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400화
46. 썬세이션(6)
바가지 안타성 코스에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던 크리스 반스는 미친 듯이 달려와 공을 낚아채는 박유성을 보며 환호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직접 외야 쪽으로 걸어가 더그아웃으로 내려오는 박유성과 손뼉을 부딪쳤다.
“2루수 뒤쪽에서 수비할까요?”
“2루수 뒤쪽에서?”
“오늘 크리스 공이 좋잖아요. 내 자리까지 타구가 올 것 같지 않은데요?”
“하하. 그렇다면 그냥 더그아웃에 들어가서 쉬는 게 어때?”
“그럴까요?”
크리스 반스의 호투는 2회에도 이어졌다.
4번 타자 클레버 볼트를 상대로 몸쪽 슬라이더를 던졌다가 팔꿈치 보호대에 스치면서 무사 1루 상황을 맞았지만.
5번 타자 제이슨 보우저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뒤에 6번 타자 DJ 깁슨을 2루수 땅볼로 유도하며 4-6-3의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냈다.
“좋았어, 쏭!”
“이 정도는 기본이지.”
“올해는 내셔널리그 올스타를 노려도 되겠는데?”
“당연하지. 아메리칸리그 올스타가 내셔널리그에서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된다고.”
까다로운 바운드를 잘 처리해 준 송현민에게 크리스 반스가 박수를 보냈고.
송현민도 웃으며 크리스 반스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를 치르는 다저스 선수들과 달리 자이언츠 선수들은 피터 페츠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젠장, 무사 1루에서 점수를 내지 못하면 어쩌라는 거야?”
“피터. 진정해. 다음 이닝에는 동점을 만들 거야.”
“무슨 수로? 3회에 기대할 수 있는 타자가 누가 있어?”
“피터. 3회는 내 타석부터 시작된다는 걸 잊은 거야?”
“시끄러우니까 리드나 확실히 해. 벌써 투구 수가 40구라고. 이대로는 완투는 고사하고 7이닝도 버티기 힘들어.”
짜증을 내고 마운드로 올라가는 피터 페츠를 보며 조이 패런트도 미간을 찌푸렸다.
3회 초 다저스의 공격을 앞둔 스코어는 1 대 0.
여전히 한 점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
아메리칸 리그를 통틀어 최고의 투수라 불리던 크리스 반스와 내셔널리그에서도 손꼽히는 에이스 피터 페츠의 맞대결이니 점수가 많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지만.
경기 내용과 분위기는 한 점 차 이상의 격차가 느껴질 만큼 다저스가 앞서가고 있었다.
크리스 반스가 6명의 타자를 상대로 던진 공은 고작 21구.
사사구가 하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닝당 10.5구로 끊고 있었다.
반면 피터 페츠는 1회와 2회 8명의 타자를 상대하며 40개의 공을 던졌다.
선두타자였던 박유성에게 홈런을 얻어맞은 이후로 피안타 없이 다저스 타선을 잘 틀어막고 있긴 하지만.
7번 타자 마크 터너를 상대로 쓸데없이 삼진을 잡으려 들다가 풀카운트 접전 끝에 볼넷을 내줄 만큼 안정감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타자들에게까지 신경질을 부리고 있으니 오늘 경기를 뒤집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후우……. 일단 아웃 카운트부터 늘리자.”
첫 번째 아웃 카운트는 쉽게 잡혔다.
내셔널리그로 넘어온 후 처음으로 타석에 들어선 크리스 반스는 피칭에 집중하기 위해 아예 타격을 포기했고.
피터 페츠는 한복판에 연거푸 빠른 공을 꽂아 넣으며 크리스 반스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크아아아!”
투수가 투수를 삼진으로 잡아내는 건 내셔널리그에서 흔한 일이었지만 피터 페츠는 마치 크리스 반스를 도발하듯 주먹을 움켜쥐며 호들갑을 떨었다.
“저 자식이?”
조용히 더그아웃으로 들어가려던 크리스 반스가 피터 페츠를 노려봤다.
다저스로 이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용히 지내는 중이지만.
크리스 반스는 저런 뻔한 도발을 그냥 넘길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때 박유성이 웃으며 다가와 말했다.
“피터도 힘들겠어요.”
“……?”
“크리스를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으니까 저렇게까지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요. 경기가 끝나고 웃는 건 크리스가 될 겁니다.”
순간 크리스 반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레드삭스의 베테랑 선수들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들어대는 이 슈퍼 루키가 도무지 얄밉지 않았다.
“내가 웃는 거 확실한 거지?”
“그럼요. 타자들을 믿어요, 크리스. 우린 강합니다.”
“좋아. 공격은 타자들에게 맡길게. 그러니까 썬, 한 방 더 날려 봐.”
“크리스. 음료를 마시면서 쉬고 있어요. 내가 최대한 시간을 끌어볼게요.”
만약 송찬우나 김혜성이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치미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다.
박유성이 시간을 끌어보겠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직 박유성의 맛(?)을 다 보지 못한 크리스 반스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그아웃으로 걸어갔다.
그사이 박유성이 천천히 타석으로 들어섰다.
-1사 주자 없는 가운데 다저스의 톱타자, 박유성 선수의 두 번째 타석으로 이어집니다. 첫 타석은 홈런. 개인 통산 메이저리그 첫 홈런과 올 시즌 메이저리그 첫 홈런을 동시에 달성했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첫 타석부터 홈런을 때리면 3안타 이상을 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요. 오늘 경기에서는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피터 페츠 선수도 앞선 타석의 복수를 하고 싶을 텐데요.
-투수인 크리스 반스 선수를 3구 삼진으로 잡아냈으니 자신감에 찰 수는 있겠지만 상대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섣불리 덤볐다간 다시 장타를 얻어맞을지 모릅니다.
-프로 야구에서도 2사 이후에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승부를 걸었다가 안타를 허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는데요. 피터 페츠 선수가 초구를 던집니다. 초구는 파울! 바깥쪽 빠른 공에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끌려 나왔습니다.
-흠……. 이거 왠지 냄새가 나는데요?
-냄새요?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인데 박유성 선수가 건드렸거든요. 왠지 이번 타석 때 피터 페츠 선수가 고생을 좀 할 것 같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예상대로 박유성은 2구째 날아든 몸쪽 투심 패스트볼까지 걷어내며 첫 타석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대기 타석에서 지켜보던 송현민이 씩 웃었다.
“짜식. 시동 걸었냐?”
프로 야구에서 박유성이 볼에 방망이를 내밀면 스타즈 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육성 응원을 시작했다.
“하나요!”
“둘이요!”
박유성의 파울 개수에 맞춰 경기장이 떠나가라 악을 지르면 마운드에 선 투수는 진이 빠져 제대로 공을 던지지 못했다.
하지만 박유성의 스타일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이 일부러 파울을 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첫 타석에 홈런을 친 타자들은 보통 스윙이 커지게 마련.
그걸 노리고 일부러 보더 라인으로 피칭을 유도한 게 제대로 먹혔다고 착각했다.
‘그래. 썬도 인간이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빨갛게 불이 들어온 두 개의 스트라이크 램프를 확인한 뒤 조이 패런트는 몸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 사인을 냈다.
“좋아.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데?”
피터 페츠도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으로 박유성을 속일 수만 있다면.
앞서 재수 없게 얻어맞았던 홈런도 어느 정도 털어낼 것 같았다.
그러나 피터 페츠가 이를 악물고 던진 회심의 체인지업에 박유성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뒤이어 들어 온 몸쪽 투심 패스트볼도 마찬가지.
2구보다 공 1개 정도 깊이 들어오자 아예 타석 밖으로 한발 물러서며 타격을 포기했다.
-아, 이번 공도 빠집니다.
-지금 볼 카운트가 단숨에 균형을 되찾았는데요. 이제 피터 페츠도 여유를 부릴 수가 없습니다.
-반면 썬은 초구와 2구를 공격적으로 때려낸 뒤에 볼 2개를 골라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은 다시 썬이 쥐게 됩니다.
-연달아 몸쪽 공이 들어왔으니까 또다시 몸쪽을 선택하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인데요.
-하지만 썬은 오늘 바깥쪽을 넓게 보고 있습니다. 초구와 2구 모두 스트라이크 존에서 빠진 공이었지만 썬은 망설임이 없었어요.
-이럴 때 피터 페츠는 어떤 공을 던져야 할까요?
-글쎄요. 풀카운트로 가는 건 위험하니까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지는 게 좋겠죠.
-피터 페츠의 주 무기라면 빠른 공과 투심 패스트볼일 텐데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둘 다 던지기 어려울 겁니다. 투심은 이미 두 개나 보여줬고 포심도 파울이 났으니까요.
현지 중계석의 예상대로 조이 패런트와 피터 페츠는 5구를 두고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조이 패런트가 낸 사인에 피터 페츠가 연거푸 고개를 가로저은 것이다.
“진짜 제멋대로네. 저럴 거면 뭐하러 사인을 받는 거야?”
내셔널리그 최고의 포수 소리를 듣던 조이 패런트는 자존심이 상했다.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했던 호세 가르시아는 물론이고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 투수인 크리스 반스까지도 자신을 최고의 포수라고 인정해주고 있는데 피터 페츠만 저러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자도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어서 조이 패런트는 마음대로 던지라는 사인을 냈다.
‘진즉 그랬어야지.’
조이 패런트의 항복을 받아낸 피터 페츠는 포심 패스트 볼 그립을 잡았다.
코스는 몸쪽 높게.
기습적으로 하이 패스트 볼을 붙이면 박유성이 엉겁결에 방망이를 휘두를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뻔한 패턴은 2회차 시절에 숱하게 겪어서 이미 이골이 난 상태였다.
후앗!
피터 페츠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눈높이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박유성은 다시 허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공은 조이 패런트의 미트를 때리고 그대로 백네트 쪽으로 빠져나갔다.
“젠장!”
조이 패런트가 제대로 포구조차 하지 못하자 피터 페츠가 악을 썼다.
만약 3루에 주자가 있었다면 꼼짝없이 한 베이스를 내줬을 터.
저런 주제에 메이저리그 최고 포수라고 거들먹거리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조이 패런트도 예상을 벗어난 공에 완벽하게 대응하긴 어려웠다.
-지금 전광판에 98mile/h(≒157.7㎞/h)이 찍혔는데요. 오늘 경기에서 가장 빠른 공이 나왔습니다.
-코스가 살짝 위험하긴 했지만 조이 패런트 선수가 잡지 못할 공은 아니었는데요. 사인 미스였을까요?
-앞서 피터 페츠 선수가 계속 고개를 젓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반대 투구가 나온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이번 공마저 빠지면서 풀카운트가 됐는데요.
-이렇게 되면 심플하게 가야 합니다.
-볼넷을 내주더라도 유인구로 승부를 걸거나 아니면 그냥 안타를 맞을 각오로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하지만 피터 페츠 선수가 욕심을 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경기를 지켜보던 국내 팬들도 무조건 파울이 날 거라고 봤다.
└바깥 쪽 공 던지다 파울 남. 100퍼임.
└무조건 파울이죠.
└저러다 파울 한 10개 맞아봐야 정신 차릴 듯?
└과연 피터 페츠가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요? ㅋㅋ
└에라 모르겠다 한복판 포심 던질지도 모름. ㅋㅋ
└그러면 바로 연타석 홈런이쥬? ㅋㅋ
└무조건 파울이라니까요. 내기해도 좋음
그 예상대로 피터 페츠는 바깥쪽으로 걸쳐 들어가는 백도어 슬라이더를 던졌고.
따악!
박유성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걷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