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12화
47. 밥값은 해야죠(8)
피터 페츠가 4번 타자 미구엘 호네즈를 중견수 플라이로 잡아내면서 1회 말 다저스의 공격은 추가 득점 없이 끝이 났다.
하지만 다저스 팬들은 무산됐을지도 모를 득점 기회를 살렸다는 사실에 들뜬 표정이었다.
현지 중계진도 박유성이 보여준 놀라운 베이스러닝을 다시 돌려 보며 분위기를 띄웠다.
-피터 페츠. 1회를 공 7개로 마무리 짓습니다.
-7개의 공을 던져서 3개의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면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요. 경기 내용은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7개의 공을 던지는 사이에 경기 분위기가 몇 번이고 달라졌으니까요.
-간단하게 정리를 해볼까요? 일단 초구에 썬에게 3루타를 얻어맞았습니다.
-다른 타자였다면 2루에서 멈췄겠지만 슈피 루키 썬은 다르죠. 썬의 발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이미 이 시점에서 동점을 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썬이 2루에서 멈췄다면 코리 베츠의 플라이 때 홈을 파고들지 못했겠죠.
-대신 카일 홀리데이가 조금 편하게 번트를 댈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만약에 썬이 2루에 있었다면 피터 페츠는 더 까다롭게 공을 던졌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결과론이긴 하지만 썬의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이 다저스에게 동점을 안겨준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1회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세요. 전부 썬뿐입니다.
-이제 2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이 시작될 텐데요. 다음번 썬의 타석이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경기의 주도권을 다시 되찾아와야 합니다.
자이언츠 게빈 케플러 감독은 수비를 마치고 돌아온 야수들을 한데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어떻게든 흐름을 끊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명심해! 상대는 루키야. 실투를 던질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침착하게 그 실투를 노리면 돼. 아직 경기 초반이야. 절대 덤벼들지 마.”
천만 달러 이상을 받는 선수들이 즐비한 메이저리그에서 경기 중에 감독이 선수들을 독려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게빈 케플러 감독은 그렇게라도 오늘 경기를 잡고 싶었다.
내일 다저스의 선발은 크리스 반스.
지난 다이아몬드백스전 때 1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건재함을 증명해 낸, 현존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투수였다.
본래 내일 선발 예정이었던 피터 페츠를 하루 당겨 쓴 것도 크리스 반스와의 맞대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홈이 아닌 원정에서 피터 페츠를 크리스 반스와 붙이면 승산이 희박하겠지만.
올 시즌 처음으로 선발 로테이션을 소화하고 있는 크리스티안 로메스라면 피터 페츠도 부담이 적을 거라고 판단했다.
원정 4연전 목표였던 반타작을 위해서라도 오늘 경기를 무조건 잡아야 하는 상황.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마운드를 지키고 있을 때 최대한 많은 점수를 뽑아내야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로메스도 아무 이유 없이 다저스의 선발진에 합류한 게 아니었다.
-헛스윙 삼진! 바깥쪽 높은 공에 DJ 깁튼 선수의 방망이가 돌아갑니다.
-제가 경기 전에 눈높이로 들어오는 빠른 공이 강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처음으로 그 공을 던졌습니다.
-저 공이 조금만 낮으면 타자의 방망이에 걸릴 텐데요. 힘 있는 DJ 깁튼 선수를 상대로 과감하게 잘 던졌습니다.
-이것도 박유성 선수가 한 점을 쥐어짜 준 덕분이라고 봐야 할 거 같습니다. 보통 신인 선수들은 홈경기에서 리드를 당하면 주눅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홈 관중들 앞에서 패전 투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 두려움을 박유성 선수가 깔끔하게 없애줬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처럼 크리스티안 로메스는 박유성이 보여준 마법 같은 베이스러닝에 잔뜩 고무되어 있었다.
그래서 1회 초 때 거부했던 하이 코스 사인에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이언츠 타자들도 공격적인 크리스티안 로메스의 피칭에 방망이가 끌려 나왔다.
-원 볼 원 스트라이크에서 크리스티안 로메스 선수가 3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는 몸 쪽! 이 타구가 중견수 방면으로 높게 떠오릅니다.
-이번에도 먹혔어요. 지금 자이언츠 타자들이 눈높이로 들어오는 저 공을 자꾸 건드려 주고 있는데요. 저래서는 안타를 만들어내기가 어렵습니다.
-중견수 박유성 선수가 앞쪽으로 조금 내려와서 침착하게 공을 잡아냅니다. 투아웃.
-지금 2회부터 5타자 연속 범타인데요. 이대로라면 크리스티안 로메스 선수도 6회까지는 마운드에서 버텨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번 타자 제레미 데이비스가 쳐올린 타구까지 처리한 박유성이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그라운드를 내려왔다.
그러자 송현민이 냉큼 다가와 글러브를 내밀었다.
“뭐야? 혼자 야구 해?”
“그러게요. 타구가 전부 내 쪽으로 오는데요?”
“이런 식이면 나 다음 이닝부터 난 벤치에서 쉬어도 되겠는데?”
“형이 그 말 해서 다음 이닝부터 2루 땅볼만 계속 나올 듯?”
“그래도 상관없으니까 점수 좀 내자.”
1회 한점씩 주고받은 다저스와 자이언츠는 2회 나란히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쳤다.
그리고 3회 초 자이언츠의 공격이 다시 세 타자로 끝나면서 경기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 있었다.
보통 이런 분위기에서는 점수가 쉽게 나지 않는 편이지만.
3회 말에 박유성이 타석에 선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8번 타자부터라 점수 내기 빠듯할 거 같은데요?”
박유성이 멋쩍게 웃었다.
2회 말 공격이 7번 타자 마크 터너의 타석 때 끝났고.
8번 타자 마이클 리드와 9번 타순에 들어갈 투수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피터 페츠를 상대로 출루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결국 2사 이후에 타석에 들어서게 될 터.
루상에 나가더라도 홈을 밟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방법이 아예 없진 않지.”
“홈런 치라고요?”
“그럼 베스트고.”
“홈런 말고 또 있어요?”
“일단 3루까지라도 가 봐. 혹시 아냐? 피터 페츠가 폭투를 던질지?”
“에이, 설마요.”
“2회에 제구가 흔들렸잖아. 명색이 사이영상 후보군인데 1회에 공 7개 던지고 지쳤겠냐?”
“멘탈의 문제다?”
“피터 페츠도 클래스가 있으니까 정신 차리기 전에 네가 한 번 더 흔들어 줘.”
“노력은 해볼게요.”
더그아웃으로 들어간 박유성은 곧바로 타석을 준비했다.
스타즈 시절에는 일발장타를 갖춘 박경호와 선구안이 좋은 최일준이 8, 9번을 쳐서 잠깐 화장실을 다녀와도 문제없었지만.
다저스의 8, 9번은 다저스 팬들조차 없는 타선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마이클은 또 초구를 건드릴 것 같고. 크리스티안은 삼진 먹겠지.”
박유성의 예상대로 마이클 리드는 초구에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슬라이더를 건드려 1루수 앞 땅볼로 물러났다.
피터 페츠의 슬라이더가 워낙에 잘 들어오기도 했지만.
백업 포수인 로이 스미스와 경쟁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이클 리드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투수인 크리스티안 로메스는 방망이를 들고 타석에 서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스트라이크, 아웃!”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스윙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물러나자 박유성이 천천히 타석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 순간 다저스 파크를 가득 채운 관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박유성의 이름을 연호했다.
“썬! 써어어언!”
“썬! 한 방 날려 버려!”
박유성의 등장으로 경기장이 술렁이자 자이언츠의 포수 조이 패런트가 다급히 타임을 외치고 마운드로 올라갔다.
“피터.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설마 썬을 거르자는 거야?”
“2사 이후니까 썬을 내보내도 상관없어. 카일 홀리데이만 잡아내면 남은 두 이닝은 편하게 던질 수 있고.”
“거르기 싫다면?”
“그럼 최대한 어렵게 승부해야지.”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잡을 수 있어.”
“피터. 썬은 타율만 높은 타자가 아니야. 현재 메이저리그 홈런 1위라고.”
시즌 9경기를 치른 현재.
박유성은 6개의 홈런으로 메이저리그 홈런 레이스 선두를 달리는 중이었다.
코리 베츠를 포함해 거포들이 뒤를 잇고 있긴 하지만.
박유성의 장타력이 메이저리그에서는 통하지 않을 거라던 우려 섞인 전망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개막전과는 달라. 난 여전히 다저스 파크가 편하다고.”
“그러니까 썬에게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자는 거야. 어차피 1루로 내보내도 썬은 홈으로 들어오지 못할 거야. 그렇게 되면 다저스가 초조해지겠지.”
“흠…….”
“다저스의 애송이가 건방져진 것도 결국 썬이 동점을 만들었기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썬을 이용해서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어.”
잠시 고심하던 피터 페츠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역시도 마이너리그 유망주 취급을 받던 크리스티안 로메스와 팽팽한 투수전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이 못마땅하던 차였다.
“좋아. 대신에 카일은 확실히 처리해야 해.”
“걱정하지 마. 피터. 설사 썬이 3루까지 가더라도 홈에 들어올 일은 없을 테니까.”
어렵사리 피터 페츠를 설득한 조이 패런트가 벤치 쪽으로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게빈 케플러 감독이 직접 나와 구심에게 다가갔다.
-아, 지금 자이언츠 벤치에서 자동 고의4구를 요청했습니다.
-2사 이후긴 하지만 상대는 박유성 선수니까요. 자이언츠 입장에서 정면 승부 할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지만 자동 고의4구가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국내에서야 워낙 흔한 일이긴 하지만 박유성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이렇게 빨리 자동 고의4구를 얻어낼 줄은 몰랐는데요. 심지어 상대는 전 다저스의 에이스, 피터 페츠 선수입니다.
-피터 페츠 선수도 박유성 선수와 어렵게 승부하느니 일단 걸러놓고 카일 홀리데이 선수와 승부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아는 박유성 선수라면 절대 1루 베이스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심지어 메이저리그는 피치 클록 규정 때문에 주자를 견제하기도 쉽지 않거든요? 박유성 선수의 빠른 발에 자이언츠 배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지네요.
박유성이 1루로 걸어 나가자 조이 패런트도 뒷주머니에서 로진백을 꺼내 꾹 움켜쥐었다.
지난 홈 4연전에서 박유성에게 허용한 도루는 4개.
매 경기 한 차례씩 뛰었는데 단 한 번도 잡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그중 2번은 3루 도루였다.
지난해 조이 패런트가 허용한 도루는 총 26개.
40번의 시도 중에 14번(35퍼센트)을 잡아냈을 만큼 리그 평균 이상의 도루 저지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26번의 도루 중에 3루 도루는 단 1번 뿐이었다.
그마저도 타자가 송구 방해 수준의 스윙을 한 탓에 내준 거지 조이 패런트 앞에서 3루 도루를 시도하는 주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래서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이 다저스에 입단했을 때 포수로서 실력 발휘를 할 때가 왔다고 여겼다.
국제 대회에서는 부상 방지를 위해 무리하지 않았지만 리그는 달랐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 최고의 대도로 불리다가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뛰게 된 박유성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1인분 이상은 한 거나 다름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홈 4연전을 거치며 조이 패런트의 자신감은 산산이 부서졌다.
박유성을 잡기 위해 캠프 때 송구 프로그램을 추가하고 팝 타임을 0.1초 가까이 앞당긴 게 무색할 정도였다.
이번 원정 2연전에서도 조이 패런트는 벌써 3개의 도루를 내준 상태였다.
올 시즌 허용한 9개의 도루 중에 7개가 무려 박유성.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박유성을 잡겠다고 용을 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썬은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포수들에게 재앙과 같은 존재야. 포기하는 게 마음 편해.”
마음을 비운 조이 패런트가 몸 쪽 꽉 찬 코스의 빠른 공을 주문했고.
“크아아압!”
피터 페츠가 악을 내지르며 던진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꿰뚫는 사이.
촤라라라랏!
박유성도 단숨에 2루 베이스를 훔쳐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