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04화
46. 썬세이션(10)
현지 중계진도 박유성의 슈퍼 플레이가 오늘 경기의 흐름을 바꿔놓았다고 단언했다.
-다시 한번 볼까요? 먼저 썬의 펜스 플레이부터 봐야 합니다. 디에고 후리오의 옆을 빠져나간 타구가 펜스에 부딪혀서 오른쪽으로 굴렀습니다.
-썬이 달려오던 방향으로 튄 건데요. 썬에게 운이 따랐습니다.
-운이요? 하하.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썬이 오는 방향으로 공이 굴절된 건 좋은 일이죠. 하지만 만약에 썬이 섣불리 타구 예측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공이 좌익 선상 쪽으로 구를 거라고 생각하고 먼저 움직였다면 방금 공을 제때 잡아내지 못했겠죠.
-바로 그겁니다. 보통 저럴 땐 수비수들이 서두르게 마련이거든요. 하지만 썬은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타구가 흐를 수 있는 모든 방향을 고려해 움직였어요.
-심지어 자이언츠 파크는 처음이었을 텐데요.
-그래서 썬의 플레이가 더 대단한 겁니다. 잘 던지던 크리스 반스가 갑작스럽게 무너진 상황에서 수비수가 허둥댔다면 경기 분위기가 자이언츠 쪽으로 넘어갔겠지만 보세요. 자이언츠 팬들은 동점을 만들어냈다는 기쁨보다 2사 3루 기회를 허무하게 날렸다는 허무함에 빠져 있습니다.
때마침 중계 카메라가 자이언츠 파크를 훑었다.
실제로 상당수 관중들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금 전 주루사를 곱씹고 있었다.
-팬들의 실망이 상당히 커 보이는데요.
-솔직히 말해서 방금 전 플레이는 말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루이스 넬슨이 침착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본 헤드 플레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거든요.
-방금 썬의 완벽한 펜스 플레이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 환상적인 어시스트의 비결은 그것뿐만이 아니죠?
-다음 장면을 볼까요? 여기. 썬이 타구를 잡기가 무섭게 곧바로 3루로 내던집니다. 단 1초, 아니 0.1초의 망설임도 없었어요. 처음부터 썬은 타구를 잡으면 3루로 던지겠다는 생각을 했던 겁니다.
-중계 플레이를 위해 나온 앵커맨에게 연결하는 게 정석인데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3루로 뛰는 걸 막는 게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2사 이후에 연속 안타를 맞았고 클린업으로 타선이 이어졌습니다. 좌투수인 크리스 반스 입장에서 등 뒤에 주자를 두고 공을 던지는 부담은 상당했을 겁니다.
-동점 주자가 홈으로 들어가는 건 막을 수가 없으니까 최소한 타자 주자를 2루에 묶거나 3루로 뛰는 걸 잡겠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거네요.
-바로 그겁니다. 썬의 수비 능력이야 여러 국제 대회를 통해 검증이 끝난 상태지만 솔직히 메이저리그에 적응하는 동안에는 다소 소극적인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보세요.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송구로 타자 주자를 잡아내면서 자이언츠로 급격히 넘어가려던 경기 분위기를 다시 되찾아왔습니다.
-3대 0이었던 경기가 3대 3 동점이 됐지만 오늘 경기는 여전히 다저스가 리드하는 느낌입니다.
-오히려 루이스 넬슨이 3루에서 죽으면서 자이언츠는 조급해졌을 겁니다.
-만약에 루이스 넬슨이 3루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아마 크리스 반스가 추가 실점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레드삭스 시절에도 잘 던지다가 연속 안타로 무너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요.
-설사 실점을 하지 않고 이닝을 막았다 하더라도 애를 먹었겠죠.
-오늘 경기에 앞서 크리스 반스는 다저스 팬들을 위해 기필코 승리를 따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오늘 경기에 대한 부담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죠.
-비록 썬에게 호되게 혼이 나고 있지만 피터 페츠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니까요. 만에 하나 경기가 뒤집혔다면 다저스 벤치에서도 투수 교체를 고려했을 것 같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경기는 크리스 반스의 다저스 데뷔전이기 이전에 썬의 데뷔전입니다. 8억 달러를 쓰고 데려온 슈퍼 루키의 데뷔전을 허무하게 망치고 싶진 않겠죠.
-심지어 썬이 연타석 홈런을 때려냈으니까요.
-어쨌거나 오늘 경기는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현지 중계석은 클린업이 타석에 들어서는 이번 4회에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정작 4회 공방은 조용히 끝났다.
4회 초 동점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피터 페츠는 빠른 공 위주의 레퍼토리를 변화구 중심으로 바꿨다.
“스트라이크!”
포심 패스트 볼을 예상하고 타석에 들어섰던 5번 타자 바비 그린은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공을 잡아당겼다가 좌익수 플라이로 물러났고.
아쉬운 수비를 보여주었던 디에고 후리오 역시 공을 쫓아다니다 3구 삼진을 당했다.
7번 타자 마크 터너가 풀카운트까지 끌고 가긴 했지만.
따악!
기습적으로 날아든 빠른 공에 타이밍이 밀리면서 2루수 땅볼을 치고 말았다.
“후우…….”
4회 초 공격이 삼자범퇴로 끝나자 크리스 반스가 굳은 얼굴로 마운드에 올랐다.
박유성이 루이스 넬슨을 잡아준 덕분에 경기가 뒤집히지는 않았지만 피터 페츠가 기세를 끌어올리는 걸 보니까 에이스로서 무책임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마운드로 다가와 크리스 반스의 엉덩이를 때렸다.
“……?”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 크리스 반스의 눈에 박유성이 들어왔다.
평소 마운드 주변에 다른 야수들이 허락 없이 들어오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을 보며 씩 웃는 박유성을 보니까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뭐야? 길을 잃은 거야? 아니면 나 대신 던지려고?”
“크리스. 내가, 아니 우리가 무조건 역전시켜 줄게요.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던져요. 알았죠?”
“…….”
격려와 함께 주먹을 내미는 박유성을 보며 크리스 반스는 피식 웃고 말았다.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로 군림하던 시절에 이제 막 메이저리그로 넘어온 루키가 이런 짓을 했다면 주제넘은 짓 하지 말라고 눈총을 쐈을 텐데.
자신의 천적이나 다름없던 박유성이 점수를 내주겠다고 하니까 고마움을 넘어 안도감이 들었다.
“정말이지? 오늘 경기 무조건 이기게 만들어줄 거지?”
“그럼요. 다음 타석 때 두고 봐요. 무조건 피터 페츠를 끌어 내릴 테니까요.”
“좋아. 너만 믿는다, 썬.”
“우리도 크리스를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크리스답게 던져요.”
4회 말에도 크리스 반스의 제구는 흔들렸다.
클레버 볼트와 제이슨 보우저, DJ 깁튼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칠 테면 쳐보라는 배짱 투로 타자들을 찍어누르면서 결과적으로 세 개의 아웃카운트를 챙기는 데 성공했다.
크리스 반스에게 강했던 클레버 볼트는 1-2에서 바깥쪽 빠른 공을 건드렸다가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났고.
내셔널리그의 마크 스테리라 불릴 만큼 선구안이 좋은 DJ 깁튼도 연달아 들어오는 몸쪽 공에 2루수 앞 땅볼을 치고 말았다.
6번 타자 DJ 깁튼은 초구를 건드려 1루수 플라이로 잡혔다.
“좋아, 좋아! 잘했어! 크리스!”
긴장 어린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던 데이브 로빈 감독이 박수를 치며 크리스 반스를 반겼다.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클린업 타선을 삼자범퇴로 돌려세웠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자이언츠의 게빈 캐플러 감독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다저스가 대타를 쓸까?”
“투수 타석에서요? 글쎄요. 아직 투구수는 여유가 있습니다.”
“4회까지 몇 개지?”
“51구입니다.”
“그거밖에 안 던졌어?”
“이닝 초반에 투구수가 적었습니다. 아직 구속도 떨어지지 않았고요.”
“흠…….”
게빈 캐플러 감독이 전광판을 바라봤다.
피터 페츠의 투구수는 73구.
이제 5회인데 80구를 코앞에 두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번 5회에 상위타선으로 연결된다는 점이었다.
다저스의 톱타자는 8억 달러의 사나이, 박유성.
오늘 경기에서 피터 페츠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때려낸 아시아의 괴물이었다.
그래서 게빈 캐플러 감독은 크리스 반스 타석 때 대타 카드를 쓸 때 자연스럽게 투수를 바꾸고 싶었다.
에이스급 투수는 최소 6이닝 이상을 보장하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오늘 경기를 잡으려면 피터 페츠를 길게 끌고 가는 것보다 불펜을 투입하는 게 나아 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다저스 벤치는 게빈 캐플러 감독의 바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스트라이크, 아웃!”
오히려 8번 타자 로이 스미스와 9번 타자 크리스 반스가 연이어 삼진을 당하면서 피터 페츠의 기를 살려주었다.
-2사 주자 없는 가운데 박유성 선수의 세 번째 타석입니다. 앞선 두 타석은 홈런. 그리고 홈런. 현재 박유성 선수가 메이저리그 전체 홈런 1위를 기록 중에 있습니다.
-다른 구장에서도 홈런 소식이 들려오고 있는데요. 연타석 홈런은 박유성 선수뿐이라고 하네요.
-기왕이면 박유성 선수가 계속해서 홈런 1위 자리를 지켰으면 좋겠는데요. 한국 시간으로는 아메리칸리그 쪽 경기가 내셔널리그 경기보다 일찍 시작되기 때문에 쉽지 않아 보입니다.
-글쎄요.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박유성 선수가 또 몰아치기에 일가견이 있거든요? 특히나 지금처럼 부담 없이 타석에 들어설 때는 장타가 잘 터지니까요.
-이번 타석에서 박유성 선수가 또다시 일을 낼 거라는 말씀이신데요.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처럼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평소보다 넓게 스탠스를 잡았다.
송현민과 코리 베츠가 피터 페츠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냈으니 테이블 세터로서의 역할에 충실해도 좋겠지만 기왕이면 이번 타석 때 피터 페츠를 강판시키고 싶었다.
‘일부러 도발하는 건가?’
그런 박유성의 속내를 알아챈 조이 페런트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요구했다.
투 스트라이크를 잘 잡은 만큼 박유성과 정면 승부를 하느니 거르는 한이 있더라도 까다롭게 상대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앞서 연속 삼진을 잡아낸 피터 페츠가 그 생각에 동의해 줄 리 없었다.
‘설마 내가 또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다면 실망인데.’
잠시 미간을 찌푸렸던 피터 페츠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박유성을 앞에 두고 포수와 실랑이를 벌이는 건 바보짓이었다.
차라리 그 여력까지 끌어다가 박유성에게 집중하는 게 나았다.
피터 페츠가 자신의 리드를 받아들였다고 착각한 조이 페런트는 바깥쪽으로 빠져 앉아 미트를 들어 올렸다.
그 순간 피터 페츠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피터 페츠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한복판을 지나 몸쪽으로 꺾이듯 들어갔다.
‘이런 미친!’
자신의 사인을 완벽하게 무시한 투구에 조이 페런트가 눈을 부릅뜨고 미트를 움직였다.
포수로서 피터 페츠의 행동은 용서하기 힘들었지만.
수많은 홈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사인 미스로 공을 뒤로 빠뜨리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가까스로 미트를 움직여 공을 붙잡으려던 찰라.
후우웅!
바람 소리가 귓가에 울리더니
따아악!
시커먼 방망이가 새하얀 공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 공은 자이언츠 파크를 완전히 반으로 쪼갠 뒤에 전광판 상단을 때리고 떨어졌다.
-와우.
-썬이 피터 페츠를 상대로 오늘 경기 세 번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보이나요. 지금 제 팔에 닭살이 돋았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썬이 잘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제 기대를 완전히 뛰어넘었습니다.
키킹 동작을 생략한 채 번개 같은 스윙으로 초대형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은 자이언츠 파크를 다시 한번 침묵 속에 빠뜨렸다.
그리고 이 홈런에 힘입어 다저스는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을 7대 3으로 승리하고 기분 좋은 스타트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