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탑에 갇혀 고인물-20화 (20/740)

20화 백환

고대하고 고대하던 6층에 도착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다.

광장이라도 되는 걸까. 넓은 공간에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데.

“여기! 파이닉 길드 소속이신 분!”

“자자, 튜토리얼 클리어한 사람은 이쪽으로 오세요!”

“정부 쪽 생존자 있습니까!”

각 길드의 마크를 달고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소속 길드원을 찾고 있었다.

난 식은땀을 흘렸다.

‘큰일 날 뻔했다.’

이렇게 튜토리얼 생존자들이 한곳에 떨어질 줄은 몰랐으니까.

산군 길드가 주시하고 있는 상황.

대략적으로나마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을 거다.

내가 올린 공략글은 튜토리얼 구간밖에 없으니까.

만약 내가 가장 먼저 여기에 도착했다면?

‘대기 중이었던 산군 길드가 바로 달려들었겠지.’

협조 요청을 핑계로 내 신원을 확인하려고 했을 거다.

그래서 의외다.

분명히 나 스스로 상위권이라고 자부했는데.

나 말고도 튜토리얼을 통과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고?

설마 길드원이나 정부 소속인 사람 전원한테 진짜 공략법을 알려 준 건가?

‘아니야. 그렇게 했으면 언론을 통제할 수 없어.’

아무리 권력이 강하다지만 익명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글까지 완벽하게 차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모르겠다. 일단 알아낼 수 있는 정보부터 수집하자.

난 위를 올려다봤다.

6층을 알리는 알림창과 권능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정보들.

[6층]

-안전지대

-모든 부상이 서서히 회복됩니다.

-PK 금지. (살인 시 살인자 표식이 생성됩니다.)

여긴 회복 효과도 있었구나.

어쩐지 어인 전사한테 당한 곳이 편안해졌다 했더니.

빠르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게 느껴졌다.

잘된 일이다. 포인트로 포션부터 사야 하나 했는데.

[가이드북이 지급됩니다.]

다친 부위를 만지며 상태를 확인하고 있던 찰나 하늘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가이드북.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책.

중요한 아이템이다.

그동안 막혀 있던 시스템 서비스를 해금하는 열쇠니까.

난 가이드북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나중에 사람들 없는 곳에서 열어야지.

괜히 여기서 펼쳤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하면 곤란해진다.

잠깐만. 소매치기?

불안감을 느낀 난 곧장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오픈.]

[중급 아케인 젬을 넣으시겠습니까?]

“예.”

내가 가진 물건 중 가장 비싼 거.

원래는 유동적으로 쓰려고 인벤토리를 비워 뒀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예상외로 6층에 사람이 너무 많다.

인간 불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만, 분명 이 중에 누군가는 막 안전지대로 올라온 새내기를 등쳐 먹으려 할 거다.

‘탑 밖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격변을 겪으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 놈들이 널리고 널렸다.

단순히 재미를 위해 그러는 놈도 많고.

당장 내가 짐꾼 노릇을 할 때 받던 처우만 봐도 그러했다.

-툭툭

막 아케인 젬을 인벤토리에 넣었을 때, 누군가가 날 건드렸다.

설마 본 건가? 최대한 안 들키려고 가방 안에서 인벤토리를 열었는데.

상황에 따라서는 전투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로 고개를 돌렸고.

“저기, 음. 이제 튜토리얼 완료하신 건가요?”

살짝 마른 체구에 유약해 보이는 얼굴의 사내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약간은 긴장을 풀렸다. 단순히 인상이 유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꼴을 보아하니 나처럼 막 튜토리얼을 통과한 사람 같아서 그랬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 예. 지금 막 올라왔습니다.”

난 경계심을 유지한 채 대답을 했다.

거짓말을 할까 고민했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어설픈 거짓말은 독이다.

지금 내 모습으로 아니라고 해 봤자 의심만 더 생길 거고.

그에게 집중했기 때문일까.

[김성훈]

-최고 층수 6층.

-청룡 길드 소속.

-낯가림 중.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발휘됐다.

이거 사람한테도 사용할 수 있는 거였나?

탑에 오르고 사람을 처음 보는 거라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나저나 청룡 길드라.

‘생긴 거랑 달리 한가락 하나 본데.’

청룡 길드는 대형 길드다.

자그마치 전체 순위 3위에 빛나는 곳.

대형 길드라는 것이 걸리기는 했지만 권능에 따르면 적의를 가지고 접근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혹시 대형 길드나 정부 소속인 건. 아, 아니시겠구나. 주머니가 없는 걸 보니.”

살짝 얼떨떨한 사이, 혼자 중얼거리던 김성훈이 주머니에서 하얀 구체를 꺼내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청룡 길드원 김성훈이라고 합니다. 세이퍼예요. 들어 보셨죠? 정부, 길드 연계 복지 정책.”

난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아시겠지만 백환白丸이라고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좋은 치료제예요. 비교적 멀쩡한 거 같기는 한데 혹시 모르니까요. 하하.”

“감사합니다.”

난 일단 그가 내민 백환을 받았다.

정부, 길드 합작 복지 정책. 세이퍼.

내용은 간단하다.

협력 업체로 선정된 길드와 정부 기관에 소속된 예비 헌터들은 세이퍼로 지정된다.

그들은 평소 백환 주머니를 가진 채 생활하다가 탑의 부름을 받으면 탑을 오른다.

그렇게 튜토리얼을 마치고 6층 안전지대에 도착하면 다른 생존자한테 백환을 나눠 주는 거고.

어떻게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의외로 성공한 정책이었다.

‘세이퍼는 생존율이 높거든.’

다른 이유는 없다. 백환이라는 최상급 회복제를 들고 시작하기 때문.

단 한 번이라지만 그 효과는 절단된 신체도 붙일 수 있다고 한다.

대충 여벌의 목숨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지.

한 번밖에 효과가 없으니 중간에 가로채거나 숨길 이유도 없다.

여러모로 깔끔한 방법이라 많은 지지를 받았었는데.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백환]

-일 회에 한해 최상급 포션과 같은 효과.

-주의!

-망각의 주술이 걸려 있습니다. (튜토리얼 구간 기억 일부 수정-강제)

권능을 통해 드러난 정보.

난 주먹에 힘을 줬다.

이제 알겠다.

어째서 사람들이 진짜 공략법에 적대적이었는지.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야. 백환 때문에 기억이 조작돼서.’

공략법에 달린 댓글 몇 개가 떠올랐다.

-[이용_산군]: ㄴㄴ 3층 함정 저렇게 안 빡셈. 오래돼서 가물가물하긴 한데 암튼 아님.

-[고기전사1호]: 아, 근데 ㅈㄴ 애매하다. 어떻게 깨긴 깼었는데.

└ㅇㅈ 미친 듯이 뛰다 보니 깼던 거 같은데 자세히는 기억 안 난다.

단순히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난 게 아니다. 철저히 지워진 거지.

6층에 올라오는 사람들 모두가 백환을 먹는 지금 진실이 밝혀질 가능성은 없었다.

도중에 탈락한 사람도 마찬가지.

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한 장소에 떨어진다.

그리고 의무적으로 백환을 먹는다.

명분은 분명했다.

탑에서 나왔다는 건 모든 코인을 소모했다는 것이고 다르게 말하자면.

‘어떤 형태로든 죽음을 겪었다는 거니까.’

몬스터에 물어 뜯겼든, 함정에 빠졌든, 사람한테 살해당했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불안정한 것이 당연했고.

궁여지책으로나마 백환을 먹였다.

6층에서 백환을 먹은 사람도 있겠지만 안 먹은 사람도 있을지 몰랐으니까.

‘진실도 모르고 사람들은 열광했지.’

정부와 길드가 국민을 위해 일한다고.

세이퍼 정책이 실행되기 전에 탑을 올랐던 사람들?

‘입막음을 당했든 거래를 했든 했겠지.’

국내에 존재하는 여덟 개의 대형 길드와 정부.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뭔들 못 할까.

대격변 초기에는 사회 전반이 무너졌던 만큼 사람 몇 명 정도는 의문사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어쩐지 국가가 안정화되자마자 세이퍼 정책을 펼치더라니.

“괜찮습니까? 표정이 안 좋은데. 어서 백환 드세요. 괜히 아끼려다가 탈 나면 본인만 손해예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던 걸까.

김성훈이 걱정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 사람은 지금 자신이 뭘 권하는 건지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알고도 이러는 걸까?

그는 백환을 먹었을까?

“김성훈 씨는 이미 드셨나 보네요? 상처가 없는 걸 보니.”

난 애써 감정을 추스르며 김성훈에게 물었고.

“어우, 예. 부끄럽지만 5층 보스몹한테 크게 당했었거든요. 홉고블린이었나? 작은 놈이 어찌나 살벌하던지.”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허허 웃었다.

[김성훈]

-오랜만에 사람과 대화해서 기분이 좋다.

뒤이어 떠오르는 설명.

-꽈득

난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거짓 없이 나를 걱정해서 백환을 권한 거였다.

소름이 끼쳤다.

백환을 먹고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이 순수한 호의와 사명감을 가지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백환을 내민다.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과정.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몰랐으며, 알았던 이들마저 잊어버린다.

이 판을 짜 놓은 사람들만이 흡족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겠지.

‘쓰레기 같은 놈들!’

생존자 대다수는 잘못된 공략법으로 인해 죽거나 만신창이가 되어 이곳에 올라온다.

차라리 인지도 못 한 채 죽거나 팔다리 하나가 부러진 채 올라온다면 다행.

운이 나쁘다면, 제때 죽지 못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소환된 생존자를 바라보았다.

“아. 아으으.”

어떤 보스 몬스터를 만난 걸까.

머리와 옷은 모조리 타 버린 채 벌거벗은 한 남자.

흉물스럽게 녹아내린 피부.

입술은 말려 올라가 이가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저기 생존자다!”

“제길. 어떻게 당한 거야! 구급반!”

왼쪽 가슴에는 열기로 흐물흐물해진 길드 마크가 살덩이와 엉겨 있었다.

사방으로 퍼지는 탄 냄새.

붉게 달아오른 몸.

노랗게 익어 가는 물집.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었으니까.

권능을 얻지 못했다면 이렇게 멀쩡히 올라왔을 수 있었을까?

아니.

난 나 자신을 잘 안다.

분명히 중간에 죽었거나 사지 중 하나는 잃었을 거다.

어떻게든 올라왔더라도 후유증이 심각했겠지.

신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겉으로 보이는 상처만 치유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상황을 만들어 버린 놈들에 대한 분노심이 차올랐다.

그놈들은 사람 새끼가 아니다.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떠는데 굵은 인상의 남성이 군중을 해치고 난입했다.

“가슴에 마크! 바벨 길드다. 다들 튀어나와!”

용케 길드를 알아본 모양. 그의 표정은 다급했고 한 손에는 백환이 들려 있었다.

낯선 사람들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생존자가 발버둥을 쳤다.

아니. 움찔거렸다. 이미 그는 근육이 오그라져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겁에 질린 눈으로 사력을 다해 뒷걸음 치는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박혔다.

“저, 저리 가! 너희 때문이야. 하, 한 마리라고 했잖아! 주변에 스킬 박스가 있다고 했잖아!”

“발작이다! 일단 강제로 먹이고 변화가 없으면 포션을 사용한다. 뭐 해! 안 움직이고!”

“대, 대장. 이 정도 부상이면 중급 포션 이상이어야 하는데 예산이…….”

“닥쳐! 포인트는 내 거에서 까면 돼.”

그런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든 길드원들.

진실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도, 분노와 경계심에 날뛰는 것도 기억을 잃어버린 자들에게는 발작으로 비칠 뿐이었다.

“놔! 놓으라고!”

“꽉 잡아!”

“빨리 먹여!”

“으읍! 으!”

진실을 아는 자와 진실을 알았던 자들의 실랑이는 과장된 희극과도 같았다.

“끔찍하네요.”

나와 함께 그 광경을 바라보던 김성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알까.

그 역시 저들과 같은 피해자라는 것을.

난 잠시 입을 닫았고.

“네. 정말 끔찍하군요.”

광장 전체를 바라봤다.

이제야 모든 게 분명해졌다.

어째서 선두권이라 생각했던 나보다 먼저 올라온 사람들이 많은지.

서로서로를 돕는 이면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6층]

-모든 부상이 치유됩니다.

저렇게 필사적으로 생존자를 살리려 하지만 실제로는 가만히 놔두면 된다는 것도.

쓰게 웃었다.

‘자리를 뜨자.’

더 있고 싶지 않다.

괜히 어물쩍거리다가 산군 길드에 잡히기도 싫었고.

몸을 돌려 사라지려던 그때.

“잠시만요.”

김성훈이 나를 불러 세웠다.

허공에 나타난 반투명한 창. 빠르게 눈으로 훑는 것이 커뮤니티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몇 번 고개를 까딱거리던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죄송한데 길드에서 공지가 날아와서요. 산군 길드의 요청으로 생존자가 백환 먹는 걸 꼭 확인하라고. 죄송하지만 지금 드셔 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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