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콘셉트에 출중하다
3층에서 파밍을 끝내고 곧장 포탈로 향했다.
배도 든든하고 컨디션도 좋다.
서두른 감이 있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스페셜 도시락 버프]
-회복력 +200퍼센트
-남은 시간 42:34
스페셜 도시락의 버프가 끝나기 전에 다음 층을 도전하는 게 옳은 선택이니까.
“가자.”
난 포탈을 안으로 들어갔다.
-우웅
밀도 높은 액체에 몸을 담그는 기분.
몸을 간질거리는 감각과 묘하게 시공간이 찌그러지는 부유감.
둔중하지만 안락하게 울리는 진동을 따라 내 심장도 조금씩 박동을 높혀 갔다.
뭐가 나올지 모르는 탑. 긴장감과 함께 기대감이 들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도전 의식과 그를 뒷받침하는 자신감이 꿈틀거렸다.
약간의 시간과 함께 시야가 확 트이며 청량감이 몰려오자.
[4층에 입장합니다.]
난 곧 새로운 층에 도달할 수 있었다.
1층에서는 무기가 없는 몬스터가.
2층에서는 무기를 사용하는 몬스터가 나왔다.
3층은 위협적인 함정을 통과하는 거였다.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난이도.
각 층에는 나름대로의 수행 과제가 있었다.
그러니까 튜토리얼 구간이라는 거겠지.
거칠기는 했지만 앞으로 겪을 일들을 미리 경험해 보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렇다면 4층은 어떨까.
무엇을 겪고 깨닫게 될까.
모든 고난은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발판… 은 개뿔.
“아, 진짜. 돌겠네.”
난 한숨을 내쉬었다.
4층에는 몬스터도 함정도 없었다.
그저 숨이 턱 막혀 올 정도의 규모를 자랑하는 절벽이 내 앞을 가로막을 뿐.
옆으로 돌아갈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절벽 끝은 아예 푸른 막에 쌓여 있었고.
-장막 너머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권능 역시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결국 오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높이가 어느 정도지?
20미터? 30미터?
못해도 꼬마 빌딩보다는 커 보이는데.
[4층]
[절벽을 넘으세요.]
-몬스터와 함정은 없습니다.
-경치가 좋습니다.
-대자연의 청량함을 느껴 보는 건 어떨까요?
“청량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한 번 미끄러지면 호떡 되게 생겼구만.
후우.
하다못해 탄마 가루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은 탄마는 커녕 장갑조차 없다. 맨손으로 올라야 한다는 말.
땀이라도 차서 헛잡으면 중력의 위대함을 몸으로 느끼게 될 거다.
“이건 또 어쩌지?”
난 배낭을 매만졌다.
맨몸으로 오르는 것도 힘들 텐데 짐도 많다.
그동안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배낭이 지금만큼은 장애물이었다.
식량과 물, 포션, 최루 구슬. 코볼트를 잡으면서 얻은 석궁, 3층에서 얻은 창과 발광석. 기타 잡다한 게 모이니 꽤 묵직하다.
못해도 20킬로그램은 될 거 같은데.
군장 행군하던 때가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일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이것들이 있어서 지금까지 버틴 건데.
안 그랬으면 진작에 죽었을 거다.
당장 다음 층에서 써야 할 물건들도 상당하고. 상점창이 풀렸을 때 팔아야 할 것들도 있다.
그나마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 가방이라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시도도 못 했을 거다.
난 쓰게 웃으며 배낭을 뒤졌다. 암벽을 오를 때 도움이 될 만한 게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로프는 쓸 만하겠는데.”
통과하기 어려운 구간에 도착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거 같다.
단검은 필요 없고. 석궁도 마찬가지.
가끔 만화에서 단검에 로프를 묶어서 나뭇가지에 걸고 그러던데 실제로 했다가는 죽기 딱 좋다.
“고정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하기도 힘들고 삐끗하면 그대로 낭떠러지야.”
애초에 내가 마주 보고 있는 절벽에는 나무도 없다.
정확히는 시야 내에는 보이지 않았다.
단검은 그냥 곱게 넣어두자.
가뜩이나 단검치고는 긴 40센티미터짜리라 움직이는 데 걸리적거린다.
맨손으로 암벽을 등반해야 하는 상황.
최대한 몸을 편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건 혹시 모르니까 챙기고.”
단검 대신 비교적 부피가 작은 나이프를 등허리에 찼다.
혹시 아는가. 로프를 자를 일이 생길지.
뭐든 준비해서 나쁠 건 없다.
오르다가 쥐 나면 안 되니까 스트레칭 한번 해 주고.
“크으.”
마지막으로 물을 마셨다.
언제 또 마실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마셔 둬야지.
“그럼 출발.”
난 신발 끈을 바짝 조이고 발을 내디뎠다.
그래. 까짓것 오르면 되지.
이미 쓴맛 단맛 여러 번 봤다. 이딴 돌덩이에 질 수는 없다.
-꾸득
비교적 오르기 쉬운 코스를 찾아낸 난 튀어나온 돌덩이를 붙잡았다.
밖에 있을 때 실내 클라이밍을 해 본 적이 있다.
조금이나마 요령이 있다는 뜻.
그때는 단순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갔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열심히 다닐 걸 그랬다.
-꾸욱
다시 위로 뻗는 손.
절벽에 밀착한 몸통.
가뜩이나 배낭 때문에 무게가 뒤로 쏠린 상황.
신중하게 움직이자.
중간중간 팔을 떨궈서 피가 통하게 만드는 것도 잊지 말고.
“생각보다 할 만하네.”
내 실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스페셜 도시락의 버프 덕분이지만.
회복력을 증가시켜 주는 버프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암벽도 단단하게 잡고 있는 돌이 빠지거나 부러질 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확인해 가면서 잡기는 해야겠지만.
슬쩍 아래를 봐 보니 벌써 5미터는 올라온 거 같다.
이 페이스라면 무조건 통과할 수 있다.
그렇다고 과신하지는 말자. 괜히 까불다가 요단강 건너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스럽게. 급하지 않게 움직이다 보면 결국에는 끝까지 오를 수 있다.
난 다시금 손을 내뻗었고.
“할 수 있다, 조현수! 아자! 아자! 아자!”
파이팅을 외쳤다.
이번 4층 과제. 어쩌면 무난하게 클리어할 것 같다.
.
.
.
.
.
.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조졌네. 이거.”
절벽 중간 지점.
바위가 떨어져 나갔는지 안으로 파인 공간에 가까스로 몸을 붙인 난 위를 올려다봤다.
내 눈이 삐었던 모양이다.
20미터? 30미터? 웃기지 마라. 못해도 50미터는 넘는 거 같다.
이상하다. 분명 이렇게까지 안 높았던 거 같은데.
“어째 오르면 오를수록 높아지는 거 같단 말이지.”
기분 탓일까?
아닌 거 같다.
다른 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올라왔거든.
-후우웅
발아래로 바람이 분다.
거짓말이 아니고 한 20미터는 넘게 올라온 거 같다.
밑에 위치한 포탈이 조막만 해 보이는 걸 보면.
“경치가 좋긴 하네.”
장막 너머로 보이는 풍경.
울창한 산림. 녹음이 짙은 공간. 곳곳에 세워진 거대한 바위는 웅장했고, 청명한 하늘과 부드럽게 흘러가는 구름은 평화로웠다.
-후오오오오
듣기만 해도 스산한 바람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처음에는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적응이 되니 무섭지도 않다.
해탈했다고 해야 하나.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후우.”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 굴고 있었지만 상황 자체는 좋지 않았다.
체력이 슬슬 한계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손아귀는 찢어질 것 같고 전완근은 딱딱해졌다. 주먹도 세게 못 쥐겠다.
계속해서 버티고 섰던 다리도 미세하지만 떨리고 있고.
위만 쳐다보니 목도 뻐근하다.
스페셜 도시락의 버프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낙오됐겠지.
그것도 이제 끝이지만.
[스페셜 도시락 버프]
-남은 시간 00:02
-남은 시간 00:01
-남은 시간 00:00
[버프가 종료됩니다!]
“큽!”
순간적으로 힘이 빠진다. 지친 몸이 그대로 느껴지자 위기감이 엄습한다.
지금까지야 체력이 보충돼서 계속 오를 수 있었지만 지금부터는 아니다.
선택해야 한다.
“올라갈 것이냐. 내려갈 것이냐.”
어느 쪽이든 쉽지 않은 결정이다.
올라가다 힘이 빠지면 그대로 게임 끝.
로프 없는 번지점프 예약이다.
반대로 내려가는 것도 문제다.
내려간다 한들 결국에는 다시 올라가야 4층을 클리어할 수 있으니.
지금 못한 걸 다음에 한다고 잘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제는 스페셜 도시락도 없는데?
아니. 절대 못 한다. 장담할 수 있다.
“내려가는 건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다시 이 높이를 오를 자신도 없고, 올라가는 것 이상으로 내려가는 것도 힘들다.
시야도 좁아지고 운이 나쁘면 미끄러질 가능성도 있다.
여기까지 와서 실족사라니.
그건 너무하잖아.
가장 좋은 건 중간중간 베이스캠프를 지어 쉬면서 가는 건데.
“미친 짓이지.”
삶에 미련이 없다면 모를까, 아무런 보호 장비도 없이 절벽에서 쉬는 건 자살 행위나 다를 바 없다.
휴식은커녕 신경만 날카로워지겠지. 언제 떨어질지 모르니까.
하다못해 로프를 고정할 만한 곳이 있으면 몸이랑 묶어서 쉬겠는데 마땅한 게 없다.
복잡해진 머리.
사람이 궁지에 몰리니까 거짓말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공략법을 떠올리게 된다.
혹시 아는가? 거기에 힌트가 있을지.
기억을 되뇌는 것도 잠시. 난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는데.”
4층은 정부와 길드도 할 말이 없었는지 당장 필요한 물건만 챙기고 올라가라고 되어 있었다.
짐의 무게는 10킬로그램 내외로 하라고.
그 이상 무거우면 올라가기 버겁다고 적혀 있었다.
당연한 말이라서 따로 태클 걸 부분이 없다.
“결국 원점인가.”
4층에서 요구하는 건 체력의 한계를 넘어 끝없이 올라가는 끈기일지도 모르겠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 게 아니면 말이 안 돼.
-띠링
“음?”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 알림이 울렸다.
“니머리 탈모가 글을 올렸군.”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비슷한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다.
관심을 두고 지켜볼 생각으로 알림을 설정해 뒀다.
저번에 댓글로 린치 당하고 나서 따로 뭔가를 쓴 적은 없었는데.
한번 읽어 볼까.
지금 쉬고 있는 스팟을 지나면 또 언제 쉴지도 모른다.
글 하나 읽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난 커뮤니티를 열었고.
[니머리 탈모]: 아, 시바거. 절벽 오르다 배 다 까졌네.
집에 잘 있다가 이게 뭔 ㅈㄹ인지 모르겠다.
운동을 하든지 해야지.
4층도 이제 끝이다. 5층도 금방 깨 줄라니까 전에 댓글로 똥 싸지른 놈들 딱 기다려라.
나 뒤끝 길다.
흥미로운 내용이다.
5층에 진입했다니.
프로 암벽 등반가라도 되는 걸까.
-응. 튜토도 못 깬 뉴비 어서 오고^^.
-이래서 탈모가 안 돼.
└[니머리 탈모]: 나 말고 니머리 새끼야
└니머리 X, 네 머리 O.
-교정 빌런 맨날 있누 ㄷㄷ.
-그래도 꽤 빨리 올라오는데?
-원래 대머리가 강하잖슴.
-경) 탈모에서 대머리로 진화 (축
역시나 댓글 반응은 좋지 않았지만.
사실상 거의 놀려먹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니까 무시하자.
중요한 건 하나. 그가 5층에 진입했다는 거다.
“무슨 수로 벌써 통과한 거지.”
가능한가? 쓸데없는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서 그렇지.
분명 그가 나보다 늦게 출발했다.
저번에 올린 3층 공략법에 고맙다고 댓글을 달았었으니까.
물론 내가 4층으로 넘어오기 전에 파밍하느라 시간을 보냈지만 앞지를 정도의 시간은 아니었을 텐데.
“물어보자.”
그게 가장 빠르고 확실하니까.
어쩌면 내가 모르는 팁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댓글창을 눌렀다.
너무 티 나지는 않게. 적당히 내가 앞서 있는 것처럼 포장해서 살살 꼬드기면 되겠지.
내가 잡은 콘셉트을 지키면서 탈모맨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적절한 문장이 뭐가 있을까.
난 생각에 잠겼고.
[쁘띠공듀]: 벌써 5층까지 따라오다니. 쁘띠공듀는 감탄했습니다! 강한 행동력과 용기! 요정인 저도 반하겠어요☆ 모두의 우상! 멋쟁이! 영웅! 탈모 님이야 말로…….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아부를 떨기 시작했다.
아. 거지 같던 회사 생활 경력이 이렇게 빛을 발하는구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X소기업 아니, 킹캇기업의 사장님께 감사하는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