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11화
47. 밥값은 해야죠(7)
“후우…….”
타석에 선 코리 베츠가 길게 숨을 골랐다.
한 점 차로 뒤진 1사 주자 3루 상황.
큼지막한 플라이만 때려내도 동점과 타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였지만.
이 찬스를 날리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코리 베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런 코리 베츠의 속내를 대변하듯 중계석에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타석에는 3번 타자 코리 베츠 선수. 이번 시즌 13개의 안타와 5개의 홈런, 14개의 타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즌 타율이 무려 0.333인데요. 하지만 최근 5경기 타율은 3할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2번을 치고 있는 카일 홀리데이 선수의 부진이 코리 베츠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봐야겠죠.
-지금 자막으로도 나오고 있는데 자이언츠와의 원정 4연전까지는 박유성 선수와 송현민 선수, 코리 베츠 선수가 전부 4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야말로 공포의 타선이었죠. 하지만 송현민 선수가 6번으로 내려가고 카일 홀리데이 선수가 2번에 올라가면서 전반적으로 타선이 약해졌습니다.
-코리 베츠 선수와 송현민 선수 모두 타율이 하락했고 카일 홀리데이 선수는 아예 안타를 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오늘도 박유성 선수가 초구를 공략해 3루타를 때려냈습니다만 카일 홀리데이 선수는 번트 플라이로 물러났습니다.
-아직 원아웃이니까요. 동점을 만들 기회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코리 베츠 선수의 부담감이 상당할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이게 같은 1사 3루라 해도 선두 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간 다음에 희생 번트를 성공시켜서 3루에 보낸 것과 3루타를 치고 나갔는데 작전 실패로 아웃카운트만 늘어난 건 전혀 다른 상황이거든요.
-전자는 공격하는 팀이 주도적으로 경기를 이끌어가는 느낌이라면 지금은 박유성 선수가 만들어낸 좋은 흐름이 꺾인 느낌이 듭니다.
-야구를 괜히 멘탈 스포츠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한 번 분위기를 타면 하위 타선에서도 일을 내지만, 반대로 분위기가 꺾이면 무사 만루 찬스도 무산되곤 하니까요.
-말씀드리는 순간 피터 페츠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절묘하게 꺾여 들어간 슬라이더에 구심의 팔이 올라갔습니다.
“헤이! 이게 들어왔다고요?”
멀리 돌아온 공이 스트라이크로 둔갑하자 코리 베츠가 목소리를 높였다.
가뜩이나 번트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짜증이 났는데 이런 공까지 잡아주니까 갑자기 열이 확 올라왔다.
그러자 국가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조이 페런트가 약 올리듯 입을 열었다.
“코리. 구심의 판정은 정확했어. 완벽한 백도어 슬라이더였다고.”
“장난해? 미트질로 장난친 거 모를 줄 알아?”
“코리. 이 정도는 기본적인 캐칭으로 봐야 해. 그리고 피터는 원래 좌타자 상대로 바깥쪽 스트라이크를 잘 잡았다고. 설마 같은 팀인데 몰랐던 거야?”
“젠장할!”
“자, 이제 그만 열 내고 타석에 집중해. 저러다 썬이 탈진할지도 모른다고.”
코리 베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3루 쪽으로 향했다.
조이 페런트의 말처럼 박유성은 다른 3루 주자들처럼 베이스에 붙어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피터 페츠를 압박해 팀과 타자를 도우려는 박유성의 움직임은 지금껏 봐 왔던 그 어떤 선수들보다도 헌신적이었다.
효율적인 지출을 강조해 온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괜히 8억 달러를 쓰며 데려온 게 아니라는 감탄마저 들었다.
‘그래.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돼.’
길게 숨을 고른 코리 베츠가 다시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조이 페런트가 다시 한번 바깥쪽 사인을 냈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이라. 나쁘지 않아.’
초구 스트라이크로 자신감을 되찾은 피터 페츠가 기합성과 함께 공을 내던졌고.
따악!
그 의도에 휘말리듯 코리 베츠가 곧장 방망이를 휘둘렀다.
-아, 이 타구가 좌익수 쪽으로 향합니다.
-제레미 데이비스가 거의 제자리에서 타구를 처리할 것 같은데요.
-이러면 썬은 3루에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태그 업을 시도하기에는 타구가 너무 짧아요.
현지 중계진은 박유성이 홈으로 뛰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늘 높이 솟구친 타구를 기다리며 제레미 데이비스도 같은 생각을 했다.
“설마 이 타구에 뛰겠어?”
그렇게 글러브를 머리 위로 쳐들고 떨어지는 공을 받아냈는데 갑자기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레미! 홈을 봐!”
“……?”
뒤늦게 앞을 확인한 제레미 데이비스는 어이가 없었다.
박유성이 테그 업 준비를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보여주기식일 거라 여겼는데
잠깐 사이에 박유성이 5미터 이상을 치달리고 있었다.
“제레미! 빨리!”
미처 대비를 하지 못한 제레미 데이비스를 대신해 유격수 DJ 깁튼이 손을 들며 소리쳤다.
제레미 데이비스가 공을 넘겨준다면 어떻게든 홈에서 승부를 걸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레미 데이비스는 연결보다 다이렉트 송구를 선택했다.
DJ 깁튼을 거치면 시간이 걸릴 테니 자신의 강한 어깨로 박유성을 잡아내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조이!”
제레미 데이비스가 선 자리에서 있는 힘껏 조이 페런트를 향해 공을 던졌고.
그사이 절반 이상을 내달린 박유성은 조이 페런트가 틀어막고 있는 홈플레이트를 향해 레그 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젠장! 너무 빨라!”
홈플레이트 뒤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미구엘 호네즈가 입술을 깨물었다.
소싯적에는 20개 이상의 도루를 성공시킬 만큼 베이스러닝에 일가견이 있던 그가 보기에 박유성은 마음이 급해 보였다.
차라리 조금 더 가속을 붙여 달렸다가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지금으로써는 홈으로 곧장 날아드는 송구에 잡혀 아웃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프로에서만 43년을 뛴 박유성이 괜히 한 타이밍 빨리 레그 벤트 슬라이딩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뭐야? 벌써?”
주자의 슬라이딩 타이밍에 맞춰 태그 타이밍을 잡고 있던 조이 페런트는 마음이 급해졌다.
송구는 비교적 정확하게 날아오고 있지만 제 자리에서 던진 탓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박유성이 먼저 발로 밀고 들어온다면 테그를 할 여유가 없을지도 몰랐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끝낸 조이 페런트는 잡아놓았던 길목을 버리고 앞쪽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무릎 높이로 떨어지는 송구를 받기가 무섭게 팽이처럼 몸을 돌려 팔을 쭉 뻗었다.
하지만 당혹스럽게도 손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조이 페런트가 홈을 비우고 앞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기가 무섭게 박유성도 바깥쪽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조이! 테그해!”
“빨리 움직여!”
뒤늦게 박유성이 홈을 밟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조이 페런트가 서둘러 몸을 움직여봤지만.
육중한 체격에 포수 장비까지 착용한 조이 페런트보다 박유성의 후속 대처가 더 빨랐다.
재빨리 몸을 돌려 일어난 박유성은 오른발을 쭉 뻗어 홈플레이트 모서리를 콕 찍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구심이 득점을 인정하면서 다저스 파크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써어어어언!”
“이 미친 자식!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게 썬이야! 이게 썬이라고오오!”
“써어어언! 흐흐흑.”
“봤냐? 이게 바로 8억 달러의 플레이야!”
“썬! 사랑해! 써어언!”
스타즈에서 뛸 때는 담담하게 손을 한 번 들어주고 말았겠지만.
박유성은 마치 더 크게 환호하라는 듯이 왼손을 구부려 귓가에 가져다 댔다.
그 쇼맨십에 다저스 파크를 가득 채운 팬들이 박유성의 이름을 부르짖었고.
순식간에 다저스 파크는 박유성의 콘서트장으로 돌변했다.
-들리십니까? 스타즈 파크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박유성 콜이 다저스 파크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진짜 대단한 플레이었습니다. 사실 좌익수가 방심하지 않았다면 홈에서 아웃이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그 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프로 야구를 즐겨 보시는 팬분들이라면 저런 상황을 이미 여러 차례 봐서 아마 박유성 선수가 뛸지도 모른다고 예상하셨을 텐데요. 메이저리그 팬들은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아마 박유성 선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박유성 선수가 무턱대고 홈으로 뛰었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박유성 선수는 제레미 데이비스 선수의 포구 자세를 보고 뛴 겁니다.
-평범한 타구라 해도 3루 주자가 박유성이면 송구 동작을 준비했어야죠. 그게 프로 야구 국룰입니다.
-우스갯소리로 박유성 선수가 받은 8억 달러 중에 2억 달러는 베이스러닝 값이라고도 하던데요. 박유성 선수가 3루에 얌전히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한 자이언츠 구단의 패착이 이 한 점을 내준 거나 다름없습니다.
현지 중계석에서도 박유성의 과감한 홈 대시에 극찬을 쏟아냈다.
-보세요. 제레미 데이비스가 공을 잡기 직전 썬이 스프린터처럼 자세를 취했습니다.
-3루 베이스 코치가 포구와 동시에 썬의 엉덩이를 쳤는데요. 그 신호와 함께 썬이 성난 황소처럼 홈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이미 이때부터 생존 확률이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보통은 벤치에서 사인이 나오지 않는 한 주자가 자의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거든요. 그 시간 동안 야수들은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수비를 할 수 있고요.
-하지만 썬이 곧바로 스타트를 끊어버린 바람에 자이언츠 수비수들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DJ 깁튼이 중간에 공을 달라는 콜을 했는데요.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을까요?
-글쎄요. 지금 보면 DJ 깁튼도 뒤늦게 잔디 쪽으로 달려가 공을 요구했습니다. 썬이 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보다 일찍 자리를 잡았어야죠.
-제레미 데이비스가 DJ 깁튼에게 공을 연결했더라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네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제레미 데이비스의 송구가 정확하게 DJ 깁튼에게 도착하고 그 공을 다시 DJ 깁튼이 완벽하게 조이 페런트에게 연결해야 하는데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타자 주자가 걸음이 느리다고 해도 50퍼센트 미만이겠죠.
-다들 썬이 뛰지 않을 거라는 의식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그런데 3루 주자 썬은 2루타 성 안타로 3루타를 만들 만큼 어마어마한 발을 가지고 있어요. 이런 선수가 대놓고 뛰면 수비수들은 마음이 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제레미 데이비스의 송구까지는 문제가 없다는 거네요.
-솔직히 말해서 송구 자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준비 동작 없이 던져서 힘이 완벽하게 실리지는 않았지만 홈플레이트 앞까지 거의 다이렉트로 날아갔어요.
-그렇다면 이제 썬의 슬라이딩을 이야기할 차례인데요.
-제가 아까 슬라이딩 타이밍이 빠르다고 말했는데요. 썬의 슬라이딩 기술은 제가 생각한 것 이상입니다. 다른 선수들보다 훨씬 더 멀리 미끄러져 들어갔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몸의 방향을 바꾸기까지 했어요.
-짧게 날아온 송구를 처리하기 위해 조이 페런트가 홈플레이트 앞쪽으로 나왔는데요. 보통은 빈 홈플레이트를 바로 노리기 마련이지만 썬은 조이 페런트의 후속 동작까지 예상하고 움직였습니다.
-그게 대단하다는 겁니다. 한국에서 400개가 넘는 도루를 성공시킨 선수인 건 알고 있었지만 스물 두 살의 어린 선수가 저런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슬라이딩 실수로 인해 행운이 따른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닙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재빨리 몸을 일으켜 홈플레이트를 밟지 못했을 겁니다. 저건 철저하게 계산된 플레이입니다. 슬라이딩 타이밍을 빨리 가져간 것도 조이 페런트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던 거죠.
-이로써 다저스가 단숨에 동점을 만들어냈는데요. 경기가 원점이 되긴 했습니다만 경기장 분위기 자체는 다저스가 크게 리드하는 것처럼 바뀌었습니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썬은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다. 그리고 다저스에는 그런 선수가 꼭 필요하다. 앤드류! 당신의 판단이 옳았어요.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썬을 영입한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