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가이드북
난 속으로 경악했다.
지금 바로 먹으라고?
“세이퍼 정책이 강화된 모양이네요. 그냥 넘어가 드리고 싶지만, 저도 말단이라서요.”
멋쩍게 웃으며 부탁하는 김성훈.
아니다. 갑자기 정책이 강화될 리가 없다.
국가 정책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분명 말했지. 산군 길드에서 협조 요청이 있었다고.
‘역시 내가 이곳에 올 걸 예측하고 있었어.’
곤란한데.
당연한 말이지만 난 백환을 먹을 생각이 없다.
그렇다고 안 먹고 버티면 의심만 사겠지.
대형 길드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내 정보가 넘어갈 수도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이 팔리는 건 문제가 크다.
인벤토리에 자리가 있었으면 몰래 넣으면 되는 건데.
괜히 아케인 젬을 넣어 가지고.
‘방법이 없나? 방법이.’
아!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요. 이해합니다.”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백환을 집어 들었다.
인벤토리에 숨길 수도 진짜 먹을 수도 없다.
내가 마술사도 아니고 감쪽같이 백환을 사라지게 할 수도 없고.
결국 먹긴 먹어야 한다는 뜻.
다만.
‘부탁한다, 덕춘아.’
굳이 내가 먹을 필요가 있나?
난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먹는 시늉을 했고.
“게? 엑!”
그대로 하품을 하고 있는 덕춘이의 입에 백환을 넣어 줬다.
반사적으로 꿀꺽 삼키는 두꺼비 아니, 영물 개구리.
역시 영물이다. 곤란한 상황을 바로 해결해 주다니.
난 속으로 웃었다.
‘튜토리얼 구간 일부 기억 삭제?’
그거야 나 같은 신규 헌터한테나 통하는 거고.
덕춘이는 5층 막바지에 만났으니 페널티가 없다.
개구리한테 먹여도 되는가 싶기는 하지만 영물이니까 괜찮겠지 뭐.
“개, 개굴! 그에에!”
다행히 덕춘이도 좋아하는 거 같다.
캣잎 먹은 고양이처럼 흥분해서 팔딱거리는 건 물론이요, 눈은 똘망똘망하다 못해 안광이 쏘아져 나왔으니.
감동한 듯 내 어깨를 꽉 움켜쥐기까지.
어?
잠깐만. 너무 아픈데?
심상치 않은 덕춘이의 반응에 난 살짝 몸을 굳혔고.
“그에에에엑!”
부르르 몸을 떨던 덕춘이가 돌연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나조차도 깜짝 놀랄만한 성량.
그보다 놀라운 건.
[백환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덕춘(카오스 개구리)의 새로운 특성이 개방됩니다!]
-회복 (F)
하늘에 떠오르는 알림이었다.
왓 더?
특성? 저거 일종의 스킬 같은 거 아닌가.
아니, 뭔 백환 하나 먹었다고 스킬이 생겨?
[덕춘(카오스 개구리-E)]
-특성: 산성 (C), 회복 (F)
-핥아지면 기분이 좋을지도?
핥아지는 취향 없습니다.
그보다 회복이라.
‘굉장한데?’
마땅한 병원도 한의원도 없는 곳이 탑이다.
그런 주제에 온갖 부상의 위협과 독, 디버프가 만연하고.
헌터들은 상점창에서 파는 포션에 의지해 상처를 치유한다.
딱 하나. 예외가 있다면 힐러.
그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고칠 수 있었다.
‘수는 적고 수요는 많고. 귀족이나 다를 바 없지.’
강력한 전투력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눈먼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면 그걸로 끝인데.
탱커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전투의 지속력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존재. 그게 힐러다.
“그에에엑!”
저 우렁찬 울음을 보라!
얼마나 믿음직스러운가.
‘어떻게 진화할지 모른다더니 이런 뜻이었나?’
주어진 환경, 먹이, 행동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것 같다.
놀라운 결과다. 당장이라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참자.
사람이 너무 많다. 옆에 김성훈이 있기도 하고.
난 과장되게 팔을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
“어우. 백환을 먹으니까 컨디션이 좋아지네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하하!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두꺼비가 귀엽네요. 어디서 얻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오다 주웠습니다.”
내 반응에 뿌듯함을 느꼈는지 김성훈이 활짝 웃는다.
다행히 백환을 먹인 걸 들키진 않은 모양.
“그럼 확인도 했으니 저는 세이퍼의 본분을 하기 위해 가 보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김정수입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대충 지어 낸 이름을 뱉자 커뮤니티에 뭔가를 적은 김성훈이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후우.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그럼 이제.
“튀자.”
난 빠르게 발을 옮겼다.
길드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있기도 싫었고 무엇보다.
‘백환에 대한 정보를 알려야 해.’
이 모든 일은 백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백환의 사용을 막아야 진실을 아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물론 무작정 막을 수는 없었다.
내 말을 믿어 줄지도 의문이지만.
‘진실을 밝히더라도 급한 사람은 쓰게 돼 있어. 특히 튜토리얼을 오르는 세이퍼는.’
당장 급하면 독인 줄 알더라도 먹어야지.
나 같아도 목숨이 위험하면 일단 먹고 볼 테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진실을 숨겨 둘 생각은 전혀 없다.
* * *
“후우. 드디어 빠져나왔네.”
길을 몰라 헤매기는 했지만 무사히 광장에서 벗어났다.
중간에 산군 길드를 마주치는 헤프닝도 있었지만 청룡 길드의 김성훈한테 백환을 받아 먹었다고 하니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형 길드 순위 3위에 빛나는 청룡 길드다.
어느 정도 공신력이 있다는 것.
“산군 녀석들, 설마 광장 안이 아니라 출구 쪽에서 대기하고 있을 줄이야.”
생각보다 치밀한 놈들이었다.
김성훈을 먼저 만나서 다행이다.
계속해서 긴장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동안 누적된 피로감 때문일까. 몸이 축 처진다.
“숙소부터 찾자.”
휴식도 휴식이고, 지금은 산군 길드가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다.
그나마 6층은 안전지대기라도 하지 위에는 어떨지 모른다.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무력으로 대응할지도 모르니까.
너무 과한 생각일까?
글쎄. 이렇게 치밀하고 잔인한 판을 깔아 둔 놈들이 무슨 짓을 못 할까.
상식적인 반응을 기대하지 말자.
당장 지금도 그렇다.
공고문 하나로 6층 광장에 나타난 사람 전체를 검사하고 있었으니.
하위층인 탓도 있겠지만 대형 길드의 영향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정비도 해야 하고.”
지금은 개인 정비가 반드시 필요했다.
아직 가이드북을 펼치지도 못했다.
커뮤니티에 5층 공략과 6층의 상황을 올려 공헌도 점수도 쌓아야 했고.
난 다행히 사람이 적고 외진 곳에 위치한 여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끼이이익
사람의 손길이 거치지 않았는지 거슬리는 소음을 내는 문.
제대로 환기되지 않은 홀은 비어 있었다.
[6층 안전지대의 편의시설은 무인으로 운영됩니다.]
주인 대신 날 반기는 알림창.
[숙박하시겠습니까?]
[1박 10포인트]
“이틀치로 계산해 줘.”
[2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차르릉
동전 소리와 함께 포인트가 빠져나갔다.
사실 하루면 충분할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리 비싼 편도 아니고.
-짤랑
계산과 함께 허공에서 열쇠가 떨어졌다.
302호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여길 사용하면 될 듯하고.
“그럼 좀 쉬어 볼까.”
난 위로 향했다.
다른 손님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귀를 기울였지만 어수선한 느낌은 들지 않았고.
-드르렁, 푸우
미약하게 코 고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바로 옆방인 301호인 게 좀 걸렸지만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다른 방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탁
방문을 열자 심플하고 깨끗한 방이 나왔다.
작은 창문. 목조 테이블과 의자 하나씩.
냉장고야 당연히 없었고,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만 존재감을 내뿜었다.
난 슬쩍 매트리스를 눌렀고.
“오오! 이 푹신함!”
감동했다.
그래. 이게 사람 자는 곳이지.
마음 같아서는 바로 눕고 싶었지만 꼴이 말이 아니라 그만뒀다.
대신.
“씻자!”
“게엑!”
방 한쪽에 마련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도 여관이라고 샤워 시설과 양변기는 마련되어 있어 다행.
난 배낭과 옷을 벗어 던지고 샤워기를 틀었다.
-쏴아아아!
수증기와 함께 뜨신 물이 쏟아진다.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은 기분.
볼을 타고 눈물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흘러내렸다.
“…이게 행복이란 건가.”
진짜 씻고 싶었다.
양치도 제대로 못 하고 피, 땀, 눈물, 콧물 할 거 없이 범벅을 하고 다녔었는데.
몸도 녹이고 거품칠도 하고. 떡 진 머리도 박박 감을 거다.
“궤에에! 게엑!”
영물이라 한들 덕춘이도 개구리인 건 어쩔 수 없는지 물을 맞으며 좋다고 팔짝거렸다.
“그엑? 으그에에엑!”
물론 그 반응은 내 몸에서 나오는 땟구정물을 보고는 바로 바뀌었지만.
* * *
“후아. 살 것 같다.”
“그으으에.”
무려 한 시간 동안 샤워를 한 난 침대에 발라당 누웠다.
아. 씻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개구리 주제에 배를 보이고 자빠진 덕춘이도 늘어진 소리를 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잠들고 싶지만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내게는 할 일이 있었으니까.
“각성. 그리고 공략 올리기.”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해야 했다.
내가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니까.
난 배낭에서 가이드북을 꺼내 던졌다.
“가이드북 오픈.”
[시스템 서비스를 순차적으로 해방합니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모든 교육을 끝마친 후 코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난 놓치는 것이 없도록 집중했다.
시스템 서비스 교육을 받아야 각성이 진행되니까.
그토록 알고 싶던 코인의 개수도 알 수 있고.
어디 보자. 완전히 활성화된 시스템 서비스 그 첫 번째는.
[커뮤니티 제한이 풀립니다!]
[개인 메시지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상점에서 구매 가능]
“오호라.”
커뮤니티를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거였다.
층의 제한 없이 다른 곳도 둘러볼 수 있다는 이야기.
상위층 채널에는 뭐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좀 더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추가된 게 또.
“개인 메시지라.”
포인트를 주고 사야 한다는 게 걸리기는 하지만 나쁘지는 않다.
급할 때나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 사용하면 좋을 듯하니.
당장은 쓸 일이 없으니 찬찬히 하도록 하고 일단은 공략부터 쓰자.
[쁘띠공듀]: 여러분 모두 안녕! 쁘띠공듀가 왔어요. 샤랄라라라~~☆
다들 튜토리얼은 잘 오르고 있나요? 오늘은 5층 공략법과 6층에 대해서 알아볼 거예요.
귀가 쫑긋해지죠? 언제나 유용한 정보를 가져오는 쁘띠공듀한테 잘하란 말이에요. 엣헴.
그럼 먼저 5층에 대해…….
다리털 숭숭 나서 발랄한 글을 쓰자니 고역이었지만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자괴감도 줄었다. 어쩌면 뻔뻔함이 는 걸지도 모르겠고.
난 빠르게 공략법을 써 내려갔다.
“끄읕!”
대략 10분 정도 지났나.
공략글을 작성할 수 있었다.
6층에 올라오면 저절로 회복되니 백환을 먹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먹으면 기억 일부가 삭제된다는 것도.
해 줄 말은 다 했으니 나머지는 알아서들 잘하겠지.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믿을지 안 믿을지, 내 말을 따를지 안 따를지는 개인의 몫이고.
“이 짓도 하다 보니 익숙해지네. 나중에 탑에서 벗어나면 블로그나 해 볼까.”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헌터 생활도 하고 블로그도 하고.
어쩌면 뷰트뷰를 할지도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탑에서 나간 다음에.
꽤 긴 시간이 흐른 뒤일 거다.
난 그저 그런 헌터가 될 생각이 없으니까.
남들보다 높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고 싶다.
[커뮤니티 확인-O]
공략글을 끝으로 커뮤니티를 끄자 가이드북이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다음은 뭐냐.
난 빠르게 내용을 살폈고 눈이 번쩍 떠졌다.
기다리고 있던 것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