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97화
46. 썬세이션(3)
갑작스러운 공격에 조이 패런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박유성이 애써 잊고 있었던 나쁜 기억을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지난 프리미어 12 때.
조이 패런트는 마운드에 선 피터 페츠와 호흡을 맞췄다.
당시 조이 패런트는 에릭 지터 감독에게 지명타자로 출전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유는? 고작 다저스 투수의 공을 받을 수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거라면 실망인데?”
“고작이 아닙니다. 에릭. 지난달까지만 해도 우린 경기장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고요.”
“누구에게 남아 있다는 거지?”
“당연히 피터죠. 저는 지금껏 대표팀의 주전 포수로서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하지만 피터는 달라요. 이번 대회에 합류할 때부터 배터리의 호흡을 강조해 왔어요. 그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조이. 피터가 널 쉽게 신뢰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네 말대로 지난 몇 년을 적으로 싸워왔는데 대표팀이 되었다고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잖아. 안 그래?”
“그래서 포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겁니다. 오늘 경기만큼은 누가 나가더라도 저보다 나을 테니까요.”
자이언츠 팬들에게는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불리고 있지만.
대다수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그런 것처럼 조이 패런트 역시 한 성격 했다.
특히나 다저스를 상대로는 최전방에 서서 싸웠다.
월드 시리즈에 나가려면 내셔널리그 최고의 빅마켓 구단이자 지구 라이벌인 다저스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피터 페츠와도 자주 부딪쳤다.
언론에서 피터 페츠를 내셔널리그 사이영상감이라고 추켜세울 때마다 조이 패런트는 코웃음을 치며 팀 동료인 호세 가르시아보다 못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호세는 29시즌 사이영상 투수입니다. 이미 최고의 성적으로 사이영상을 차지했어요. 그런데 나이가 조금 많다는 이유로 나이가 어린 투수들에게 밀리는 건 참을 수가 없네요. 메이저리그는 나이가 아니라 실력으로 증명하는 곳입니다. 나이 어린 유망주를 보고 싶다면 마이너리그에 가야죠.”
자이언츠 팬들은 할 말은 하는 조이 패런트를 자랑스러워했고.
다저스 팬들은 걸핏하면 다저스를 걸고넘어지는 조이 패런트에게 치를 떨었다.
다저스의 에이스로 활약했던 피터 페츠 역시 조이 패런트와 말조차 섞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에릭 지터 감독은 고작 선수 간의 감정 때문에 라인업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상대는 한국이야. 썬이 이끄는 한국이라고. 최선을 다해도 모자란데 라인업을 바꾸자니. 다들 제정신인 거야?”
코칭스태프의 권유마저 무시한 에릭 지터 감독은 베스트 라인업을 내놓았지만 경기는 14 대 3, 대한민국 대표팀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대한민국전 대패 이후 일부 언론에서 에릭 지터 감독의 용병술을 꼬집었다.
앙숙이나 다름없는 배터리를 그대로 출전시킨 게 잘못이라며 에릭 지터 감독을 패배의 원흉으로 꼽았다.
그때마다 조이 패런트는 SNS와 인터뷰를 통해 에릭 지터 감독은 미국 대표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한국은 강팀입니다. 리그의 수준은 메이저리그에 못 미칠지 몰라도 한국 대표팀은 세계 최강입니다. 지난 LA 올림픽부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프리미어 12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표팀은 단 한 경기도 패배하지 않고 전승으로 우승을 달성해 냈습니다. 그런 팀을 상대로 최고의 엔트리를 내는 건 당연한 겁니다. 아쉬운 건 일부 선수들이 에릭 지터 감독님의 열정을 따라주지 못했다는 거죠.”
선수로서 존경하는 에릭 지터 감독을 두둔하는 과정에서 조이 패런트는 자연스럽게 박유성의 편을 들게 됐다.
“일부 언론에서 썬이 피터 페츠를 도발했다고 하는데 그런 적 없습니다. 포수로서 지금까지 여러 번 썬을 상대해 왔지만 썬은 단 한 번도 시비를 걸거나 구심의 판정에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루틴이요? 루틴을 걸고넘어진다면 걸리지 않을 타자가 없을 겁니다.”
미국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언론과 가장 친한 조이 패런트가 상황을 정리하자 화살은 다시 피터 페츠에게 향했고.
다저스 구단이 박유성 쟁탈전의 최종 승자가 되면서 피터 페츠는 다저스를 떠나야 하는 처지에 몰리게 됐다.
“잘됐어. 기왕이면 아메리칸 리그로 꺼져 버리라고.”
피터 페츠의 에이전트가 피터 페츠의 공개 이적을 선언했을 때 조이 패런트는 당분간 볼 일이 없을 거라며 좋아했다.
하지만 피터 페츠가 아메리칸 리그보다 내셔널리그에서 뛰고 싶다고 말하면서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왜 하필 내셔널리그야? 타격에 욕심이라도 있는 거야?”
“지난 2년간 좀 부진했잖아. 지명 타자 제도를 쓰는 아메리칸 리그는 부담스러우니까 내셔널리그에 남고 싶은 거지.”
조이 패런트는 피터 페츠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챘다.
지명타자 제도를 사용하는 아메리칸 리그의 경우 강타자를 추가로 한 번 더 만나야 하지만 내셔널리그는 달랐다.
리그 규정상 투수가 타석에 서야 하다 보니 상대 팀에서 선발 투수를 교체하기 전까지는 숨돌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최근 들어 피장타율이 치솟고 있는 피터 페츠 입장에서는 지명타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타격에 의지가 없는 투수를 상대하는 게 성적 관리에 도움이 될 터.
“아메리칸리그든 내셔널리그든 상관없어. 자이언츠만 아니면 돼.”
피터 페츠가 갈 만한 내셔널리그 팀이 많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이 패런트는 피터 페츠와 한솥밥을 먹게 될 거라는 생각을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구단이 원한다고 해도 자이언츠 팬들이 피터 페츠를 받아들일 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유성 영입전 패배를 만회해야 했던 자이언츠 구단은 피터 페츠에 공개적인 관심을 내보였고.
자이언츠를 응원하던 팬들 역시 자존심보다 성적을 선택했다.
“조이. 상황이 이렇게 됐어.”
“후우…….”
“답답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이해해 줘. 이대로 가면 우린 다시 다저스의 꽁무니만 쫓게 될 거야. 그럼 경기장을 찾아오는 팬들이 줄어들 거라고. 그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알지?”
“팬들이 줄어들면 매출이 줄어들고 스폰서 계약도 줄어들겠죠. 부담을 줄이기 위해 좋은 선수를 포기해야 할 테고요.”
“그래. 솔직히 지출을 줄이고 리빌딩을 준비하자는 의견이 적지 않았어. 하지만 난 반대했지.”
“저도 의미없는 리빌딩은 반대입니다.”
“그래. 비록 썬을 놓쳤지만 우린 여전히 강팀이야. 여기에 피터 페츠가 합류한다면 더 강해질 거야.”
“피터 페츠는 다저스의 에이스였으니까 다저스의 전력을 더 약화시킬 수 있을 테고요.”
“역시. 조이는 말이 잘 통해서 좋아.”
파르한 제이디 사장과의 독대를 통해 현실을 받아들인 조이 패런트는 피터 페츠와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피터 페츠도 클럽하우스 리더나 다름없는 조이 패런트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난 일은 잊고 잘 지내보자.”
“좋아. 피터. 자이언츠에 온 걸 환영해.”
언론과 팬들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조이 패런트는 직접 도우미를 자처하며 피터 페츠의 적응을 도왔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국의 주요 언론들은 올 시즌 피터 페츠가 15승 전후의 성적으로 옛 명성을 되찾을 거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박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최근 부진하긴 했지만 피터 페츠는 여전히 메이저리그 최고의 선발 중 한 명이에요. 그리고 조이 패런트는 내셔널리그 최고의 포수죠.”
“내셔널리그뿐만 아니라 아메리칸리그를 통틀어도 투수 리드는 조이 패런트가 최고일걸?”
“그래서 부딪칠 거라는 거예요. 피터 페츠는 다저스에 있을 때 본인 위주로 피칭을 해왔어요. 반면 조이 패런트는 경호 형만큼이나 리드가 좋죠.”
“그래도 피터 페츠가 조이 패런트에게 맞추지 않을까?”
“에이스 출신인데 그게 가능할까요? 그리고 조이 패런트는 수비가 좋은 거지 공격력이 좋은 건 아니잖아요?”
“하긴. 비스트 포지처럼 타격이 정교한 편은 아니지.”
조이 패런트가 롤모델이라며 입버릇처럼 언급한 비스트 포지는 공수 겸장으로 유명했다.
2012년 시즌에는 0.336의 타율과 24개의 홈런, 103타점으로 맹활약하며 팀을 월드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고 내셔널리그 MVP까지 수상했다.
자이언츠 팬들도 조이 패런트를 제2의 비스트 포지라 부르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지만 애석하게도 공격력은 비스트 포지를 따라가지 못했다.
부상으로 인한 기복 속에서도 통산 타율 0.302를 기록한 비스트 포지와 달리 조이 패런트의 정교함은 포수로서 나쁘지 않은 0.270에 머물러 있었다.
반면 피터 페츠는 다저스에서 뛰는 6년간 통산 81승 47패에 평균 자책점 3.16을 기록했다.
평균자책점이 2점대였던 시즌이 단 한 번뿐이라 리그 에이스급 투수가 아니라는 지적도 적지 않지만.
지난 6년을 기준으로 했을 때 피터 페츠보다 평균자책점이 낮은 내셔널리그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니까 조이 패런트의 리드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거지?”
“적어도 전반기까지는요. 피터 페츠가 조이 패런트를 완전히 인정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럴듯한데? 이 얘기, 다른 선수들과 공유해도 되는 거지?”
“일단 제 타석부터 보고 나서요.”
“뭐야? 확실한 거 아니었어?”
“제가 야구의 신도 아닌데 어떻게 확신을 해요?”
“그래도 방법은 있는 거지?”
“방법이야 있죠. 그러니까 잘 지켜봐요.”
송현민은 박유성이 타석에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서 자이언츠 배터리를 흔들거리고 예상했지만 박유성은 훨씬 더 손쉬운 방법을 썼다.
바로 트래시 토크.
‘다니엘이 말싸움에서 밀리면 얕보인다고 했으니까.’
지난 3년간 다니엘 브리토와 붙어 다니며 메이저리그에 대비해 온 박유성에게 조이 패런트의 말을 받아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만 다니엘 브리토처럼 초장부터 으름장을 놓진 않았다.
“몸 쪽 사인을 낼 거면 제대로 내요. 지난번처럼 이상하게 날아오면 이번에는 가만있지 않을 거니까.”
박유성이 방망이를 들어 올리며 경고를 날렸다. 그러자 조이 패런트가 쓰게 웃더니 바깥쪽 사인을 냈다.
‘초구부터 빼라고? 장난해?’
마운드에 선 피터 페츠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을 합쳐 박유성을 박살 내자고 할 때는 언제고 초구부터 바깥쪽 공이라니.
이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이 패런트도 몸 쪽 사인을 낼 수가 없었다.
‘몸 쪽 공 운운하는 걸 보면 몸 쪽 공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해. 게다가 평소보다 몸 쪽을 열어뒀다고. 애매한 공은 얻어맞을 확률이 높아.’
투수가 몸 쪽으로 던지는 공은 크게 두 종류였다.
스트라이크를 잡기 위해 최대한 보더 라인에 걸치듯 던지는 공과 타자를 압박하기 위해 몸 쪽으로 깊숙이 찌르는 공.
만약에 박유성이 아니라 다른 타자였다면 보여주는 느낌으로 몸 쪽 깊숙한 공을 요구했겠지만.
프리미어 12 때 이미 한차례 난리를 친 박유성에게 초구부터 그런 공을 던졌다간 난리가 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몸 쪽 공에 강한 박유성을 상대로 인코스 스트라이크를 노리는 건 자살 행위였다.
‘일단 바깥쪽으로 빼야 해.’
잠시 뜸을 들인 조이 패런트가 다시 한번 바깥쪽 사인을 냈다. 그러고는 마지막에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믿고 던지라고 요구했다.
“젠장할.”
내심 사인이 바뀌길 기대했던 피터 페츠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금 전 제스처는 조이 패런트 특유의 시그니처였다.
맞으면 자신이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던지라는, 오만함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조이 패런트의 저 시그니처 사인을 팬들과 언론이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만약 여기서 고개를 저으면 언론에서 불화설을 떠들어댈 터.
자이언츠로 이적해 아직 보여준 게 없는 피터 페츠 입장에서는 언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 피터 페츠가 투구 자세를 잡았다.
그러고는 조이 패런트의 미트보다 더 바깥쪽으로 힘껏 공을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