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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에 갇혀 고인물-17화 (17/740)

17화 중급 스킬 박스

대박이다. 난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눈앞에 반짝이는 점은 총 다섯 개.

그와 함께 떠오르는 정보.

[최하급 스킬 박스]

[최하급 스킬 박스]

[하급 스킬 박스]

[하급 스킬 박스]

[중급 스킬 박스]

“중급 스킬 박스?”

난 눈을 번뜩였다. 예상도 못 한 것이 섞여 있었으니까.

여기에는 하급만 있는 게 아니었나?

수많은 헌터가 거쳐 간 튜토리얼.

현역으로 활동하는 헌터들은 저마다 인터뷰를 하며 자신이 얻은 첫 스킬을 이야기하고는 했다.

초반부터 사용해 온 만큼 자신의 주력 스킬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등급이 낮아도 숙련도가 오르면서 상위 스킬 못지않은 효율을 내기도 했고.

-제가 처음에 얻은 스킬은 찌르기였어요. E급 스킬이었죠. 이제는 저와 뗄 수 없는 스킬이지만요.

-저요? 전 D급 마비였습니다. 지금 등급은 B급이죠. 사냥할 때 사용하기 좋아요.

내가 기억하는 인터뷰만 수십 개다. 그들 모두 E급이나 D급 스킬 하나를 얻었었다.

아, 모두는 아니구나. 딱 한 명. S급 헌터 김한성은 떡잎부터 달랐으니까.

-첫 번째 스킬이라. 감회가 새롭네요. 전 B급 스킬을 얻었습니다. 믿기지 않죠? 저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습니다.

B급. 엄청나게 높은 등급이다.

남들보다 몇 단계나 높은 등급의 스킬을 가지고 시작한 거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스킬 등급도 시간이 지나면 올라가기는 한다.

스킬에는 레벨이 붙고, 한계치까지 레벨을 올리면 다음 상위 스킬로 진화하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시작부터 상위 스킬을 얻으면 탑을 오르기 훨씬 수월해진다.

그러니까 김한성이 61층까지 오르고 S급 헌터가 됐겠지.

그의 노력을 폄하하는 건 아니다. 아무리 좋은 스펙을 가지고 있어도 쓰는 사람이 못나면 제대로 활용도 못했을 테니.

그렇다 하더라도 남들보다 출발선이 앞섰던 건 사실.

무엇이든 고점을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난 운이 좋다고밖에 할 수 없지.”

S급 권능을 얻었고, 그로 인해 숨어 있는 보물들의 위치를 알게 됐으니.

마음 같아서는 곧장 중급 스킬 상자를 얻고 싶었지만.

“저기는 너무 멀어.”

당장 급한 내가 챙기기에는 거리가 좀 있었다.

의도된 걸까? 거리가 멀어질수록 스킬 박스의 등급이 올라가는 것 같다.

딱 2분만 내게 여유가 있었다면 저것부터 챙겼을 텐데.

침착하자.

어차피 하나도 빠짐없이 챙길 거다.

욕심부리지 말고 가까운 것부터 챙기자.

효율적인 이유도 있지만…….

“안 그러면 내가 죽게 생겼거든!”

-쿠구구궁!

날 쫓아오는 어인 전사가 발을 박찰 때마다 땅이 울린다.

대단한 각력.

저런 놈한테 잡혔다가는 어떤 꼴을 당할지 상상하기도 싫다.

“일단 하나!”

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박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엉성하게 수풀 사이에 숨겨져 있던 박스.

베이지색 민무늬. 얼핏 택배 상자같이 보이는 물건이었으나.

[최하급 스킬 박스]

-D~F급 스킬을 획득합니다.

본질은 이능이나 다를 바 없는 스킬을 주는 물건이었고.

“제발 좋은 게 걸리기를.”

5층을 클리어할 수 있는 열쇠였다.

난 망설임 없이 박스를 열었다.

-파아아앗!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빛.

난 어인 전사를 피해 악착같이 달리며 결과가 뜨기를 기다렸다.

공격 스킬이 아니어도 좋다.

그저 놈이 다가오는 걸 방해할 수 있을 정도만 돼도 충분하다.

아직 스킬 박스는 많이 남아 있으니까.

[축하합니다!]

[F급 스킬, 연막을 획득했습니다.]

[연막 (F) Lv.1]

-희미한 연기를 피워 올린다.

빌어먹을!

쓰레기 스킬이 나왔다.

적어도 D급은 나올 줄 알았는데 시작부터 꽝이라니.

-쿠구구구국

“큭!”

난 전신을 찔러 들어오는 살기에 몸을 떨었다.

“크르라락!”

놈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졌다.

조금씩 호흡이 가빠지는 나와 달리, 놈은 숨찬 기색이 없다.

괜히 3성급 괴물이 아니라는 거겠지.

거리도 이제 100미터도 남지 않았다.

놈의 기준으로 10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

뭐라도 해야 한다.

“제발 먹히기를.”

[연막 (F) Lv.1]

난 곧장 습득한 스킬을 사용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손끝을 간지럽힌다.

이게 마력이라는 건가.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겼다.

마치 처음부터 쓸 수 있던 것처럼 머리에 각인된 스킬이 발동됐고.

“크륵?”

희뿌연 연기가 생겼다.

F급 스킬인 만큼 드라마틱한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다.

그저 솜사탕 같은 연기가 놈의 눈을 가렸을 뿐.

원래라면 이렇게 세밀하게 조절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거다.

처음 사용하는 이능이니까. 하지만 내게는.

[마력 5]

남들은 가지지 못한 높은 수준의 마력이 있었다.

마력은 스킬 사용 횟수, 위력, 컨트롤. 그 모든 것에 마력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즉, 이 정도는 할 수 있다는 이야기.

“크하아악!”

그래 봤자 몇 초 시간을 끄는 것에 불과했지만.

괴성을 지르며 투기를 발산하는 어인 전사.

그 기세에 흐릿하던 안개가 그대로 흩어졌다.

아무리 F급이라도 그렇지 고함 한 번에 사라지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놈이 당황하지 않았다면 1초도 시간을 끌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그 몇 초 덕분에 난 다음 스킬 박스를 잡을 수 있었으니까.

“제발 괜찮은 거!”

-파아아아앗!

다시 한번 뿜어져 나오는 빛.

아까 것보다 좀 더 강렬하다.

[축하합니다!]

[E급 스킬, 질주를 획득했습니다!]

“질주!”

나쁘지 않다. 일단 현 상황에서는 유용한 스킬이니.

난 설명도 보지 않고 스킬을 사용했다.

-수웅!

급격히 가벼워지는 몸.

마치 등 뒤를 거센 바람이 밀어주는 것처럼 몸이 앞으로 쭈욱 나아간다.

“굉장한데?”

누군가는 고작 빨리 달리는 스킬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등급도 E급에 불과했고.

하지만 체감하는 속도는 보통이 아니었다.

거칠어졌던 숨은 안정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몸 또한 균형을 되찾았다.

전투 능력은 없을지라도 생존력에서만큼은 충분한 메리트를 주는 능력.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는 탑에서 도주와 체력 유지에 도움을 주는 스킬은 많을수록 좋았다.

“크하아악!”

봐라. 빠르게 가까워지던 전사와의 거리가 유지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질주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중.

물론 놈이 미세하게 더 빠르긴 하다.

이곳이 육지기에 놈의 움직임이 굼떠지긴 했지만 3성급 괴물인 건 변하지 않았으니까.

“대략 20미터.”

다음 박스가 있는 곳까지의 거리다.

이대로만 간다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은데.

놈은 그런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쿵!

놈이 발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쉐에에에엑!

“우왁!”

바람을 찢으며 뭔가가 날아왔으니까.

등 뒤로 소름이 돋는 동시에 앞으로 몸을 굴렀다.

반쯤은 직감이었고 반은 예민해진 감각 덕분이었다.

바람 소리에 곧장 반응한 거였으니까.

-후두둑

내 뒤통수를 가려 주던 머리카락 일부가 뜯겨 떨어지고.

-콰아아아앙!

내 키만 한 삼지창이 땅에 꽂혔다.

튀어 오르는 돌덩이.

부르르 떨리는 창대.

절로 침이 넘어간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땅에 박힌 창날 부분은 보이지도 않는다.

도대체 힘이 얼마나 센 거야.

저걸 맞았다면?

“머리가 터졌겠지.”

진짜로.

피해서 다행이다.

“급하긴 했구만.”

유일한 무기를 집어 던지다니.

이제 놈은 맨손. 더 이상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없다.

‘챙길까?’

사람이 참 간사한 게 살짝 기회가 생겼다고 욕심이 생긴다.

단단한 창. 리치도 길고 공격력도 단검보다는 높을 텐데.

순간 고민을 했지만.

‘안 돼.’

난 고개를 저었다.

깊숙이 박혀 빼내는 것도 일이고 무엇보다.

“크하아악!”

“젠장!”

내가 앞으로 구른 사이 어인 전사가 나를 따라잡았다.

단순히 나를 죽이기 위해 집어던진 게 아니었다.

어떻게든 주춤하게 만드려고 했던 거지.

-콰득!

몸을 일으키기가 무섭게 놈의 우악스러운 손이 어깨를 붙잡았다.

악력이 굉장하다.

어깨가 그대로 뜯겨나갈 것 같은 압박감.

그래도 물고기라고 양심은 있는지 손톱은 그리 길지 않다.

대신 아무렇게나 삐져나온 송곳니가 나를 반겼지.

“크하아아악!”

“꺼져!”

난 내게 주둥이를 들이미는 놈을 피해 몸을 눕혔다.

다리를 떼며 늘어난 무게.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이 아래로 처지는 타이밍에.

-채앵!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놈의 눈을 향해 찔렀다. 비늘로 덮여 있는 몸은 어차피 공격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그야말로 매끄러운 움직임.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자연스러웠다.

이 정도면 먹히지 않을까?

속으로 기대를 했지만.

-까가가각!

“크르르륵.”

어느새 눈을 가린 손등이 단검을 막아 냈다.

과연 쉽게 당해 주지 않겠다 이건가. 3성급 몬스터는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내게는 나이프도 있다.

-부욱

놈이 단검을 막느라 생긴 약간의 공백.

난 억지로 몸을 비틀어 놈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누더기나 다를 바 없던 옷이 찢어지고, 손톱이 파고든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화끈한 통증이 엄습했지만 무시했다.

이건 실전이다. 잠깐의 버벅거림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

-팅

등 뒤에 착용했던 나이프를 꺼낸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놈의 눈이 방황한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내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걸 테니.

내가 노리는 건 놈의 발.

어디를 노릴까.

발등? 종아리? 무릎?

아니.

-푸욱

“크하아아악!”

발가락 사이에 붙어 있는 피막.

놈의 물갈퀴가 그대로 찢겼다.

내 힘으로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부위는 눈과 피막이 전부다.

나머지 부위는 비늘에 막히니까.

물론 치명적인 일격은 아니다.

하지만 놀라게 할 수는 있겠지.

그 증거로.

-뻐어어억!

“카하악!”

놈은 날 힘껏 걷어차 버렸다.

트럭에 치인 듯한 고통. 공처럼 몸이 허공을 날았다.

아프다.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난 살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놈이 당황하지 않고 날 물어뜯었다면 그대로 죽었을 테니까.

반사적인 행동일 것이다. 위험 대상을 떨어트려야 한다는 본능에 의한.

놈은 결국 몬스터. 이성보다는 본능에 충실했다.

-쿠궁! 촤아아악!

“쿨럭!”

바닥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입가에서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볼을 씹을 거 같다.

퉷. 조만한 살덩이가 나오는 걸 보니 진짜 씹은 거 같은데.

“크윽. 힘도 좋아. 몇 미터를 날려 버린 거야.”

아무래도 좋다.

저 멍청한 물고기 놈의 발길질 덕에 죽지 않고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비척비척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었다.

직접 놈의 발에 맞은 팔은 부러졌는지 움직이질 않는다.

손톱에 파인 어깨에서도 피가 줄줄 흐르고.

늑골에도 금이 갔는지 숨을 쉴 때마다 고역이다.

빌어먹을 3성 몬스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발길질 한 번 맞았다고 이 꼴이 되냐.

“흐흐.”

절대 좋은 상황이 아니건만 웃음이 흘러나왔다.

미친 건 아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웃은 이유는 하나.

[중급 스킬 박스]

-B~D급 스킬을 획득합니다.

“이쪽으로 날려 주다니. 고맙다, 생선 대가리야.”

놈이 걷어찬 방향이 중급 스킬 박스가 숨겨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난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스킬 박스에 손을 뻗었다.

웃기지도 않게 나무 한가운데 박혀 있는 박스.

못돼 먹은 탑 같으니. 이렇게 숨겨 두면 어떻게 찾으라고.

권능이 없었다면 코앞에 두고도 몰랐을 거다.

아무렴 어떤가.

“난 보이는데.”

-툭

가볍게 닿은 손가락.

[중급 스킬 박스 오픈.]

[행운이 깃듭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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