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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23화 (23/740)

23화 갇히다

약 한 시간의 쇼핑 후.

난 어느 정도 장비를 맞출 수 있었다.

아쉽게도 세트 아이템은 못 찾았다. 나중에 상점창 목록이 갱신되면 다시 찾아봐야지.

“결국 창도 팔았네.”

발광석도 2개만 남기도 전부 정리했다.

생각보다 장비를 맞추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다.

포션도 몇 개 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난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봤다.

평범하지만 튼튼한 롱소드.

힘 스텟을 +5 해 주는 걸 제외하면 특별할 건 없다.

적당히 무난한 옵션. 현재 내 상점창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 등급인 D급 아이템이었다.

[잔여 포인트: 530포인트]

“어째 다시 빈털터리가 된 기분인데.”

비상금으로 조금 남겨 두기는 했지만 홀쭉해진 잔액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꽤 괜찮은데.”

난 방 한쪽에 놓인 거울에 몸을 비추며 자세를 잡아 봤다.

기동성 있는 흉갑에 건틀릿. 롱소드.

파우치에는 각종 포션과 해독제가 들어가 있다.

기타 잡다한 물건들도 있고. 이제야 좀 폼이 난다. 진짜 헌터가 된 기분.

대체로 만족스러운 쇼핑이었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철컥

평소에는 목걸이 형태로 놔둘 수 있는 투구 아티팩트였다.

눈만 남기고 머리를 완전히 가려 버려 신분을 감추기 좋은 물건.

갑옷 다음으로 비싼 몸이시다.

풀 세팅을 하니 마음이 한층 놓인다.

이제 어이없게 죽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상점창-O]

“자, 그럼.”

난 한껏 미소를 지으며 가이드북을 올려다봤다.

상점창 교육도 끝났으니 남은 건 하나.

각성이다.

[축하합니다!]

[모든 시스템 서비스 교육을 완료하셨습니다.]

[500포인트가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각성이 진행됩니다.]

드디어 왔다.

헌터들이 가장 고대하는 순간.

과연 어떤 권능을 얻게 될까.

난 잔뜩 기대했고.

[튜토리얼 점수를 기반으로 스테이터스가 상승됩니다!]

[놀라운 성과!]

[스테이터스가 급격히 상승합니다!]

-꾸득, 우드드득!

“어?”

알림과 함께 몸이 부풀어오르며 뼈가 비틀리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통증에 난 비명을 내질렀다.

강제로 몸이 재조립되는 기분.

신경이 꼬였다 풀리고 뼈대가 다시 맞춰졌으며 근육이 더욱 오밀조밀해졌다.

뜨겁다 아니, 짜릿하다!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리고, 혀가 마비되어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고블린한테 옆구리를 찔렸을 때도, 코볼트가 쏜 볼트에 맞았을 때도 이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입 밖으로 거품이 새어 나온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그때.

-솨아아아아!

거짓말처럼 통증이 가셨고.

눈앞으로 스테이터스창이 떠올랐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까지 겪은 죽을 듯이 괴로웠던 건 이미 잊혔다.

왜냐.

[조현수 (최대 공략층-6층)]

-힘 5 →12

-민첩 7 →16

-체력 6 →18

-마력 5 →11

말도 안 되게 강화된 신체 정보가 나를 반겼으니까.

미쳤다.

모든 스텟이 두 배 이상으로 뛰었다.

각성 한 번만으로 이룬 쾌거라기에는 말이 안 되는 수준.

“마력까지 올랐다고?”

각성을 통해 마력이 오른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맨 처음에 받은 마력이 전부라고 했는데.

“나야 좋지!”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이유가 어찌 됐든 나한테는 이득이니까.

각성했기 때문일까 몸은 가벼웠고 피로감은 전혀 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흘려 댄 침이 찝찝하기는 한데 이거야 닦으면 되고.

난 주먹을 움켜 쥔 채 알림창을 바라봤다.

정말 중요한 게 남아 있다.

[각성 완료!]

[새로운 도전자에게는 새로운 능력을.]

[랜덤 권능 박스가 지급됩니다!]

이거다.

모든 헌터들은 각성을 하면서 권능을 받는다.

뭐가 걸릴지는 모른다. 말 그대로 랜덤이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난 두 개의 권능을 가지게 될 거라는 것.”

과연 어떤 게 나올 것인가.

난 두 손을 꼭 잡으며 마음을 비웠다.

욕심 안 부릴 테니 그냥 평타만 치게 해 주세…….

“…평타는 개뿔! 최대한 좋은 거 걸리게 해 주세요.”

그래. 그냥 솔직해지자.

전 욕심 그득한 세속주의자입니다. 양심도 없어요.

아주 좋은 거. 누가 봐도 사기라고 말할 만한 능력으로 주십시오.

난 눈 딱 감고 기도를 올렸고.

-파아아아앗!

엉뚱한 곳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의 근원지는 바로 내 가방.

“뭐, 뭔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운 것도 잠시.

가방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들린 건가.

기묘한 광경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고.

-우우우우웅!

-파앗!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배낭이 열리더니 낯익은 물건들이 천장으로 솟구쳤다.

튜토리얼을 오르면서 모아 왔던 물건들.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설명만 있던 것들이 각자의 빛을 내뿜으며 허공을 맴돈다.

[히든 피스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정화된 놀의 왼손 약지 손톱]

[망가진 장치 기관 태엽]

[퍼렁 나무]

[어인 전사의 목걸이]

[랜덤 권능 박스]

-구우우우우웅!

무거운 울림이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느껴지는 기운이 범상치 않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합쳐졌어?”

난 눈을 부릅떴다.

허공에서 부유하던 것들이 물에 떨어트린 잉크처럼 서로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권능 박스에 스며들었다.

거무튀튀했던 박스의 색깔이 현란해진다.

[축하합니다!]

[랜덤 권능 박스가 최상급 랜덤 권능 박스로 승격됩니다!]

“최상급 권능 박스?”

권능 박스에도 등급이 있던 건가?

저건 등급이 없는 거로 아는데.

[최초로 최상급 권능 박스를 획득했습니다.]

[5,000포인트 획득.]

“이런 미친.”

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알림창을 보니 알겠다.

모두 동일하다고 여겨졌던 권능 박스도 등급이 있었다.

그동안 모두가 같은 것만 받아서 몰랐을 뿐.

뭐가 됐든 내게는 이득이다.

박스도 박스지만.

“5,000포인트라니.”

보상으로 준 포인트가 너무 달았다.

당장 여관에서 하룻밤 자는 데 10포인트다.

E급 장비를 하나에 평균 700포인트고.

E급 스킬북 하나에 2,000포인트.

5,000포인트면.

“E급 스킬북을 두 개 사고도 남는 돈이군.”

C급은 무리다. 거기서부터는 가격이 엄청 뛰거든.

뭐, 그렇다 하더라도 말이 안 되는 수치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것도 이제 막 튜토리얼을 마친 새내기 헌터가 가지고 있기에는.

난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포인트도 놀랍긴 하지만.

-꿀꺽

내게는 메인 이벤트라 볼 수 있는 최상급 권능 박스가 남아 있다.

영롱하게 빛나는 박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심장이 거세게 뛴다.

얼굴이 뜨겁다, 숨도 좀 거칠어진 것 같고. 흥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

행복해서 죽을 거 같다.

그동안 굴렀던 것들이 이렇게 보상으로 돌아오는구나.

난 눈을 질끈 감으며 권능 박스에 손을 얹었고.

“대박 나자, 현수야!”

힘껏 열어재꼈다.

쏟아지는 빛.

울려 퍼지는 팡파르.

-빰빠라밤!

[축하합니다!]

[S급 권능, 스킬 합성을 획득합니다.]

“우오아아아아아아!”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환호성을 질렀다.

S급 권능이다. S급 권능!

말도 안 되는 사기적인 능력이 내게 두 개나 깃들었다.

세상 어디에도 들어 본 적 없는 행운아.

그게 바로 나였다!

-쾅! 쾅!

-아! 좀 조용히 합시다!

너무 소리를 질렀나.

옆방에서 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뜬금 없는 소란에 잠에서 깬 모양.

죄송합니다. 너무 흥분해서.

난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고.

“와아아아아아!”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안 되겠다. 주체가 안 된다.

내가 이 나이 먹고 이럴 줄은 몰랐는데.

사람이 너무나 큰 행운이 찾아오면 표현할 방법이 없어 소리를 지르게 된다.

아. 눈물이 날 거 같다.

이미 흘리고 있나.

-미친놈아!

-쾅!

옆방 사람이 욕설을 뱉고는 벽을 친다.

그래. 그래. 진정해야지.

“흐흐. 으흐흐흐!”

입을 감싸는데도 웃음이 새어 나온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게으으으으. 퉤.”

못 볼 걸 봤다는 걸까.

눈살을 찌푸리던 덕춘이가 침을 뱉는다.

얜 왜 자꾸 침을 뱉지.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주인을 벌레 보듯 하는 눈초리가 매력이라면 매력인데.

“게에엑.”

“응? 왜. 밥 달라고?”

“겍. 개굴.”

입가를 씰룩이며 고개를 흔들던 덕춘이가 혓바닥으로 위를 가리킨다.

뭐가 더 남았나?

시선을 돌리자 허공에 떠 있던 알림창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직, 지지지직

아니. 사라지는 걸 떠나서 스파크와 함께 흔들린다.

여태까지 본 적 없던 현상.

난 덕춘을 끌어안고 뒤로 몸을 뺐다.

“저, 저거 왜 저래.”

설마 갑자기 폭발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알림창이 터진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또 모르니까.

여차하면 창문으로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와중.

[전 서버 최초로 두 개의 권능을 획득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돌연 흔들림을 멈춘 알림창이 문장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만 보면 다행인데.

“색이 바뀌었어.”

테두리와 글자가 검붉은 빛으로 변한 모습은 상당히 괴기스러웠다.

마치 경고하는 듯한 모습.

“게에에에엑.”

덕춘이 역시 낮게 울며 몸집을 부풀렸다.

얘도 긴장한 건가. 가만히 등을 쓸어내리는데.

[덕춘(카오스 개구리)이 혼돈 에너지의 개입에 경계합니다.]

권능이 발현됐다.

혼돈 에너지? 알림창이 저렇게 돼 버린 게 그거 때문인가.

덕춘이도 혼돈 에너지인가 뭐나 하는 것에 노출됐던 걸까.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알겠다.

‘정신 똑바로 차리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알림창이 말하듯 처음 일어난 일.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짐작조차 안 간다.

그렇게 온몸의 감각에 날을 세우며 알림창을 노려볼 때.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알림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새로운 길의 개척!]

[히든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히든 퀘스트?

고작 6층인데 히든 퀘스트가 발생한다고?

특별한 조건이 맞물려야만 발생될 뿐더러 한 번 발생하면 언제 다시 생성될지 모르는 것.

그만큼 난이도가 높지만 깼을 때의 보상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다.

내가 1층에서 겪었던 유일 퀘스트와 여러모로 비슷한 것.

[강대한 힘에는 그만한 책임을.]

[도전하는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을.]

[조현수 님(도전자)의 코인을 조회합니다.]

-띠리리리리링

허공에 생성된 홀로그램. 네모난 칸이 나열되어 있었으며 그곳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빠르게 돌아가며 모습을 바꾸는 룰렛.

-철컥, 척!

숫자 칸이 멈추며 하나씩 자리를 찾아간다.

난 침을 삼켰다. 코인이다.

탑에 오른 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잘 봐 두자. 자기 목숨이 몇 개인지는 알고 있어야지.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에 집중했다.

-띠링!

[코인×3]

“세 개?”

분명 두 번 죽었을 텐데 세 개라고?

그럼 난 코인 다섯 개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알림창은 날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도전자의 특권! 조현수 님의 코인이 증가합니다!]

-촤르르르르륵!

다시금 룰렛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코인이 증가된다? 믿기지 않았다. 마력과 같이 코인도 타고나는 거라고 들었는데.

어쩌면 혼돈 에너지의 영향일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마력도 늘어났었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나쁘지는 않다.

코인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니까.

룰렛이 멈추기 시작한다.

-찰칵, 착, 착

뒷자리 수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는 숫자.

난 눈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일십백천만…….

“응?”

왜 자꾸 올라가지?

난 서서히 입을 벌렸고.

-차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마지막 칸이 떠올랐을 때는.

“이, 이게 무슨!”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코인: 999,999,999×∞]

[조현수 님의 코인은 무한입니다.]

[히든 퀘스트]

-탑을 오르세요.

-보상 (???)

[Tip. 탑은 100층까지 존재합니다.]

뒤이어 떠오른 심플한 퀘스트 내용.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어차피 탑은 오를 거다.

어정쩡한 실력을 가지고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다른 S급 헌터처럼 유명세도 타고 돈도 쓸어 모으고 잘난 인생을 살고 싶다.

그런 내게 무한 코인을 줬다?

“무조건 끝까지 가는 거지.”

흐흐흐.

웃음을 흘린 난 주먹을 쥐었다.

알림창이 이상하게 변하고 혼돈 에너지니 뭐니가 개입했다는 말에 괜히 쫄아 있었다.

이건 기회고 축복이다.

어쩌면 내가 받은 두 개의 권능보다 더 대단한!

“게에에에엑! 게으으으아아아!”

“그래! 덕춘아. 너도 좋지?”

난 껴안고 있던 덕춘이를 둥개둥개 했고.

-철퍽!

“게에에에에흑!”

덕춘이는 내 뺨을 때렸다.

이놈의 개구리가 진짜.

왜 허구한 날 시비지.

한번 확실히 말해 줘야겠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야야. 코인이 무한이라니까? 얼마든지 도전할 수 있다고. 엄청난 기회……!”

어?

잠깐만.

코인이 무한이다?

순간 쎄한 기분이 들었다.

탑을 나서는 방법은 총 두 가지.

100층을 클리어하거나.

코인을 다 써 버려서 탑 바깥으로 퇴출당하거나.

사실상 방법이 하나라고 해도 무방했다.

지금까지 100층을 클리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 날고 긴다는 S급 헌터들도 60층대가 고작.

그들은 말했다.

자신에게 기회가 얼마나 있었든 간에 포기했을 거라고. 60층 이상의 층은 말도 안 되는 난이도라고.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층까지 올랐다는 미국의 S급 헌터, 데미 다이얼은 코인이 남아 있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탑 밖으로 나왔다.

“하, 하하.”

이제야 알겠다.

저 히든 퀘스트가 어떤 의미인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얼마나 많이 죽든. 난이도가 미쳤더라도 난…….

“100층까지 깨야 집에 갈 수 있네?”

“게에에…….”

덕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알겠다. 왜 덕춘이가 그렇게 울부짖었는지.

내가 밖으로 못 나간다는 건 얘도 못 나간다는 거였으니까.

“어쩐지 운수가 좋더라니.”

졸지에 탑에 갇히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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