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401화 (401/412)

타자 인생 3회차! 401화

46. 썬세이션(7)

-6구는 파울. 볼카운트는 여전히 쓰리 볼 투 스트라이크입니다.

-피터 페츠 선수가 바깥쪽을 한번 노려봤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놓치지 않았습니다.

“젠장.”

3루 쪽 관중석으로 휘어져 나가는 타구를 보며 피터 페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지간한 메이저리그 타자들은 꼼짝도 못 하는 까다로운 공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걷어내는 모습이 그저 얄밉기만 했다.

“후우…….”

조이 패런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보다 공이 살짝 빠져 들어오기에 끌어당겨 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그 공이 코앞에서 사라지고 나니까 간담이 서늘해졌다.

‘풀카운트라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설정했어. 어지간한 공에는 절대 속지 않을 거라고.’

7구 사인을 앞두고 조이 패런트가 뜸을 들였다.

그러자 오늘 선발로 출전한 백업 포수 로이 스미스가 조이 패런트의 심정을 이해하듯 중얼거렸다.

“저러면 던질 공이 없지.”

“정말? 정말 던질 공이 없어?”

“지금 썬은 초집중 상태예요. 어지간한 유인구는 끝까지 지켜볼 거라고요.”

지난 스프링 캠프 때 박유성의 적응을 도우면서 로이 스미스는 박유성에 대해 나름의 연구를 했다.

박유성이 좋아하는 공과 싫어하는 공.

박유성이 좋아하는 코스와 싫어하는 코스.

박유성이 좋아하는 카운트와 싫어하는 카운트.

박유성이 좋아하는 유형의 투수와 싫어하는 유형의 투수.

아메리칸 리그 MVP를 두고 다투는 양키즈의 마크 스테리와 레드삭스의 로비 마르티네즈는 장단점이 명확한 편이었다.

마크 스테리는 지나치게 공을 오래 지켜보다가 볼카운트가 몰리는 경우가 많고.

로비 마르티네즈는 반대로 적극성이 과해 볼카운트를 까먹곤 했다.

물론 두 선수 모두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 결과 MVP급 선수로 성장했지만.

마크 스테리를 상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라는 조언과 로비 마르티네즈에게는 절대 초구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말라는 조언은 여전히 유효한 편이었다.

로비 마르티네즈보다 침착하다고 평가받는 다저스의 간판타자 코리 베츠도 초구에 비슷하면 방망이를 휘두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루상에 주자가 있을 때 코리 베츠가 타석에 들어서면 상대 팀 투수들은 높은 확률로 몸 쪽이나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유인구를 던졌다.

코리 베츠 역시 유인구에 속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노력한다고 해서 타자의 타고난 습성을 완전히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박유성은 흠잡을 게 없었다.

대부분의 타자들처럼 변화구보다 빠른 공을 더 잘 때려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화구에 약한 것도 아니었다.

빠른 공을 공략할 때 7할 이상의 타율이었다면 변화구는 5할 정도랄까.

그마저도 눈에 익은 변화구에는 잘 속지도 않았다.

몸 쪽 공보다 바깥쪽 공을 더 잘 때려내지만 그 편차도 크지 않았다.

애당초 타율 자체가 높다 보니 박유성의 약점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게다가 볼카운트에 딱히 구애받지 않았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라 하더라도 자신의 히팅 존 안으로 공이 들어오면 자신 있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방금 전 공도 마찬가지.

보통 불카운트 상황에서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이 들어오면 일단 지켜보게 마련이지만 박유성은 백도어성으로 들어올 거라는 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방망이를 휘둘러 자이언츠 배터리를 한숨 짓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어떤 공을 요구할 수 있을까.

‘어려워. 뭘 던져도 얻어맞을 것 같아.’

피터 페츠가 던질 수 있는 구종은 크게 패스트 볼과 슬라이더, 그리고 체인지업이었다.

한창때만 못하긴 하지만 최고 구속 98mile/h(≒157.7㎞/h)까지 찍히는 포심 패스트 볼은 여전히 위력적이며.

투심 패스트 볼은 메이저리그 우완 투수들 중에 최고라 꼽힐 정도였다.

여기에 좌타자 몸 쪽으로 날카롭게 꺾여 들어가는 커터까지 구사하니 패스트 볼 계열만으로도 어지간한 좌타자는 충분히 요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박유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100mile/h(≒160.9㎞/h)이 넘는 빠른 공도 완벽한 타이밍에 때려내는 이 괴물 같은 타자에게 섣불리 빠른 공으로 승부를 걸었다간 다시 한번 장타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고 이미 여러 차례 보여준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다시 쓰기도 위험했다.

그나마 커브라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만.

‘그러려면 먼저 빠른 공을 찔러 넣어야 해.’

조이 패런트도 한참 만에 빠른 공 사인을 냈다.

코스는 바깥쪽.

일단 박유성의 시선을 바깥쪽으로 유도한 뒤에 몸 쪽 커브로 허를 찔러볼 생각이었다.

궁지에 몰린 피터 페츠도 군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따악!

바깥쪽 높게 들어온 공을 박유성이 다시 한번 걷어내면서 자이언츠 파크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썬과의 승부가 길어지고 있습니다.

-썬을 상대로 벌써 7구를 던졌는데요. 피터 페츠의 작년 타석당 투구 수가 4.1구였으니까 다음 공을 던지면 거의 두 타자를 상대하는 셈입니다.

-풀카운트 상황에서 연거푸 파울을 만들어냈는데요. 앞선 공과 지금 공 모두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이었지만 썬이 전부 대응하고 있습니다.

-사실 풀카운트라면 히팅 존을 넓게 보는 게 기본이긴 합니다. 다만 썬처럼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까지 전부 커버하기란 쉽지 않은데요. 오늘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선수가 맞나 싶을 만큼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볼카운트가 꽉 찬 가운데 8구째 승부가 이어집니다. 피터 페츠. 이번에는 몸 쪽 하이 패스트 볼을 던졌는데요. 파울입니다.

-와우, 방금 공은 사실 조금만 늦게 반응했더라도 헛스윙이 나왔을 공이었는데 썬이 완벽하게 걷어냈습니다.

7구까지 끌려온 피터 페츠가 선택한 8구는 몸 쪽 높은 빠른 공.

타자의 눈높이보다 조금 높게 공을 던지면 열에 아홉은 방망이가 끌려 나오는 코스였다.

그 계산대로 박유성도 피터 페츠의 손에서 공이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허리를 돌렸다.

그러다 공이 계속 솟구치자 요령껏 스윙 궤적을 바꿔 다시 한번 파울을 만들어냈다.

“좋아! 피터!”

“그렇게 던져!”

“썬을 잡아내라고!”

두 손을 꼭 움켜쥐고 그 대결을 지켜보던 자이언츠 팬들이 피터 페츠를 향해 환호성을 쏟아냈다.

관중석에서 보기에는 피터 페츠가 빠른 공으로 박유성을 윽박지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피터 페츠는 진이 다 빠졌다.

“X발. 또 파울이라고?”

혹여나 다시 파울이 나오면 골치 아파질까 봐 일부러 조이 패런트의 요구보다 더 높게 공을 던졌건만.

박유성의 기술적인 타격에 9구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썬. 계속 파울을 때려낼 생각은 아니지?”

조이 패런트도 박유성을 보며 앓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4, 5선발급 투수를 상대로 박유성이 투구 수를 늘리는 거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지금 마운드 위에 서 있는 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군에 포함되는 피터 페츠였다.

최근 2년간 부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연달아 파울을 낼 만큼 호락호락한 투수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피터 페츠의 자존심을 위해 쉽게 승부를 해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공이 너무 좋아서 쫓아가기도 벅찬데요?”

“정말이야?”

“그럼요. 피터 페츠잖아요.”

적당히 피터 페츠를 추켜세우며 박유성은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슬쩍 전광판 쪽을 바라봤다.

투구 수 49.

40구로 시작했던 피터 페츠의 투구 수가 9개 늘어나 있었다.

‘메이저리그 한 타석 최다 투구 수 기록이 22구였던가?’

메이저리그 타자들이라면 호쾌하고 공격적인 스윙을 할 거라 생각하지만.

타석에서 끈질기게 파울을 만들어내며 투수를 물고 늘어지는 유형의 타자도 적지 않았다.

박유성도 1회차 때는 커트 신공으로 상대 투수들의 투구 수를 늘리는 데 도가 텄다.

1회차 시절 얻어맞은 사구 중 절반 가까이가 커트 신공에 당한 투수들의 보복구였으니 말 다 한 셈.

마음 같아서는 피터 페츠를 상대로 메이저리그 한 타석 최다 투구 수 기록을 갈아치우고 싶었지만 피터 페츠가 그때까지 버텨줄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10구는 채우자.’

박유성이 방망이를 들어 올리자 조이 패런트가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어깨높이로 날아든 97mile/h(≒156.1㎞/h)의 빠른 공까지 걷어낼 만큼 타격감이 좋은 박유성을 상대로 커브를 던지겠다는 생각은 깨끗이 지웠다.

‘칠 만한 공을 줘서 범타로 유도하는 게 최선이야.’

조이 패런트의 사인을 확인한 피터 페츠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집을 부려 던진 몸 쪽 하이 패스트 볼이 실패한 이상 조이 패런트의 리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며 피터 페츠가 투구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박유성은 어렵지 않게 구종을 알아냈다.

‘체인지업.’

패스트 볼 계열을 던질 때 비해 살짝 내려온 오른 팔꿈치가 유난히도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바깥쪽이겠지.’

자이언츠 베터리의 사인을 완전히 읽은 박유성은 피터 페츠가 투구판을 박차기가 무섭게 오른발을 쭉 뻗어 내디뎠다.

그러고는 히팅 포인트를 앞쪽으로 끌고 나가서 떨어지려는 공을 먼저 퍼 올렸다.

따아악!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솟구치자 좌익수 제이미 데이비스가 글러브를 낀 팔을 들어 올렸다.

타격음과 타구의 발사각, 그리고 박유성의 파워를 고려했을 때 제 자리에서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금세 떨어질 줄 알았던 타구가 계속해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뭐야?”

뒤늦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 제이미 데이비스는 계속해서 공을 쫓았다.

그렇게 조금씩 낙구 지점과 거리를 좁혀갔지만.

탁!

예상치 못한 벽에 가로막혀 움직이지 못했다.

-아, 이 타구가 계속 뻗어 나갑니다!

-이것도 넘어갈 것 같은데요?

-좌익수 뒤로! 좌익수 뒤로! 좌익수가 있는 힘껏 뛰어올랐습니다만 타구는 좌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집니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1회 초에 이어 3회 초에도 다시 한번 솔로 홈런을 때려냅니다!

“후우…….”

만약을 대비해 3루까지 빠르게 내달렸던 박유성은 긴 한숨을 내쉬며 홈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송현민과 양손 하이 파이브를 나눈 뒤에 다시 한번 코리 베츠와 홈런 세리머니를 펼쳤다.

“썬!”

벤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던 크리스 반스도 더그아웃 앞까지 다가와 박유성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크리스.”

박유성이 가볍게 주먹을 부딪치며 웃었다. 그러자 크리스 반스가 따라 웃으며 말했다.

“내가 더 고맙지.”

오늘 경기를 앞두고 크리스 반스는 두 점을 원했다.

한 점은 큰 것 한 방에 뒤집힐 수 있으니 최소 두 점만 뽑아준다면 어떻게든 승리를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그 점수를 박유성 혼자서 만들어줬으니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반면 피터 페츠는 2 대 0으로 바뀐 전광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X발.”

경기를 하다 보면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가서 잡히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빗맞은 타구가 안타가 되면서 점수를 내주기도 한다지만.

지금처럼 밀려 나간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 버리면 투수로서 할 게 없었다.

“피터. 괜찮아. 아직 3회야.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다고.”

조이 패런트가 마운드로 올라와 독려했지만 박유성을 잡아내고 다저스를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던 피터 페츠의 의지는 이미 반쯤 꺾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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