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98화
46. 썬세이션(4)
후앗!
바람 소리와 함께 날아든 공이 한복판을 지나 바깥쪽으로 향했고.
박유성은 그대로 방망이를 멈춰 세운 채로 공을 지켜봤다.
퍼억!
메이저리그에서 프레이밍으로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조이 패런트가 팔을 쭉 뻗어 빠져나가는 공을 붙들었지만 구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젠장. 너무 빠졌어.’
조이 패런트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안쪽으로 공이 들어왔다면 어떻게든 마법을 부려봤겠지만.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에서 2개 이상 빠져나가는 공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경기를 두고 메이저리그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거라고 포장했던 중계석의 반응도 냉담했다.
-피터 페츠의 초구가 바깥쪽에 꽂힙니다.
-96mile/h(≒154.5㎞/h)의 패스트볼인데요. 무브먼트는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스트라이크 존을 많이 벗어났습니다. 썬이 속아주기에는 너무 빠졌어요.
-일단 썬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 공 하나를 뺀 것 같은데요. 글쎄요. 썬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피터 페츠에게 공을 돌려준 조이 패런트는 2구째 다시 한번 바깥쪽 사인을 냈다.
이번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하면 피터 페츠가 원하는 몸쪽 승부가 힘들어질 것 같았다.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피터 페츠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퍼억!
초구보다 더 빠지는 공을 던져 불만을 드러냈다.
“피터 녀석. 또 시작이네.”
3루 쪽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이브 로빈 감독이 쓰게 웃었다.
다저스에 있을 때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인을 내면 멋대로 던졌는데 그 버릇을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마이크 프라이어 투수 코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저렇게 되면 몸쪽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습니다.”
“전국으로 생중계되고 있는데 설마하니 빈볼을 던지겠어?”
“연달아 공이 빠졌습니다. 몸쪽 공이 제구가 되지 않더라도 핑계를 댈 수 있을 겁니다.”
“흠. 일단 썬에게 조심하라고 일러줘.”
데이브 로빈 감독의 주문을 받은 매니 레만 벤치 코치가 박유성에게 직접 수신호를 보냈다.
그 제스처를 유심히 바라보던 박유성은 뒤늦게 의미를 알아채고 피식 웃었다.
‘홈플레이트에 붙은 것도 아닌데 설마하니 그렇게까지 하겠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박유성은 처음보다 타격 위치를 반 발자국 정도 뒤로 잡았다.
오늘 구심의 성향으로 보아 바깥쪽 공에 인색한 것 같으니 몸쪽을 조금 더 비워두더라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그런 박유성의 속내를 읽은 조이 패런트가 다시 한번 바깥쪽 사인을 냈지만 피터 페츠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체 언제까지 도망칠 거야? 난 썬과 싸우기 위해 자이언츠에 왔어. 그러니까 겁쟁이 같은 리드는 그만두라고.”
조이 패런트가 특유의 제스처까지 보이며 바깥쪽을 고집하자 피터 페츠는 아예 발을 빼버렸다.
그러자 경기장을 찾아온 관중들의 입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뭐 하는 거야? 승부해! 승부하라고!”
“조이! 썬을 출루시키면 안 돼!”
“정신 차려! 이제 1회야!”
“썬을 잡아! 삼진으로 잡으라고!”
평소였다면 투수에게 쏟아질 야유였지만 초구와 2구가 연거푸 빠져서일까.
자이언츠 팬들은 조이 패런트가 일부러 볼을 요구했다고 오해했다.
“젠장할.”
조이 패런트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피터 페츠의 공이 자꾸 빠져서 컨디션의 문제인가 싶었는데 일부러 빠지게 던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조이 패런트도 더 이상 바깥쪽 사인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후우. 좋아. 한번 가보자.’
크게 숨을 들이켠 조이 패런트가 신중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코스는 몸쪽 허리 높이로.
구종은 투심 패스트 볼.
한복판으로 몰리지만 않는다면 박유성의 방망이를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트라이크를 던지면 안 돼. 볼을 던져.’
피터 페츠가 욕심내지 않도록 조이 패런트는 마지막으로 미트 위치까지 고정했다.
하지만 피터 페츠는 조이 패런트의 사인을 건성으로 봤다.
몸쪽 사인이 나온 순간부터 그의 시선은 박유성의 옆구리 쪽을 향해 있었다.
이제 막 메이저리그에 올라온 선수들은 넘치는 의욕에 피터 페츠의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겠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1회차와 2회차, 그리고 3회차까지 무려 43년 간 프로에서 뒹굴다 보니 투수의 눈빛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면 맞아주기도 힘든데 참…….’
방망이를 들어 올린 박유성은 언제든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했다.
그러다 피터 페츠가 투구 동작에 들어가기가 무섭게 타석 뒤로 한 발 물러났다.
“……!”
갑작스러운 박유성의 행동에 피터 페츠는 투구 밸런스가 흔들렸고.
퍼억!
손에서 빠져나간 공은 박유성이 서 있던 타석 위쪽을 지나 벡네트에 꽂혔다.
“X발 뭐야!”
“피터! 이 개자식! 지금 뭐 하는 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상황에 다저스 더그아웃에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송현민은 한국어로 쌍욕을 퍼부으며 방망이를 든 채로 마운드로 올라가려고 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괜찮다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현민이 형! 스톱! 경기 중이에요. 퇴장당하고 싶어요?”
“야! 너 괜찮아?”
“안 맞았으니까 됐어요.”
“되긴 뭐가 돼? 저 새끼 일부러 저런 거잖아?”
송현민이 박유성을 대신해 씩씩거렸다.
아시아 선수라고 얕보며 빈볼을 던질 때마다 실력으로 이겨내겠다고 꾹 참았지만 친동생같은 박유성이 당하는 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피터 페츠와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형. 우리는 실력으로 승부해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고요.”
“후우…….”
송현민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박유성의 말처럼 대한민국의 수많은 야구 팬들이 이 경기를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화가 가라앉았다.
그사이 더그아웃을 박차고 나간 데이브 로빈 감독은 구심에게 격렬하게 항의를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당장 저 빌어먹을 녀석을 퇴장시켜요!”
“데이브. 진정해요. 정말 맞추려던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투구 직전에 썬이 타석을 벗어났어요.”
“그게 뭐가 문제입니까? 만약에 썬이 타석에 서 있었다면 머리를 맞았을 거라고요!”
“알겠으니까 제발 진정해요.”
데이브 로빈 감독은 흥분한 선수들을 달래기 위해 더 열을 냈고.
그런 데이브 로빈 감독을 어렵사리 달랜 구심이 마운드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피터 페츠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노! 노! 아니에요. 공이 손에서 빠졌을 뿐이라고요.”
피터 페츠는 증거라며 흥건하게 젖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구심이 오기 전에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거지만.
그 상황을 보지 못한 구심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박유성이 피터 페츠를 향해 소리쳤다.
“피터! 괜찮은 거지?”
“……뭐?”
“몸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냐?”
“……?”
갑작스러운 박유성의 걱정에 피터 페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몸쪽으로 위협구를 붙이려다가 실패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박유성에게 동정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실수라고 어필하던 입장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구는 것도 웃길 노릇이었다.
“피터. 정말 어디 다친 거야?”
“썬이 타석에서 벗어났잖아요. 순간적으로 밸런스가 흔들렸습니다. 그게 다예요.”
“일단 다저스에서 항의를 했으니까 옐로카드는 줄 거야. 그리고 한 번 더 비슷한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무조건 퇴장이야. 알았어?”
“걱정 마요.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마운드를 내려 온 구심은 다시 박유성에게 다가갔다.
8억 달러라는 계약으로 메이저리그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이 슈퍼 루키에게도 상황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다.
“썬. 괜찮아? 다친 곳은 없지?”
“조금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타석을 벗어난 거야?”
“그냥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느낌?”
“아니에요. 아무것도.”
박유성이 대충 웃어넘기려고 하자 구심이 다시 물었다.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그냥 불안한 느낌이 들었어요. 방금 전 공을 던지기 전에 피터 페츠의 몸이 제 쪽으로 틀어져 있었거든요.”
“몸이? 그랬어?”
“크게 틀어진 게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그저 투수의 위치를 기준으로 스탠스를 잡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르죠.”
만약 다른 타자가 이런 식으로 떠들어댔다면 구심은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3년간 7할이 넘는 타격을 선보이며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의 러브콜을 받은 8억 달러의 사나이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몸쪽 공이 들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거야?”
“투 볼이고 바깥쪽 공이 계속 빠졌잖아요. 볼넷으로 거를 게 아니라면 몸쪽으로 승부를 걸 거라고 생각했죠. 그 정도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잖아요?”
“아니, 내가 말을 잘못했어. 그러니까 빈볼을 예상했다는 거지?”
“왠지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컨트롤을 억지로 하려다 보면 가끔 엉뚱한 곳으로 공이 날아가니까요.”
“…….”
“그래도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에요. 오늘 이 경기를 전 세계 야구팬들이 지켜본다면서요?”
박유성이 씩 웃었다.
그 모습이 꼭 메이저리그 데뷔 타석에 서서 신이 난 루키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구심은 박유성을 따라 웃을 수가 없었다.
박유성의 말처럼 전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는 개막전 경기에서 피터 페츠가 빈볼을 던지려 했다는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피터 페츠는 실수라고 말했지만.
오늘 경기가 끝나면 전 세계 언론에서 조금 전 상황을 돌려보며 분석을 쏟아낼 것이다.
만약 그 결과 고의성이 있다고 판단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SNS 계정을 새로 만들어야겠지. 어쩌면 한동안 SNS를 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구심은 다시 다저스 더그아웃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데이브 로빈 감독에게 1차 경고를 할 수밖에 없었음을 설명했다.
“피터 페츠를 퇴장시키면 썬에게도 불똥이 튈 겁니다. 피터 페츠는 썬이 타석을 벗어나서 밸런스가 흔들렸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피터 페츠는 베테랑이에요. 메이저리그에서 몇 년을 뛰었는데 고작 그런 움직임에 흔들린다는 겁니까?”
“말은 안 되지만 실수라고 우길 근거는 됩니다. 썬이 직접 공을 맞은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한 번만 더 위협구를 던지면 퇴장시키겠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해를 좀 해주세요.”
“하아…….”
어렵사리 데이브 로빈 감독의 양해를 구한 구심은 반대편 자이언츠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까와 달리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1차 경고입니다. 한 번만 더 위협구를 던지면 그때는 바로 퇴장입니다.”
“실수였습니다. 제구가 흔들리는 거 봤잖아요?”
“날 바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그런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줄 알아요?”
“그게 아니라…….”
“개막전이고 전 세계 야구팬들이 지켜보는 경기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겁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썬을 향해 쓸데없는 짓을 한다면 그때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명심해요.”
“…….”
좋게 웃으며 넘어가려고 했던 게빈 케플러 감독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판정도 경기의 일부라고 할 만큼 심판이 경기에 끼치는 영향은 상당했다.
그런데 심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구심이 경기 초반부터 등을 돌렸으니 오늘 경기를 잡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자이언츠 더그아웃에서 몸을 돌린 구심은 다시 마운드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불안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피터 페츠를 향해 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경고야. 한 번만 더 위험한 공을 던지면 그땐 퇴장이야!”
피터 페츠가 다시 억울하다며 하소연했지만 구심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경기를 지켜보는 모든 이들이 피터 페츠가 위협구를 던졌다는 걸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