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08화
47. 밥값은 해야죠(4)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알렉스 카리오는 내셔널리그 최고의 리드오프 중 한 명으로 꼽혔다.
2028년 이후 4년 연속 3할 타율에 10개 전후의 홈런을 때려내며 30개 전후의 도루를 성공시키는 타자는 메이저리그 전체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서 작년부터 타격 스탠스를 바꿔 장타력을 끌어올리겠다고 했을 때 대다수 자이언츠 팬들은 알렉스 카리오에게 신뢰를 보냈다.
“요즘 안타만 치는 타자들은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기 힘들잖아. 알렉스의 선택을 충분히 이해해.”
“다른 녀석이 그딴 소리를 했다면 방망이를 들고 쫓아겠겠지만 알렉스라면 다르지.”
“나는 올 시즌 알렉스가 3할을 치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줄 거야.”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두고 봐. 알렉스는 어떻게든 3할을 때려낼 거야.”
자이언츠 팬들의 응원 속에 타격 스타일 변경에 성공한 알렉스 카리오는 시즌 막판 멀티 히트를 몰아 때리며 0.303으로 시즌을 마쳤다.
0.311에 달하는 통산 타율에 비하면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홈런을 비롯한 장타 비율이 대폭 늘어나면서 알렉스 카리오의 결정이 옳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해가 바뀐 지금.
알렉스 카리오는 자이언츠 몰락의 원흉이 되어 있었다.
“이번 타석에서 무조건 출루해야 해.”
알렉스 카리오도 마음이 급했다.
본래 슬로우 스타터라 5월까지는 2할 후반대 타율을 유지하는 편이지만 자이언츠 팬들의 기대가 커진 지금은 자신의 스타일만 고수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번 시리즈의 실질적인 목표인 2승을 챙기려면 오늘 경기를 무조건 잡아야 했다.
오늘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루키인 크리스티안 로메스.
2010년생 투수로 199㎝의 큰 키에서 내리찍는 100mile/h(≒160.9㎞/h)의 빠른 공이 위력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풀타임 5년 차에 접어든 알렉스 카리오는 크리스티안 로메스처럼 빠른 공밖에 없는 루키를 상대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조건 실투가 들어올 거야. 변화구는 버리고 빠른 공만 노리자.’
초구에 바깥쪽 높게 빠진 공을 흘려보낸 알렉스 카리오는 2구째 몸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슬라이더까지 피하며 볼카운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따악!
3구째 몸쪽으로 파고든 빠른 공은 타이밍이 맞지 않아 파울이 났지만 4구째 한복판 높게 들어오는 커브를 골라내자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 이제 빠른 공을 던져야지?’
빠른 공을 머릿속에 그리며 알렉스 카리오가 방망이를 끌어당겼다. 그러다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따악!
예상대로 한복판에 몰리듯 들어온 포심 패스트 볼이 방망이에 정확하게 걸렸고.
타구는 쭉쭉 뻗어 센터 쪽으로 날아갔다.
잘하면 3루타를 노려볼 수도 있다고 판단한 알렉스 카리오는 빠르게 발을 굴렀다.
1루 베이스를 돌아 2루로 내달리며 가속을 붙였고.
3루 베이스가 가까워지자 망설이지 않고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시도했다.
촤라라락!
그렇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3루 베이스를 끌어안은 알렉스 카리오는 당당히 몸을 일으켜 유니폼을 털어냈다.
1회 초 선두 타자로 나와 3루타를 때려냈으니 자이언츠 팬들도 어느 정도는 좋아해 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3루 관중석에서는 자이언츠 팬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이 멍청아! 지금 뭘 하는 거야?”
“썬을 봐! 아웃이라고!”
영문을 몰라 하는 알렉스 카리오에게 3루수 미구엘 호네즈가 다가와 상황을 설명했다.
“빠진 줄 알았지?”
“……?”
“네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알렉스. 다만 우리 팀에 괴물이 있다는 게 문제야.”
“서, 설마……?”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알렉스 카리오가 외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2루를 돌기 직전까지만 해도 타구를 쫓아가기 바빠 보였던 박유성이 어느새 펜스 앞까지 가 있었다.
“잡았다고? 방금 그 타구를 정말 잡았다고?”
“나도 믿기지가 않아. 어떻게 저런 수비를 할 수가 있는 거지?”
“정말이야? 정말 잡았어?”
“그렇게 궁금하면 집에 가서 오늘 경기를 다시 돌려 보라고. 친구.”
현지 중계진도 알렉스 카리오를 두둔했다.
-알렉스 카리오가 힘없이 더그아웃으로 돌아갑니다.
-알렉스가 정말 좋은 타구를 만들어냈는데요. 그 타구가 썬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리플레이 화면이 다시 나오는데요. 완벽하게 중견수 키를 넘기는 장타였습니다. 썬의 발이 빠르다고 해도 이 타구를 잡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어요.
-하지만 썬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타구의 방향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뒤로 돌아 펜스까지 일직선으로 내달렸어요.
-그게 포인트입니다. 보통은 중간에 타구의 위치를 확인하느라 지체되게 마련인데 썬은 그러지 않았죠. 마치 머릿속으로 타구의 낙하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최단 거리로 움직였어요.
-더 놀라운 건 저 까다로운 타구를 여유롭게 포구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순간에 허둥대지도 않았고 불필요하게 다이빙 캐치를 하지 않았어요.
-정말이지 수비만큼은 메이저리그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비만요?
-하하. 물론 지금까지 보여준 공격도 최고죠.
-저는 개인적으로 3루까지 쉬지 않고 내달린 알렉스 카리오를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썬의 어깨를 고려해서 타구를 지켜보기보다 베이스러닝에 집중했던 것뿐이니까요.
-만약에 저 타구가 빠졌다면 썬은 곧바로 3루로 공을 던졌을 겁니다. 알렉스 카리오가 조금만 머뭇거려도 아웃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거죠.
-하지만 썬이 말도 안 되는 수비를 보여주면서 알렉스 카리오의 전력 질주가 무의미해졌습니다.
요란한 타격음을 듣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던 피터 페츠도 쓴웃음을 지었다.
박유성의 수비를 처음 봤다면 말도 안 된다며 경악을 했겠지만.
앞서 자이언츠 파크에서도 여러 차례 호수비를 펼치며 자이언츠의 공격 흐름을 끊어놓아서일까.
이제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반면 한복판에 실투를 던지고 눈을 질끈 감았던 크리스티안 로메스는 박유성을 향해 양손 엄지를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썬! 써언!”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크리스티안 로메스의 모습에 박유성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래. 호수비는 의무가 아니야. 고마운 줄 알아야 더 해주지.”
방금 전 타구는 박유성 야구 인생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까다로웠다.
왠지 공이 몰릴 거 같아서 몇 결음 뒤쪽으로 자리를 잡았는데도 타구를 따라잡기 버거웠을 만큼 빠르게 뻗어왔다.
중간에 한 번이라도 고개를 돌렸다면 아마 머리 뒤로 넘어가 버렸을 터.
“프로야구 43년 짬이 있는데 이 정도는 잡아줘야지.”
사방에서 쏟아지는 홈 팬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박유성은 다시 수비 위치를 잡았다.
그러자 카일 홀리데이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저 타구가 나한테 날아왔어야 했는데.”
주전 중견수였던 브라이언 조던의 장기 계약 문제가 삐그덕거릴 때.
카일 홀리데이는 드디어 때가 왔다고 여겼다.
공격보다 수비가 강점인 브라이언 조던의 빈자리라면 자신도 충분히 채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박유성이 다저스에 올지도 모른다는 말들이 많았지만 카일 홀리데이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박유성은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이 노리는 슈퍼스타.
제아무리 다저스라 하더라도 다른 빅마켓 구단들을 따돌리고 박유성을 영입하기란 쉽지 않을 거라고 내다봤다.
그런데 다저스가 최종 협상 대상에 선정된 것으로도 모자라 박유성 쟁탈전의 승자가 되면서 카일 홀리데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박유성은 메이저리그가 공인한 5툴 플레이어.
수비는 물론이고 공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박유성의 입단으로 다시 백업 신세로 전락하게 되자 카일 홀리데이는 데이브 로빈 감독을 찾아가 이적을 요청했다.
하지만 데이브 로빈 감독은 다저스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며 카일 홀리데이를 위로했다.
“썬도 메이저리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매 경기 풀타임을 소화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국 네게도 기회가 주어질 거야. 그러니까 조바심을 버려.”
데이브 로빈 감독의 말대로 주전 좌익수였던 디에고 후리오가 수비 실수를 범하면서 카일 홀리데이에게 기회가 생겼다.
“일단 디에고는 발목이 좋지 않은 걸로 발표될 거야.”
“그럼 DL인가요?”
“DL에는 올리지 않기로 했어. 대신 당분간 좌익수 자리에 기용할 거니까 최선을 다 하라고. 알았지?”
드래프트를 통해 다저스에 입단한 이후 지금껏 중견수 포지션만 소화했지만.
카일 홀리데이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견수로 쌓은 경험이 있는 만큼 코너로 가더라도 수비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좌익수라는 포지션은 중견수와 달리 수비보다 공격력이 강조되는 자리였다.
8번 타순에서 부담 없이 경기를 뛰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내셔널리그 특성상 타격이 약한 타자를 하위 타선에 몰아넣으면 점수를 뽑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앞에서 썬이 해줄 거니까 부담 갖지 마.”
데이브 로빈 감독은 당분간 욕심부리지 말고 박유성에게 묻어가라고 조언했다.
박유성이 기대만큼만 해준다면 카일 홀리데이가 안타를 치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박유성이 시즌 초반부터 메이저리그를 씹어 먹기 시작하면서 카일 홀리데이의 단점이 더 두드러졌다.
송현민을 대신해 2번에 기용된 타자가 단 하나의 안타도 때려내지 못하고 박유성이 만들어낸 찬스를 전부 말아먹고 있으니 다저스 팬들의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수비에서 보여줘야 해.”
카일 홀리데이는 자신에게 타구가 날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앞서 박유성이 보여준 것처럼 자신도 까다로운 타구를 잘 처리해 낸다면 다저스 팬들의 불만이 조금은 잠잠해질 것 같았다.
2번 타자 제이미 데이비스를 삼진으로 잡아낸 크리스티안 로메오가 3번 타자 루이스 넬슨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주자 카일 홀리데이는 좌중간으로 수비 위치를 옮겼다.
좌타자인 클레버 볼트의 타구 분포상 라인선상보다 좌중간 쪽으로 타구가 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위치는 박유성이 이미 커버하고 있는 상태였다.
“카일! 자리를 지켜!”
박유성이 카일 홀리데이에게 소리쳤지만 카일은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데이브 로빈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수비 위치를 조정했다.
“썬을 우중간 쪽으로 옮겨.”
“썬을요?”
“무리해서 코너를 지킬 필요 없잖아?”
대다수 메이저리그 홈런 타자들처럼 클레버 볼트도 잡아당기는 스윙을 선호했다.
그렇다면 좌익선상을 비우고 외야수들을 오른쪽으로 당겨 수비를 촘촘하게 만드는 게 나았다.
데이브 로빈 감독을 대신해 매니 레만 벤치 코치가 수신호를 보내자 박유성이 미간을 찌푸렸다.
“오늘 크리스티안의 공이 좋은데 무리해서 시프트를 걸 필요가 있을까?”
알렉스 카리오에게 큼지막한 타구를 얻어맞긴 했지만.
크리스티안 로메오는 루키답게 씩씩하게 공을 던지고 있었다.
볼넷을 골라낸 루이스 넬슨도 빠른 공을 노렸다가 두 번이나 파울을 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먹힌 타구가 좌익수 쪽으로 날아간다면 허무하게 점수를 내주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가 좌익수로 갈 수도 없고 참…….”
마지못해 자리를 옮긴 박유성은 크리스티안 로메오가 몸쪽 승부를 펼치길 바랐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로메오의 손끝을 떠난 공은 바깥쪽으로 향했고.
따악!
클레버 볼트가 기다렸다는 듯이 방망이를 휘두르면서 말이 씨가 됐다.
“좌익수!”
방망이 끝부분에 걸린 타구가 좌익선상 쪽으로 뻗어 나가자 크리스티안 로메스가 좌익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상시대로 수비를 했다면 평범한 플라이로 끝날 상황.
그런데 카일 홀리데이가 무리하게 좌중간으로 파고들면서 변수가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