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07화
47. 밥값은 해야죠(3)
박유성이 다저스행을 확정 지었을 때.
송현민은 코리 베츠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말했다.
“코리가 간판타자라서요?”
“아니. 코리가 클럽하우스 리더야.”
“리더십이 있다는 거죠?”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야. 쉽게 말해 코리는 단장하고 1대1로 얘기가 가능한 선수야. 국대로 치자면 너 같은 존재지.”
“오호. 그렇군요.”
“물론 너하고는 결이 다르긴 해. 너야 실력이 워낙에 압도적이니까 다들 존중하는 분위기지만 코리는 너만큼 잘하지 않잖아?”
“에이. 코리도 잘하죠. 내셔널리그 MVP 후보군에 끼어 있잖아요?”
“이보세요. 박유성 씨. 내 앞에서는 겸손한 척 안 하기로 한 거 같은데요?”
“저는 뼛속부터 겸손 그 자체입니다만?”
“시끄럽고. 클럽 하우스 리더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실력도 중요하지만 말도 잘해야 하고 오지랖도 넓어야 해.”
“보통은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고 하지 않나요?”
“네 말대로 보통은 그런데 모두가 다 그런 건 또 아니라서. 이게 카르텔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거든.”
“카르텔이요?”
“예를 들자면 내가 있던 레인저스에는 하비에르 벨트란을 중심으로 한 중남미 선수들의 입김이 강했어. 하지만 클럽하우스 리더는 조 플레밍과 브룩 로우였어.”
“형한테 억하심정이 있는 그 브룩 로우요?”
“애당초 그 녀석이 나한테 2루수 자리를 양보한 것도 다 계산된 거였다니까?”
송현민이 입단하기 전까지 레인저스의 주전 2루수는 브룩 로우였다.
레인저스에 지명을 받을 때부터 레인저스 내야의 미래라는 평가를 받았고.
2년간의 마이너리그 생활을 거친 뒤에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이후 거의 매 시즌 골든 글러브 후보로 언급될 만큼 수비에서만큼은 최고라 인정받았다.
그런 브룩 로우가 제 자리인 2루 자리를 송현민에게 내준 가장 큰 이유는 언론 때문이었다.
“그때 삼촌이 자리가 보장된 팀을 원한다고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브룩 로우가 먼저 선수 친 거야. 그땐 존 다니엘 사장이 날 엄청 좋아했거든. 그래서 일단 2루수로 받은 다음에 추후에 중견수로 포변시킬 생각을 한 거지.”
“그런데 형은 다시 외야로 갈 생각 없어요?”
“없어. 눈곱만큼도.”
“왜요?”
“왜긴 왜야. 너 때문이지. 옛말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이 있어. 지금 너 때문에 고교 야구 중견수들이 씨가 마른다는 소리 못 들어봤냐?”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진짜라니까? 뭐 어지간해야 10년 후라도 노려보지. 너 하는 거 보면 마흔 살까지 자리 차지하고 안 내줄 거 같은데 같은 포지션이면 경기나 뛰어보겠냐?”
“왜 또 얘기가 그쪽으로 가요?”
“그러니까 결론은 존 다니엘 사장하고 브룩 로우 둘 다 날 우습게 봤다는 거야. 메이저리그 내야가 어디 좀 빡세냐? 수비 요정 하선이 형도 하루만 못하면 콩이 되도록 까였잖아.”
“그건 프로 야구도 마찬가지인데요, 뭘.”
“암튼 그때 너 아니었으면 지명 거쳐서 외야로 빠졌을 거다. 계속 못 쳤으면 찍소리도 못하고 받아들였을걸?”
“뭘 또 제 덕이에요. 형이 잘 이겨낸 거지.”
“그건 그래. 내가 잘했지.”
송현민의 수비보다 공격이 필요했던 존 다니엘 사장은 브룩 로우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송현민을 영입했다.
그리고 송현민은 레인저스 구단 유일 올스타에 뽑힐 만큼 공격에서 맹활약하며 레인저스 타선을 이끌었다.
“첫 시즌 끝날 때쯤에 감독이 부르더라. 3루로 옮기는 게 어떻겠냐고.”
“3루요? 3루는……?”
“그래. 내 절친인 하비에르 벨트란 자리지. 벨트란이 나이가 있으니까 아예 지명으로 돌리고 내가 3루를 지키는 게 어떻겠냐는 건데 바로 싫다고 했지.”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지 그랬어요?”
“야. 메이저리그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게 그거야. 한국에서처럼 굴었다간 바로 바보 된다. 좋은 건 좋은 거고 싫은 건 싫은 거야. 명확하게 해야 오해도 없고 밥그릇도 지킬 수 있어.”
“어휴 잔소리. 알았으니까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요.”
“내가 아까 말했지? 레인저스에는 크게 두 파벌이 존재한다고. 마이크 고든이라고 백인 애들 중에서 좀 설치는 녀석이 있는데 내가 시즌 초반에 그 녀석하고 좀 부딪쳤거든.”
“알아요. 나 때문에 싸웠다면서요?”
“오호, 기억력 좋네? 맞아. 야구 월드컵 때 너한테 탈탈 털린 녀석 사촌. 암튼 그래서 백인 애들한테는 정이 안 가더라.”
“백인 우월주의 같은 게 있다는 거죠?”
“겉으로는 아닌 척하는데 다 있지. 우리도 길 가다가 외국인 보면 오픈 마인드로 받아주지 못하잖아?”
“그렇긴 하죠.”
“근데 웃긴 게 백인 애들하고 서먹해지기 전에 라틴 애들하고 트러블이 있었거든? 근데 내가 백인 애들하고 거리 두니까 라틴 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들러붙더라.”
“적의 적은 우리 편이라는 건가요?”
박유성이 피식 웃었다. 프로 야구계에도 학연과 지연에 따른 파벌이 존재하다 보니 어떤 상황일지 대충 상상이 갔다.
“팀 내에 아시아 선수라고는 나 하나뿐인데 나도 어딘가는 발을 걸쳐야 하잖아? 그래서 벨트란하고 친해졌지. 그러다 지금 절친이 됐고. 암튼 내가 감독 만나고 오니까 벨트란이 어떻게 알고 부르더라고. 무슨 얘기를 했냐고 추궁하는데 이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여기서 괜히 입 다물고 있다가 나만 병신이 될 것 같은 거야.”
“그래서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1그램의 가감도 없이 정확하게 말했지. 그러니까 벨트란이 웃더라고. 내가 그럴 줄 알았다나? 어쨌거나 그 이후로 내 레인저스 생활이 꼬이기 시작했지.”
하비에르 벨트란이 팀의 최고액 선수라 하더라도 클럽 하우스는 조 플레밍을 비롯한 백인 선수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력은 라틴 선수들이 조금 더 낫지 않았어요?”
“그래서 겨우 균형이 유지된 거야.”
“그럼 지금은 다시 백인 선수들 쪽으로 기울었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벨트란이 다른 팀을 알아보고 있다고 하더라고. 얘기가 길어지긴 했는데 결론은 간단해. 야구 편하게 하려면 클럽 하우스 리더 쪽으로 붙어. 괜히 반대편에 붙었다간 클럽 하우스에서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눈치 보인다.”
박유성을 따라 다저스에 입단한 송현민은 다른 선수들과 친해지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고.
다저스 선수들도 박유성의 멘토라 불리는 송현민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특히나 코리 베츠는 송현민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할 정도로 애정을 드러냈다.
농담으로 자신의 타점을 뺏어가지 말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송현민이 안타를 치고 나가면 그 누구보다 큰 환호성으로 반겨주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아직까지 다른 다저스 선수들과 필요 이상의 친분을 쌓지 않았다.
먼저 다가오는 선수들과는 웃으며 잘 지냈지만.
당분간은 리그 적응에 신경을 써야 한다며 식사 초대는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코리 베츠는 송현민을 대하듯 박유성을 대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충분히 오해가 살수도 있는 대화를 스스럼없이 늘어놓으며 박유성과 공감대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코리. 난 틈이 생기면 뛸 거야. 그러기 위해서 메이저리그에 온 거라고.”
“역시 썬. 넌 정말 멋진 녀석이야. 하지만 나 역시 팀을 위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카일은 데이브가 오래전부터 점찍어 놓았던 선수야. 캠프 때도 다른 선수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보장받았고 언론에서 디에고의 수비를 지적하자마자 곧바로 카일을 기용했어.”
“그게 잘못된 거야?”
“물론 카일은 발도 빠르고 수비 범위도 넓어. 하지만 코너 수비 경험이 부족해. 썬, 너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다고. 그런데 공격적으로도 보여준 게 없잖아?”
“정확하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난 앤드류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어. 우리 팀의 기둥은 네가 되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박유성은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의중을 떠나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방식이 문제였다.
모든 선수들이 한마음이 되어 팀을 위해 뛰는 것과 생각이 다른 선수들을 배제하고 같은 생각인 선수들만 모여 하나가 되는 것.
전자는 지극히 이상적이라 결국 후자의 방식을 따르는 게 수순이겠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대충 하라는 코리 베츠의 뜻에 따라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코리 베츠가 자리를 떠나자 슬그머니 송현민이 다가왔다.
“코리가 뭐래?”
“형도 듣지 않았어요?”
“크흠. 미리 말하지만 난 찬성 안 했다. 그리고 넌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도 말했어.”
“잘했어요.”
“그래서? 안 하겠다고 한 거야?”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코리도 적당히 알아들은 거 같고요.”
“그래도 슈퍼 루키는 슈퍼 루키인가 보네.”
“……?”
“내가 말했잖아. 코리가 클럽 하우스 리더라고. 물론 클럽 하우스 리더라고 해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눈 밖에 나서 좋을 건 없어.”
“언론하고도 친하니까요?”
“그게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팀의 중심 선수가 좋게 말해주면 팬들도 우호적으로 변해. 반대로 나쁘게 말하면 아무리 잘해도 버티기 힘들지.”
“뭐가 복잡하네요.”
“하선이 형이나 정후 형이 괜히 적응을 강조한 게 아냐. 일단 이 분위기에 적응해야 해. 적응 못 하면 진짜 외로워진다.”
박유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송현민이 멋쩍게 웃었다.
그 역시도 시즌 시작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데이브 로빈 감독이 무리수를 둔 만큼 선수들이 담합해서라도 분위기를 바로잡는 게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박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모 야구 드라마에 이런 대사가 있었지. 싸움을 할 거면 야구로 하라고. 이 많은 관중들 앞에서 태업을 하는 건 야구 선수가 할 짓이 아냐.’
박유성이 고개를 들어 천천히 눈을 움직였다.
최대 6만 명까지 수용 가능한 경기장에는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많은 관중이 와 있었다.
그리고 적잖은 관중들이 등번호 1번이 적힌 유니폼과 피켓을 흔들며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크게 숨을 들이켠 박유성이 글러브를 챙겨 들고 외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사방에서 다저스 팬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시청자 여러분. 이 소리가 들리십니까? 지금 모든 관중들이 한 목소리로 썬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하하. 박유성 선수의 인기가 상당하네요.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 금액을 받고 다저스에 입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리를 잡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요.
-그만큼 박유성 선수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저는 박유성 선수에 대해서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지만 미국 현지 언론은 물론이고 국내 일부 언론에서도 박유성 선수가 메이저리그에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그 말인즉 시즌 초반에는 다소 부침을 겪을 거라고 예상했다는 건데요. 이선철 해설위원은 어떻게 보십니까?
-어제 경기까지 박유성 선수의 타율이 0.629인데요. 메이저리그 전체 1위입니다. 홈런도 6개로 1위. 타점도 15개로 1위. 득점도 20개로 1위. 거기에 도루도 12개로 1위. 내셔널리그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 전체 1위를 질주 중인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국내에서 활약할 때보다 성적이 아쉽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고 있는데요.
-글쎄요. 프로 야구와 메이저리그의 수준 차이를 고려했을 때 지금이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선철 해설위원께서 정색하며 말씀하셨는데요. 어디까지나 밈으로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
-이제 자이언츠의 1회 초 공격이 시작됩니다. 자이언츠의 1번 타자는 중견수 알렉스 카리오 선수. 시즌 타율 0.272을 기록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