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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393화 (393/412)

타자 인생 3회차! 393화

45. Adios(9)

마이클 리드에게는 도망치지 말자고 큰소리를 쳤건만.

막상 투 스트라이크를 잡게 되니까 자신도 모르게 요행을 바라게 됐다.

“크리스. 뭐 하는 거야? 이벤트전일 뿐이야. 몇 점을 내주더라도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편하게 승부해.”

애써 마음을 다잡은 크리스 반스가 포수석을 바라봤다.

그러자 로이 스미스가 다시 몸 쪽 낮은 코스로 미트를 들어 올렸다.

좌투수가 좌타자를 상대로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은 역시나 몸 쪽 낮은 공.

저 코스로 제대로 박아 넣을 수만 있다면 박유성도 어쩌지 못할 것 같았다.

‘좋아. 해보자.’

크게 숨을 들이켠 크리스 반스는 공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모든 신경을 다해 로이 스미스의 미트 속으로 공을 꽂아 넣었다.

하지만 박유성은 크리스 반스가 호흡을 고를 때부터 몸 쪽 공일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190㎝가 넘는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타자의 무릎 높이로 내리꽂는 공을 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이 벨트 높이로만 들어오더라도 인 앤드 아웃 스윙으로 때려내겠지만 무릎 높이라면 추가로 공을 퍼 올리는 노력이 필요했다.

1회차 시절의 박유성이었다면 어퍼 스윙으로 대응했다가 내야 뜬공이나 외야 플라이가 났을 테고.

2회차 시절의 박유성이라면 인 앤드 아웃 스윙을 고집하다가 타이밍을 놓쳐서 헛스윙을 했겠지만.

지난 3년간 프로 야구를 씹어 먹으면서 2회차 막판에 깨우친 타격 메커니즘을 완성한 박유성은 자연스럽게 방망이를 빼돌려 매섭게 파고드는 공을 때려냈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뻗어 나가자 크리스 반스는 외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공까지 때려내는 게 어이가 없긴 했지만 타구의 궤적상 홈런은 아닐 것 같았다.

하지만 방망이 중심에 제대로 걸린 타구는 계속해서 뻗어 나가더니 오른쪽 담장을 그대로 넘겨 버렸다.

-아! 이게 넘어갑니다! 홈런! 박유성!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똑똑히 보여줍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정말 완벽에 가까운 공을 던졌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보시죠. 지금 몸 쪽 낮게 159㎞/h짜리 포심 패스트볼이 들어왔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이 공을 놓치지 않고 때려냈습니다.

-대다수의 좌타자들은 저 코스에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박유성 선수는 다릅니다. 저 코스의 타율이 무려 9할입니다.

-게다가 빠른 공에 대해서도 9할에 가까운 타격을 뽐내고 있는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가 최고의 공을 던졌습니다만 하필이면 박유성 선수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에 가장 좋아하는 구종으로 승부를 걸었다고 봐야겠네요.

-차라리 이 공을 먼저 던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는데요. 그만큼 잘 던지고 잘 쳤습니다.

빠른 발걸음으로 그라운드를 돌고 들어온 박유성은 2번 타자 장태수와 가볍게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그걸 어떻게 친 거야?”

“너는 저 공 들어오기 전에 무조건 쳐. 알았지?”

“야. 나도 맘먹으면 칠 수 있거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가 잘할 수 있는 걸 해. 내 공백은 네가 책임지겠다며? 그럼 제대로 보여주라고.”

박유성이 포스팅을 통해 다저스 입단이 확정되면서 스타즈 구단은 박유성의 대체자 찾기에 나섰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팀 득점의 60퍼센트를 책임졌던 박유성의 빈자리를 채운다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수비는 둘째 치고 혼자서 MVP급 타자 두 명만큼 때려낸 공격력은 도저히 계산이 서지 않았다.

결국 스타즈 구단은 3년간 2번 타순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쳤던 블레이크 테일러와 결별을 결정했다.

박유성이라는 사기 캐릭터가 계속 팀에 남아 있다면 모르겠지만.

박유성이 떠나는 만큼 다른 구단들처럼 공격적인 외국인 선수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준수한 수비력과 다니엘 브리토만큼의 펀치력을 갖춘 조이 헤럴드를 영입해 클린업 타선을 보강하고 나니까 테이블 세터가 초라해졌다.

블레이크 테일러의 빈자리는 지난 3년간 백업 내야수로 활약했던 오진욱에게 맡기기로 한 상황.

다만 생에 첫 풀타임에 톱타자 자리까지 맡기는 건 무리라는 지적이 많았다.

그렇다고 다니엘 브리토를 톱타자로 복귀시키자니 적잖은 나이가 걸렸다.

30대 중반으로 넘어가는 다니엘 브리토는 체력과 부상 관리를 해줘야 하는 상황.

차선책으로 조이 헤럴드를 1번 타자로 기용하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도루를 기대할 만큼 걸음이 빠르지 않은 데다가 우투우타라 김석률 감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트레이드를 해야 할까요?”

“일단 태수에게 한번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장태수 선수요?”

“태수가 다른 1번 타자들처럼 많은 도루를 해주지는 못하겠지만 부족한 기동력은 진욱이가 채워주면 되니까요. 1번 타자가 매 이닝 톱타자로 나서는 것도 아니니까 태수를 전진 배치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구단 내에서는 장태수를 장래의 클린업 타자로 여기고 있지만 김석률 감독의 판단은 달랐다.

박준수를 필두로 다니엘 브리토와 장영호, 이동엽으로 이어지는 중심 타선은 프로야구 12개 구단 중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여기에 장타력 하나만 보고 뽑은 조이 헤럴드까지 가세했는데 장태수까지 보태는 건 지나쳐 보였다.

“태수야. 1번을 칠래, 아니면 9번을 칠래?”

“네? 갑자기 9번이요?”

“결정은 네가 해라.”

김석률 감독은 장태수에게 두 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마땅한 1번 타잣감을 구할 때까지 1번을 맡는 것.

다른 하나는 최일준에게 1번을 양보하고 최일준의 자리인 9번으로 내려가는 것.

“너무 극단적인데요?”

“어쩔 수 없어. 그러게 열심히 하지 그랬냐?”

“감독님. 저 진짜 억울합니다. 동엽이가 잘한 거지 제가 못한 게 아니에요.”

“그럼 연봉 협상 때는 왜 동엽이만큼 달라고 그랬어?”

“그야…….”

“너 욕심 많은 거 잘 안다. 3번이나 4번 치고 싶어 하는 것도 알아. 하지만 지금은 클린업에 네 자리가 없어. 동엽이도 7번으로 밀렸잖아.”

“그럼 경호 선배님 9번으로 내리고 제가 8번 치면 안 될까요?”

“경호가 너보다 득점권 타율이 더 높은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후우…….”

“9번으로 내려가면 개인 성적 챙기기 힘들 거야. 얼마 남지 않은 타점은 앞에서 동엽이나 경호가 다 쓸어 담겠지. 둘 다 걸음이 빠른 편이 아니라서 단타를 쳐서는 타점 올리기도 힘들 테고.”

“1번이면 달라질까요?”

“일준이가 있잖아. 평소처럼 일준이가 희생번트 대주면 타점 챙기기는 좀 더 낫겠지. 그리고 넌 병규 같은 2번 타자가 딱이야.”

“그럼 2번 시켜주십시오!”

“진욱이도 적응할 시간을 줘야지. 대신 올해는 우익수나 좌익수로 좀 더 출장시켜 주마.”

“정말이죠?”

“그래. 그러니까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라.”

장태수를 1번 타자로 추천한 건 다름 아닌 박유성이었지만.

김석률 감독은 일부러 자신의 결정이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장태수는 박유성에게 전화를 걸어 큰소리를 쳤다.

“유성아. 이번 시즌 타격왕하고 출루왕은 내가 먹는다. 두고 봐라.”

-내가 감독님께 말씀드려서 너 9번 보낼 거니까 꿈 깨라.

“짜식. 내가 너보다 잘할까 봐 겁나냐? 쫄려?”

-하아. 태수야. 헛소리할 시간에 가서 웨이트나 더 해. 1번 타자는 하위 타자들보다 1년에 80타석 정도 더 나오는 거 알지? 너처럼 설렁설렁 했다간 여름 가기 전에 2군행이다.

박유성이 3년 연속 MVP와 타격 8관왕을 차지하자 국내 야구팬들은 한목소리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유성은 탈아시아급 선수임. 국내에서 뛰는 거 자체가 손해임.

└일본에서 자꾸 리그 수준 운운하는데 호주에서 7할 6푼을 쳐도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 달려들걸?

└트윈스 팬이라서가 아니라 진짜 박유성 메이저리그 씹어먹는 거 보고 싶음.

└박유성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스타즈 팬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박유성은 더 큰 물에서 놀아야 함.

└저도 스타즈 팬인데 인정합니다. ㅠ.ㅠ

└유성아. 그동안 고마웠어. 메이저리그 가서도 잘 해. ㅠ.ㅠ

지난 시즌을 시작하기 전 기회가 된다면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보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대다수 스타즈 팬들이 박수를 보내주긴 했지만.

프로 야구 역대 신인 최고 계약금(20억)을 받고 입단했는데 5년도 4년도 아닌 고작 3년 만에 개인의 꿈을 위해 팀을 떠난다는 게 솔직히 염치없었다.

물론 구단주인 신상욱 회장은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어깨를 두드려 줬지만.

송현민도 메이저리그 진출 당시에 구단 및 모기업 관계자들과 갈등을 빚었던 만큼 별 탈 없이 다저스와 계약한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래서일까.

박유성은 스타즈 팬들에게 선보이는 마지막 경기에서 장태수가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길 바랐다.

“태수야! 침착하게!”

박유성이 크게 소리치자 장태수도 크게 심호흡을 했다.

비록 동기이긴 하지만 박유성은 대한민국 최고의 야구 선수.

나아가 세계 최고의 야구 선수가 될 거라 평가받는 괴물이었다.

‘그래. 상대는 크리스 반스야. 덤비지 말자.’

장태수가 방망이를 들어 올리자 로이 스미스가 바깥쪽 사인을 냈다.

장태수에 대한 데이터가 많지 않은 만큼 일단 공 하나를 빼서 지켜보자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난 전지훈련 때 박유성의 맨투맨 코칭을 받으며 타격 메커니즘을 완전히 뜯어고친 장태수는 그 공에 속지 않았다.

“좋아, 좋아! 잘하고 있어!”

“나이스 장태수!”

동료들의 독려에 신이 난 장태수는 2구째 몸 쪽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까지 골라내며 기세를 올렸다.

그러고는 3구째 몸 쪽으로 빠른 공이 들어오자 최단 거리로 방망이를 끌어내 공을 맞혔다.

따악!

방망이 안쪽에 걸린 타구가 1루 쪽 파울 라인 밖으로 벗어나자 1루 쪽 관중석에서 탄식이 터졌다.

반면 다저스 더그아웃은 국가대표에도 뽑히지 못했던 장태수가 크리스 반스의 공에 타이밍을 맞췄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와우, 뭐야? 한국에는 전부 다 괴물들밖에 없는 거야?”

“호들갑 떨지 마. 파울이잖아.”

“그냥 파울이 아니잖아. 방금 공은 메이저리그 타자들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공이라고.”

스타즈 선수들 중에서 박유성과 박준수만 머릿속에 담고 왔던 크리스 반스도 혀를 내둘렀다.

박유성에게 얻어맞았던 공만큼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몸 쪽으로 꽉 차게 붙이는 공을 저렇게 때려낼 수 있는 타자라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썬의 팀이라 이건가? 하아. 아무래도 길게 던지는 건 포기해야겠는걸?”

최대한 긴 이닝으로 다저스 팬들에게 에이스다운 모습을 각인시켜 주고 싶었던 크리스 반스는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그러고는 장태수의 몸 쪽으로 다시 한번 빠른 공을 붙여넣었다.

따악!

이번에도 장태수가 방망이를 휘둘러봤지만.

아까보다 뻗어 날아든 공은 방망이 윗부분을 긁고 백네트를 때렸다.

만약 다른 타자였다면 갑작스럽게 달라진 구위에 당혹스러워했겠지만.

“태수야! 침착해! 방금 공은 볼이었어!”

“젠장. 어쩐지 안 맞더라니.”

박유성이 던진 선의의 거짓말에 장태수는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4구는 볼.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바깥쪽으로 절묘하게 파고든 슬라이더였는데요. 구심은 빠졌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박유성 선수에 이어 장태수 선수도 공을 잘 지켜보고 있는데요.

-김석률 감독이 올 시즌 1번 타자로 기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테이블 세터로서 역할에 충실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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