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5화 (25/740)

25화 굉음

여관에서 여독을 푼 지 하루.

어느 정도 정상 컨디션을 찾았다.

튜토리얼 구간에 있었을 때는 생명이 달린 일이라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던 모양.

“그에에에.”

덕춘이 역시 때깔이 좋아졌다.

매끈하다 못해 빛이 날 지경.

씻어서 그런가, 아니면 밥을 잘 먹어서 그런가.

“넌 진짜 다 먹더라.”

“그에?”

난 테이블 위에 놓인 빈 그릇을 바라봤다.

여관에서 제공하는 식사.

그리 대단한 건 없었다.

마른 빵과 수프 한 접시.

베이컨 몇 조각과 계란프라이 두 개.

평범하지만 적당히 한 끼 때우기에는 충분한 것들.

펫을 위한 먹이는 따로 준비되지 않아서 그냥 옆에 놔뒀는데.

‘얘가 혼자 다 먹었지.’

저 작은 몸에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는 미스터리다.

대놓고 이름에 카오스라고 적힌 녀석이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덕분에 난 따로 식사를 주문해야 했지만.

다행히 여관 메뉴는 그리 비싸지 않은 편.

아직 포인트에 여유가 있는 만큼 문제는 없었다.

‘덕춘이가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걸 알게 됐으니 이득인가.’

먹이 걱정은 줄었다.

사람 먹는 거면 다 먹는 거 같으니까.

다른 것들도 한번 줘 봐야지.

벌레라든가 몬스터 사체라든가.

괜히 입맛만 고급이 되어 버리면 곤란하니까.

-슥슥

“으게에에에.”

난 배가 빵빵한 덕춘이의 등을 문질러 준 다음 여관을 나섰다.

가능하면 좀 더 쉬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산군 길드가 마음에 걸린다.

마음을 졸이고 있느니 빨리 위로 올라가 버리는 게 낫겠지.

그 전에 얼굴부터 가리고.

-찰칵

목걸이에 손을 데자 자동으로 투구로 변신하는 아티팩트.

얼굴이 가려졌음에도 시야는 트여 있다.

다시 봐도 잘 샀다는 생각을 하며 거리를 걷는데.

“어째 사람이 많아 보인다?”

어제와는 달리 거리를 배회하는 헌터들이 많았다.

무슨 행사라도 있나?

얼굴에 짜증이 섞인 걸 보아하니 썩 좋은 일인 거 같지는 않은데.

특히나 중소 길드 마크를 달고 있거나 무소속으로 보이는 이들의 표정이 좋지 않다.

난 걸음을 늦춰 천천히 걸어갔고.

“산군 그 개새끼들 지들이 뭔데 포탈을 봉쇄하고 난리야.”

“그 와중에 대형 길드 놈들은 그냥 보내던데.”

“아니. 말이 되냐고. 여기가 뭐 지들 땅이야? 탑이잖아. 아씨. 그냥 들이박아?”

“아서라. 지금 하는 걸 보니까 다른 대형 길드랑 말 맞춘 거 같더만.”

좋지 않은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포탈이 봉쇄됐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은 6층이다.

튜토리얼을 마치고 가장 먼저 올라오는 곳.

당연히 모든 층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아무리 대형 길드라고 하더라도 모든 인원을 통제하는 건 불가능.

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다른 대형 길드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동시에 다른 헌터들의 원성을 받아 내야 하고.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상황.

놈들도 뭔가 확신이 있으니까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데.

‘설마 내가 있다는 걸 눈치챈 건가?’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아무리 그래도 포탈 봉쇄라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저벅저벅

당황스러웠지만 태연하게 발을 옮겼다.

괜히 수상한 티를 내 봤자 의심만 살 테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바로 출발하는 건데.

후회해도 늦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올라가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단 말이지.’

10층에 올라가면 또다시 안전지대가 나온다.

거기도 산군 길드가 관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형 길드에서 나를 노리는 건 똑같을 거다.

이미 난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니까.

“뭐가 됐든 올라가야 해.”

대형 길드가 위협적인 건 사실이나, 그게 무서워서 언제까지고 정체되어 있을 생각은 없다.

100층까지 올라갈 길도 까마득한데 이런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면 어떻게 살아.

그치, 덕춘아?

“으에?”

핥짝.

여관을 나오기 직전, 디저트로 나온 사탕을 핥아 먹던 덕춘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물어본 내가 멍청이구나.

속 편한 녀석, 부럽네.

“안에 들어가서 먹어. 너 너무 눈에 띈다.”

“게에엑.”

난 갑옷 속으로 덕춘이를 넣었다.

사탕에 정신이 팔렸는지 별다른 반항조차 안 한다.

그렇게 맛있나.

쩝. 저거 원래 내 건데.

입맛을 다신 난 포탈로 향했다.

지금부터는 집중해야 한다.

산군 길드를 따돌리고 위로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

“저기인가.”

난 허공을 바라봤다.

6층은 처음이었지만 포탈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우우우우웅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다섯 개의 빛줄기.

[1번 포탈]

[2번 포탈]

.

.

.

그것들은 포탈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으니까.

무려 다섯 개.

가장 사람이 많은 6층답게 포탈도 여러 개 생성되어 있는 모양.

‘산군 길드라고 하더라도 인원은 한정돼 있어. 분명 보안이 허술한 곳이 존재할 거야.’

그 틈을 노린다.

스킬 중에 은신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상점창에서 팔까?

혹시나 싶어서 살펴봤지만.

‘없군.’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아이템 목록이 리셋 되면 뜰지도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포탈 봉쇄.

그다음은 탐문 수색일 게 뻔하니까.

언제까지고 6층에 있는 사람들을 막아 둘 수는 없는 노릇.

어쩌면 지금도 은밀하게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파악

난 6층에 위치한 가장 높은 건물로 향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가까이 다가갈 생각은 없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은 파악할 수 있으니까.

-대애애앵

약 20분 뒤.

난 안전지대에 위치한 시계탑 꼭대기에 오를 수 있었고.

“일단 1번, 3번, 4번은 안 되겠군.”

생각보다 철저하게 봉쇄된 포탈을 보며 얼굴을 구겼다.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몰려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안으로 진입하지 못했다.

대형 길드 소속으로 보이는 이들은 질서 있게 기다리고 있었고.

몇몇 시비를 거는 인물도 보였지만 그대로 제압당해 물러났으며, 몰래 침입하려던 이는 실컷 두들겨 맞고 쫓겨났다.

“2번과 5번도 상황은 비슷한데.”

비교적 외진 곳에 위치한 포탈들도 여의치 않기는 마찬가지.

인원이 부족한지 아예 포탈 자체를 바리케이드로 막아버렸다.

안으로 진입하려면 장애물들을 전부 치워 버려야 할 판.

“무력으로 뚫는 건 애매하고. 몰래 들어가는 건 불가능.”

그나마 지키고 있는 사람이 가장 적은 5번 포탈은 힘으로 뚫을 수 있을 거 같기는 하다.

다만 빠르게 끝내지 못할 경우 인접한 곳에 대기 중이던 이들이 몰려오겠지.

그들까지 상대하는 건.

음.

모르겠다.

“아직 내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이 안 됐어.”

3성급 몬스터를 잡기는 했지만 열화판에 디버프를 먹은 놈이었고 무엇보다 단일 개체였다.

다수를 상대하는 것과 같게 볼 수는 없다는 것.

두 개의 S급 권능 역시 전투용은 아니었고.

공격 스킬은 파이어밤이 전부다.

마력이 남들보다 월등하게 높기는 한데, 결국에는 바닥을 보일 게 분명하고.

여러모로 난감한 상황.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존버인가.”

저들이 통제력을 잃는 순간까지 기다리는 거다.

언제까지고 포탈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대형 길드 전체가 움직인다면 모를까 산군 길드 하나로는 역부족.

결국에는 다른 이들에게 포탈을 개방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놈들이 그동안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건데.”

6층 전체를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찾아내려 할 거다.

한정된 공간.

성난 사람들.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산군 길드원.

최대한 숨는다 하더라도 안 들킬 수 있을까?

난 잠시 고민했고.

-구구구구구궁!

“음?”

느닷없이 들려온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 * *

6층 포탈.

현재 이곳은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포탈을 둘러싸듯 모인 사람들.

그들은 저마다 욕설을 뱉어 내고 있었고, 포탈을 지키고 선 산군 길드원들은 진땀을 빼며 통제하고 있었다.

“다들 잠시만 통제에 따라 주십시오!”

“거기! 몰래 들어가시지 마시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 몰래 들어가려던 사람이 잡혀 나오고, 뭐라 뭐라 소리치던 이가 침을 뱉으며 사라진다.

이제 막 위로 올라가려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답답하기만한 상황.

그럼에도 그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돌발 행동 및 비협조적 언행은 처벌 대상이다.”

6층을 관리하는 처리관 오지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머리 위로 떠 있는 살인자 칭호.

안전지대에서 사람을 죽인 자들에게 주어지는 페널티였고, 그것과 관련된 퀘스트도 존재했지만.

“통제에 따르도록.”

-쿠우우웅!

감히 덤빌 사람은 없었다.

오지혁으로부터 쏟아지는 기세.

“크흠!”

“빌어먹을.”

과연 같은 6층에 머무는 자가 맞을까 싶을 정도의 격차.

성나 있던 이들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난다.

그중에는 9층까지 올랐다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었으니, 오지혁의 강함이 일반적인 수준을 넘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애초에 처리관이라는 직책 자체가 그런 거였다.

루키를 제외한 가장 강한 길드원이 차지하는.

동시에.

“저놈 지금까지 처벌한 놈이 몇 명이었지?”

“몰라. 대충 열 명은 넘을걸.”

살인자는 일정 확률로 살해 대상의 스킬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다.

못해도 열 명.

그렇다는 건 못해도 그에게 세 개 이상의 스킬이 있다는 거였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스킬을 가지고 있는 초보자들에게는 넘볼 수 없는 강자.

“아니. 지들이 뭔데 올라가라 마라야.”

“산군놈들, 정신 나갔네.”

“재수없는 새끼. 퉤!”

결국 올라가기를 포기한 이들이 자리를 떴다.

대부분이 무소속이거나 중소 길드 소속들.

대형 길드에 속한 이들은 투덜거릴지언정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신분은 확실했으니까.

절차만 거친다면 포탈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뭔 일인데 위에서 이러는 건데.”

“몰라. 빌런이라도 들어왔나 보지.”

“저번처럼 감옥에 있던 놈이 들어온 거 아니야?”

“아, 그 연쇄 살인범? 하긴 그런 새끼들은 헌터 되면 안 되지.”

그들 역시 자세한 내막은 모르는지라 추측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름 신빙성 있는 말이었다.

한국은 강력 범죄자가 헌터가 되는 것을 엄격하게 막았으니까.

그런 이들이 위로 향하지 못하게 처단하는 것 역시 처리관의 역할이었다.

‘귀찮군.’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든 대치 속, 오지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하루.

아직 김정수를 찾지 못했다.

지금이야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기간이 늘어날수록 반발이 거세질 게 당연.

포탈 봉쇄는 길어 봐야 이틀이 한계였다.

오지혁은 나이프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놈은 어디에 있을까.

김정수라는 사람이 쁘띠공듀가 맞을까?

쁘띠공듀 그는 혼자 움직이는 자일까, 아니면 단체로 움직이는 놈일까.

무소속? 확실한가? 대형 길드 출신이면서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아니다. 대형 길드 출신 중에 그런 놈이 있었다면 사냥개한테 이미 죽었을 거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고민은 길어져 갔고.

“처리관님, 10층에도 연락 넣었습니다. 소속 불명인 김정수라는 사람 올라오면 잡으라고 말입니다.”

“그래.”

길드원이 보고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어차피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했다.

소속 불명의 헌터 확인 및 처리.

쁘띠공듀의 정체를 알 수 없다면 수상한 자들을 모조리 죽이면 된다.

그게 상부의 판단이었고 오지혁 역시 어느 정도 수긍했다.

‘정말로 모두 죽일 수는 없지만.’

아무리 그라도 그렇게까지 정신 나간 인물은 아니었다.

일단은 김정수라는 자부터 찾아 심문하자.

반항하면 처리하고.

그렇게 생각을 마친 오지혁이 행동에 나섰다.

“지금부터 포탈을 시작으로 모든 이의 신원을 확인한다. 광장은 폐쇄하고 가이드북 활성화를 금지시켜.”

“알겠습니다. 그럼 처리관님은?”

“난 지금부터 안전지대 전역을 돈다.”

-철컥

오지혁이 품에서 신호탄을 꺼냈다.

“신호 받으면 5분대기조는 내게로 모인다. 이상. 임무 실시.”

“실시!”

그의 명령에 수색조로 차출된 길드원들이 뛰쳐나가는 타이밍에.

-구구구구궁!

저 멀리, 광장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쁘띠공듀인가!’

오지혁이 사납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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