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조각상
“후우. 후.”
난 쪼그려 걸으면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수풀에 숨어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종아리는 당기고 굽은 허리는 뻐근하다.
거칠게 자란 수풀에 베여 생긴 생채기도 많았고.
눈에 땀이 들어가 따갑기까지 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좀 쉬어야지.
난 바닥에 엉덩이를 붙였다.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고블린을 의식한 채 움직이는 건 상당한 긴장감을 요구했으니까. 심지어 한두 마리가 아닌 다수의 고블린이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상황이라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지는 고블린을 마주치지 않았다.
시계를 살펴 보니 대략 세 시간 정도 됐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단 말이야.”
난 시계태엽을 돌리며 수풀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어느 순간부터 공터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놈들에게 먼저 발각되면 협공당할까 봐 한껏 자세를 낮췄더니 방향을 제대로 못 잡은 모양이다.
아무리 방향 감각이 좋아도 아무런 특징도 없는 수풀 사이를 오가는 건 어려운 일이니까.
그나마 맨몸인 놈들을 상대하는 거면 좀 더 과감해지겠는데, 놈 중 한 마리는 나이프를 들고 있다.
서너 마리가 날 붙잡은 상태에서 칼침을 넣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방향을 잡아야 할까.
-스슥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목을 축이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들렸다.
곧장 바닥에 엎드렸다.
티 나지 않게 수통을 넣고 포복하며 앞으로 기자 머리 위로 수풀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키룩.”
고블린이다.
그것도 한 마리.
놈이 이동했고 난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뒤를 따랐다.
그렇게 20분. 새로운 공간에 도착했다.
‘공터가 아니야.’
멀찍이 떨어진 공간. 이곳은 뭐랄까. 공터보다 훨씬 인위적인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주변에 수풀이 별로 없다는 건 비슷했지만 바닥에 타일이 깔려 있었으니까.
무척 오래된 느낌.
곳곳에 반쯤 부러진 기둥도 있고.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벽도 보였다.
원래는 건물이 있던 자리인 건가.
‘뭘 하는 거지.’
던전에 다양한 장애물과 인공 구조물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짐꾼 역할이었지만 던전은 여러 번 들락거렸으니까.
하지만 몬스터가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
“키루룩. 키룩.”
뭐가 그리 좋은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움직이는 고블린.
놈은 원을 그리고 있었고 그 안에는.
“조각상?”
60센티미터 남짓한 사이즈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람? 천사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몬스터 모양 같기도 한 물건이었는데 이상하리만큼 깨끗했다.
게다가.
-우우우웅
미약한 진동음까지.
저거 혹시 아이템인가?
그럴 리가. 다른 곳도 아니고 튜토리얼 구간이다.
심지어 1층. 탑을 시작하는 곳.
상식적으로는 없는 게 정상인데.
두근.
본능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고정된 시선.
심장 박동에 맞춰 조각상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고.
‘설마.’
불현듯 소름이 돋았다.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가설.
정부와 길드가 손을 맞잡고 거짓된 튜토리얼 공략을 뿌린 이유.
숨겨진 보상을 독식하기 위함이 아닐까.
[고블린 처치 (0/1)]
뒤이어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조건.
고블린 한 마리 처치.
일종의 함정이기도 했다. 고블린 한 마리를 잡으면 된다고 했지 한 마리만 있다고는 안 했으니까.
좀 더 상상력을 굴려 보자면 한 마리 이상 사냥해도 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말 그대로 한 마리는 포탈을 열 최소 조건일 뿐이니까.
‘탑에는 보상이 숨겨 있다.’
그것을 얻는 조건도, 획득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이지만 분명히 있다.
당장 국내 S급 헌터인 김한성도 이런 말을 했었다.
탑에는 숨겨진 보물과 기연이 있으며 그것을 차지하는 것만이 탑을 높이 오를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인의 말을 증명하기 위함일까.
그는 과감하게도 자신이 얻은 보물을 카메라에 비췄었다.
S급 장비, 아리아의 방패.
S급 아티팩트, 심연의 귀걸이.
탑에서 벗어난 자들은 죽을 당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비를 들고 돌아온다.
그가 보인 물건들 역시 탑에서 얻은 것이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던전에서는 S급 장비가 나온 적이 없으니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말이지.’
뛰어난 장인들 역시 AA급 장비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한계.
현재 헌터계에 돌아다니는 S급 장비는 모두 탑에서 나온 거다.
그렇다면.
만약 눈앞의 조각상이 보상이 맞다면.
-키릭
“망설일 필요가 없지.”
난 단검을 쥔 채 앞으로 달렸다.
설사 보상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어차피 이곳에서 벗어나려면 한 마리는 죽여야 하니까.
“키엑!”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날 발견한 고블린이 비명을 지르며 조각상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조용하게.”
아직은 1층에 몇 마리의 고블린이 있는지 모르니까.
난 신속하게, 하지만 성급하지 않게 팔을 내뻗었고.
“키헤─!”
큰 목소리로 동료들을 부르려는 놈의 목에 칼날을 쑤셔 넣었다.
조각상을 붙드느라 비어 버린 목에서 시뻘건 피가 솟아올랐다.
여기서 한 번 더.
-푸극
쓰러진 놈을 부축하며 심장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고블린은 영악하다. 아니, 약간의 지성이라도 지닌 몬스터라면 모두 그렇다.
죽은 척하다 덤벼드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으니까.
[고블린 처치 (1/1)]
[1층 클리어!]
[포탈이 열립니다.]
알림이 뜬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감을 풀었다.
죽은 놈은 수풀에 숨기고.
“과연 어떨지.”
난 바닥에 떨어진 조각상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웅!
나에게 반응하듯 선명해지는 진동.
그와 함께 조각상 일부에 금이 갔고.
[전 서버 최초!]
[루나티스의 조각상을 획득했습니다.]
[조건 충족.]
[유일 퀘스트-루나티스의 안배가 부여됩니다!]
새로운 알림이 떠올랐다.
파스스.
조각상의 하단 부분이 균열이 생겼다.
부서지기 직전인 것 같은 모습임에도 여전히 단단했고.
-우우우웅!
진동은 더욱 강해졌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알림창.
[유일 퀘스트-루나티스의 안배]
[고블린 전멸 (1/4)]
[보상-루나티스의 안배 (???)]
“유일 퀘스트!”
딴 한 번만 발생하는 최고위급 퀘스트다.
그 보상은 어마어마하다고 알려져 있고.
1층에 이런 퀘스트가 있었다니.
“말도 안 돼.”
멍해진 머리와 달리 입꼬리는 올라갔다.
이건 기회다. 두 번 다신 안 올 기회.
무슨 일이 있어도 클리어한다.
“진정하자, 현수야. 여기서 죽으면 도루묵이다.”
-짜악
난 뺨을 때렸다.
흥분하면 안 된다. 퀘스트 조건부터 확인하자.
일단 처치할 고블린의 수가 늘어났다.
잡아야 할 수는 총 네 마리.
이미 한 마리는 잡았으니까 세 마리만 더 잡으면 되는데.
난 문장에 주목했다.
“처치가 아니라 전멸이야.”
그 안에 든 의미는 남달랐다.
전멸이라는 것은 모든 고블린을 죽이라는 거니까.
고로 옆 칸에 뜬 1/4의 뜻은.
“1층에는 고블린이 4마리 있었다는 거겠지.”
순간 헛웃음이 났다.
1층에는 한 마리가 있다고?
개소리하지 말라 그래라.
내가 반드시 이 사실을 알릴 거다.
정부와 길드에 속아 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그렇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하지만.
당장 나갈 것도 아니고 일단은 기억만 해 두자.
“보상이라.”
물음표로 도배되어 있지만 내 손에 들려 있는 조각상과 관련 있다는 건 알 것 같다.
이렇게 대놓고 울려 대니 모른 척하는 게 더 어려울 정도.
-키에엑!
-키륵! 키르륵!
조금씩 고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서둘러 조각상을 배낭에 넣고 자리를 피했다.
반쯤 무너진 기둥 뒤에 숨은 난 단검을 굳게 쥐었다.
활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일단 놈들이 전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저번처럼 불시에 기습을 당하는 건 사양이다.
그렇게 5분. 숨죽이며 놈들을 기다리자 수풀이 흔들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잔뜩 흥분한 모습.
역시 놈들은 조각상에 집착하고 있었다.
죽은 동료 따위는 찾을 생각도 없이 사방을 뒤지고 있으니.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고블린이 똑똑해 봐야 고블린.
흥분한 탓도 있겠지만 내가 숨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는 모습이었고.
“키륵. 키!”
-푹!
흩어진 놈 중 내 쪽으로 다가온 놈의 입을 틀어막고 단검을 쑤셔 넣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놈이 완전히 죽을 때까지 끌어안고 있었다.
툭.
움직임을 멈춘 놈을 기둥 뒤에 세워 넣고 난 앞으로 나섰다.
이걸로 남은 고블린은 둘.
기습할 이유가 사라졌다. 사실 당해 주지도 않을 것 같지만.
정신이 들었는지 두 마리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거든.
아주 멍청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쪽이야, 친구들.”
난 피 묻은 단검을 흔들며 고블린을 불렀다.
“키륵!”
“캬하아악!”
나름 위협적인 울음을 내는 녀석들.
핏자국을 본 건가. 이빨을 들이밀면서도 섣불리 달려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오게 만들어야지.
-지
난 배낭에 넣어 뒀던 조각상을 꺼냈다.
일순 바뀌는 고블린의 눈빛.
그건 집착이었고 탐욕이었다.
“그래. 너희가 환장하는 조각상이다.”
-캉, 캉
놈들을 도발하기 위해 난 조각상을 단검으로 가볍게 두드렸고.
“키햐아악!”
“케흐으윽!”
고맙게도 이성을 잃고 달려와 줬다.
장난은 여기까지.
난 자세를 낮추며 놈들을 주시했다.
왼쪽에는 나이프를 든 놈. 오른쪽에는 그냥 맨손.
누구를 먼저 노려야 할까.
어떻게 해야 피해를 최소한으로 이길 수 있을까.
찰나의 시간 많은 생각이 오갔고.
“받아!”
“케륵?”
내 선택은 빨랐다.
나이프를 든 놈에게 조각상을 던졌다.
놈들이 원하는 건 이거지.
맨 처음 내게 죽은 고블린 역시 도망치는 것보다 조각상을 택했다.
그리고 저놈도.
“나이스 캐치.”
-푸극!
반쯤은 반사적으로 날아오는 조각상을 받았고 말이야.
봉인된 두 손.
난 놈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았다.
푸슈슈슉!
피가 솟구친다. 동맥을 제대로 찌른 모양인데.
혹시 몰라 나이프를 쥔 손을 움켜잡고 비틀었다.
-뿌득!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기 때문일까.
발버둥 치는 것과 달리 힘은 미약했고 쉽게 손목이 꺾였다.
[고블린 전멸 (3/4)]
“이건 원래 내 거라고.”
떨어진 나이프와 조각상을 집으며 알림창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한 마리.
“키, 키륵.”
놈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동공이 흔들리는 것이 내적 갈등이 일어난 모양.
조각상은 가지고 싶은데 덤비자니 죽을 거 같고.
난 자비롭다.
그렇기에 고민 중인 고블린에게 해결책을 주고자 한다.
“가, 인마.”
놈에게는 관심 없는 것처럼 단검을 허리에 차며 손을 내저었다.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래야 놈이 쉽게 등을 내줄 테니까.
“키루룩!”
멀어지는 발소리.
역시나 뒤돌아 도망친다.
난 방금 회수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잡다한 용도로 쓰는 나이프인데 무게 중심이 살짝 앞으로 몰려 있어서.
-휘리릭! 푹!
“끼헤에에엑!”
가끔은 투검용으로 쓴다.
짐꾼 노릇을 하다 보면 자질구레하게 목숨이 위태로울 때가 있어서 말이지.
빌어먹을 던전에서 살아남으려면 이런 깜찍한 물품들을 몇 개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가라 했지 안 잡는다고는 안 했다.”
난 바닥에 엎어져 앞으로 기는 고블린에게 다가갔다.
이상하지.
왜 떡하니 나이프가 있는데 단검을 넣는다고 안심할까.
설사 나이프가 없다고 해도 말이야.
-차캉
이렇게 다시 뽑는데 1초도 안 걸리는데.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쓰러진 고블린의 숨통을 끊었다.
[고블린 전멸 (4/4)]
기다렸다는 듯 떠오르는 알림창.
이걸로 퀘스트는 완료인가.
그렇다면 남은 건.
[시작부터 모험의 길을 걷는 그대에게 축복을!]
[루나티스의 안배가 해방됩니다!]
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