브로치와 중량 팔찌.
무려 B급, C급 아이템.
지금 내 상점창 등급으로는 살 수조차 없는 상위템이다.
안 그래도 기본적인 장비는 마련했는데 특별한 기능이 달린 아티팩트를 구하지 못해 아쉬웠었다.
아니지. 딱 하나 아티팩트가 있기는 하다.
내가 쓰고 있는 투구.
[목걸이 투구 (D)]
-목걸이 형태의 아티팩트.
-투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위험 감지 시 자동 투구 활성화.
D급임에도 준수한 기능.
특히 기습적으로 공격이 들어올 때 자동 활성화된다는 건 큰 메리트다.
디자인도 나쁘지 않고.
그럼에도 D급밖에 안 되는 이유는.
-방어력: 0 (사용자의 마력으로 데미지를 경감시킵니다.)
다른 스텟 옵션이 전혀 없었을뿐더러 방어력조차 전무했기 때문이다.
마력으로 방어력을 대체하다니.
스킬에 쓸 마력도 부족한데 이런 낭비가 있나.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힌 헌터라면 사지 않았을 옵션이다. 나야 마력 스텟이 11이나 되니까 상관없지만.
남들이 들었으면 욕할 만했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타고난 것을.
-찰칵
난 투구를 목걸이로 바꾸었다.
아무래도 벗고 있는 편이 시원하고, 7층에 올라온 만큼 얼굴을 가릴 필요도 없다.
“투구는 투구고 이것들은 요긴하게 써야지.”
난 브로치를 갑옷 안쪽에 착용했다.
오지혁 그놈처럼 멍청하게 밖에 달고 다니다가 빼앗기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에에에.”
파이어 밤을 연달아 사용하면서 뜨거워진 갑옷.
덕춘이가 품에서 빠져나와 몸을 핥아 댔다.
회복 효과는 본인에게도 적용될 테니까.
진짜 얘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난 손끝으로 덕춘이의 목덜미를 긁어 줬고.
“고맙다.”
“게엑.”
덕춘이 역시 고개를 까딱이며 가슴을 탕탕 쳤다.
믿고 맡기라는 건가.
하찮게 생겨서는 듬직하다.
선물로 맛있는 거 하나 사 줘야지.
-뽕!
난 파우치에 들어 있는 포션병을 꺼내 들이켰다.
그리 맛있지는 않지만 바짝 말랐던 목에 액체가 들어가자 살맛이 났다.
“크흐. 좋구만.”
겸사겸사 상처도 낫고.
화상과 자상, 자잘한 상처들이 빠르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회복되고 있다.
일단은 휴식이 먼저다.
탑이고 나발이고 지금 살고 봐야지.
밥도 먹고 컨디션도 챙기자.
“어디 보자, 덕춘이가 먹을 만한 게 뭐가 있나. 나도 좀 먹고.”
난 상점창을 열어 음식을 찾았다.
조리 기구부터 식재료 등등 종류가 많았는데 이런 건 패스하고 완제품을 살 생각이다.
아무래도 조리는 자신이 없다.
게다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냄새도 많이 난다.
굳이 몬스터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요리할 이유가 없다는 것.
결국 남은 건 도시락이나 그런 건데.
“역시 고기인가.”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이 하나 있었다.
3층에서 먹었던 스페셜 도시락-고기 듬뿍 버전!
무려 1,300포인트다.
비싸기는 하지만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고생한 나 자신과 덕춘이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도.
-주르륵
아, 침 나왔다.
탑에 들어오니까 없던 식탐이 생기네.
오케이. 결정. 오늘 밥은 이거다.
“어차피 포인트야 모으면 되니까.”
지금까지야 특별한 조건을 채워 포인트를 얻었지만 7층부터는 다르다.
튜토리얼 구간이 끝났으니까.
몬스터를 잡으면 포인트를 얻을 수 있다는 말.
[Tip. 강력한 몬스터일수록 많은 포인트를 드랍합니다.]
팁 메시지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고.
1,300포인트가 6층에서나 큰돈이지 본격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하면 못 모을 정도는 아니라는 말.
심지어 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망설임 없이 클릭.
[스페셜 도시락을 구매합니다.]
[1,30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허공에서 나타난 도시락.
난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크, 이 감미로운 향기.
덕춘이도 눈이 동그래져선 도시락을 바라본다.
그래. 네가 봐도 장난 아니지?
내 눈길을 느낀 걸까 덕춘이도 나를 바라봤고.
“덕춘아, 먹자!”
“그에에엑!”
누가 먼저랄 거 없이 손을 뻗었다.
* * *
30분 뒤.
난 건조한 빵을 씹고 있었다.
빵을 먹는 이유?
뭐겠는가. 저 돼지 같은 개구리 때문이지.
“그어어억.”
저저, 트림하는 거 봐라.
개구리가 배 내밀고 누워 있는 게 말이나 되나.
구조적으로 가능해?
믿을 수 없었지만 그 어려운 걸 덕춘이가 해냈다.
“야, 좋냐? 좋아?”
“궥궥.”
고개를 까딱이는 녀석.
좋겠지 네가 다 먹었는데.
덕춘이에 밀려 반도 먹지 못했다.
“치사하게 밥 먹는 데 힘을 쓰고 그러냐.”
난 질린 표정으로 덕춘이를 바라봤다.
거짓말 안 하고 진심으로 놀랐다.
한 팔로 날 밀치는데 진짜 밀렸으니까.
그 정도 능력 있었으면 오지혁이랑 싸울 때 직접 나섰으면 됐던 거 아닌가?
그냥 찜쪄먹었을 거 같은데.
약간의 원망을 담아 덕춘이를 노려봤지만.
“궥. 으에에에.”
덕춘이는 특유의 띠꺼운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릴 뿐이었다.
양서류한테 뭘 바랄까.
나중에 내가 더 강해지면 두고 보자.
“으읏차! 지나간 일을 그렇다 치고 파이팅 해야지.”
오지혁과의 전투는 험난했지만 여러 면으로 도움이 됐다.
객관적인 내 수준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가 아닌 사람과의 전투도 경험하게 해 줬으니.
전투 실력도 상승한 거 같다.
-우드득
난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포션과 스페셜 도시락의 버프 덕분에 몸은 회복됐다.
하긴 도시락값이 어지간한 장비값만 한데 이 정도 효율은 나와 줘야지.
다리도 풀고 허리도 풀고.
“잠깐만.”
몸을 풀다 말고 난 얼굴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내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스크롤.”
난 가슴팍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냈다.
화마 속에서도 어떻게 망가지진 않은 모양.
하기야 A급 화염 스킬이 담긴 물건인데 B급 화염 스킬에 훼손되지는 않겠지.
“아. 이거 썼으면 바로 이겼겠네.”
갑옷을 입고 그 안에 덕춘이를 넣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리 그놈이어도 A급 스킬에 정통으로 맞았으면 그대로 죽었을 텐데, 그럼 이 고생도 안 했을 거고.
이래서 사람이 멍청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거다.
후회해 봤자 늦었다. 결과적으로 따지면 더 좋고.
비장의 한 수를 유지하고 있는 거니까.
대신 다음번에는 똑똑히 기억해 뒀다가 위험한 순간에 써먹어야겠지.
이어서 난 배낭을 벗어 바닥에 내려놨다.
확인할 게 더 남아 있다.
“이왕 준비한 김에 그것도 살펴야겠지?”
“겍. 게엑.”
역시 나와 이어져 있다는 걸까.
덕춘이가 폴짝 뛰더니 배낭 안으로 들어갔다.
약간의 부스럭거림.
곧 배낭 밖으로 고개를 내민 덕춘이의 손에는 스킬북이 들려 있었다.
난 가만히 덕춘이가 건넨 스킬북을 내려다봤다.
살인자 퀘스트.
오지혁을 처리한 보상.
놈이 가지고 있던 스킬 중에 무작위로 하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같은데.
분명 네 개였지?
‘걷어차기. 쉴드. 위협. 도발.’
앞에 두 개는 쓸 만하지만 뒤에 있는 것들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가장 탐나는 건 당연히 쉴드다.
놈이야 마력 자체가 부족하니 후반부에는 스킬 없이 싸워 댔지만 난 다르다.
남들보다 몇 배는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얻기만 한다면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특히 파이어 밤의 충격에서 몸을 보호하는 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덕춘이가 아니었으면 위험했다.
“제발 쉴드 걸리게 해 주세요!”
난 기도와 함께 스킬북을 펼쳤고.
-빰빠라밤!
하늘에서 찬란한 빛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된 건가?
정말 된 건가?
난 입꼬리를 잔뜩 올리며 양손을 쥐었다.
[축하합니다!]
[위협 (E)을 획득했습니다.]
“제에에엔자앙!”
땅을 치며 포효했다.
꽝이 걸렸다.
아. 하필 걸려도 위협이.
걷어차기만 나와도 성공하는 거였는데.
50퍼센트의 확률이었다. 쓸 만한 것과 쓰레기.
“이걸 어디다 쓰지? 후우.”
한숨이 절로 나오는 상황.
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 몰라. 효과를 봐 봐야지.”
대략적인 효과가 예상되지만 구체적인 건 또 모르니까.
이것도 갈고 닦다 보면 희대의 사기 스킬이 될 수도 있다.
난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꼼꼼하게 내용을 살폈다.
[위협 (E)]
-상대방을 위협해 일시적으로 경직시킵니다.
-레벨이 오를수록 범위, 효과 상승.
-오늘부터 호통치는 연습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오케이.
확실하다. 쓰레기다.
기대나 하지 말걸.
“어째 일이 잘 풀리는 거 같다가도 막히는 거 같냐. 그치, 덕춘아?”
“엑?”
아쉬운지 도시락 뚜껑을 핥던 덕춘이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래. 네가 뭘 알겠니.
먹기만 해도 특성이 생기는 영물님이신데.
기대에 못 미치지만 스킬이 생긴 건 맞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아직 올라가야 할 층이 많다.
7층. 본격적인 등반의 시작.
난 하늘을 올려다봤고.
[7~9층은 성장 구간입니다.]
[7층]
[고블린 처치 (0/10)]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고블린이라.
“쉽네.”
1성급 몬스터.
튜토리얼에서 가장 먼저 마주했을 만큼 만만한 녀석이다.
그런 놈에게 죽은 적이 있다는 게 함정이지만.
-스르릉
롱소드를 쥔 채 앞으로 나아갔다.
방심하지는 말자. 아무리 고블린이라도 뭉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놈들의 무서움은 무리 사냥에서 나온다.
먼저 지형 탐색부터 하자.
7층에 올라오면서 안전한지 확인하기는 했지만 필드 전체를 본 건 아니다.
그럴 만한 체력도 없었고 괜히 들쑤시고 다니다가 어그로를 끌 수도 있었으니까.
-서걱서걱
난 롱소드를 마체테 삼아 풀을 잘라 냈다.
기본적인 지형은 산인 것 같은데.
엄폐물이 많아 덩치가 작은 몬스터들이 매복하기 좋은 곳이다.
보통 저런 수풀에 쪼그리고 있다가 독침을 발사하니까.
-푸슉!
-티잉!
바로 이렇게.
“키엑?”
쏘아 보낸 독침이 튕겨 나가자 당황한 고블린이 몸을 들썩인다.
덕분에 숨어 있는 위치도 아주 잘 보였고.
-푸욱!
난 편하게 검을 꽂아 넣을 수 있었다.
“뚫리겠냐, 에휴.”
검을 회수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블린이 최하급 몬스터인 데는 이유가 있다.
조심해야 할 무기라고는 독침이 전부인데 장비만 제대로 갖추고 있으면 통하지 않으니까.
가끔 운 좋게 방어구 사이나 손, 얼굴이나 목에 박히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거야 예외적인 경우니 패스하자.
[6포인트를 획득합니다.]
“오. 진짜 들어오는구나.”
난 눈앞에 떠오른 알림에 화색을 띠었다.
적기는 하지만 포인트는 포인트다, 탑에서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모아야 하는.
“크르륵.”
“키룩!”
동료의 죽음에 반응한 것일까.
곳곳에서 고블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와.”
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셋…….
아니, 족히 스무 마리는 넘는 거 같은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도 잠시.
“키헤에에엑!”
놈들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