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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인생 3회차-392화 (392/412)

타자 인생 3회차! 392화

45. Adios(8)

다저스 구단의 배려로 박유성이 비밀 훈련을 시작했을 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로이 스미스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보스.”

“일단 앉지.”

스프링 캠프 때 다저스가 초청한 포수는 총 7명.

지난해 주전으로 뛰었던 마이클 리드를 필두로 경험 많은 백업 포수 필 필립스와 더블 A를 씹어먹는다는 2009년생 공격형 포수 디에고 호스티야에 다른 구단에서 방출된 경험 많은 베테랑까지 주전 포수 경쟁에 뛰어들었다.

냉정하게 봤을 때 수비력은 좋지만 방망이가 아쉽다는 평가를 받는 로이 스미스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수비만 놓고 보자면 마이클 리드와 필 필립스 다음이었고.

공격력은 7명의 포수들 중 최하위였다.

그래서 데이브 로빈 감독에게 불려갔을 때 로이 스미스는 짐을 쌀 각오를 했다.

하지만 데이브 로빈 감독은 다저스 구단의 실질적인 총괄 책임자인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에게 가 보라고 지시했고.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다시 예상치 못한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까…… 저더러 썬의 훈련을 도우라는 말입니까?”

“정확해. 그렇다고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편하게 생각하라고.”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웃으며 말했지만 다저스에서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권유를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돕겠습니다.”

“정말?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경기는 더 이상 뛸 수 없어.”

“팀을 위한 일이잖아요? 누군가 해야 한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다저스를 그만큼 사랑하나?”

“당연하죠. 저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다저스를 응원했습니다.”

“하하. 좋아. 만약에 자네가 연습에 도움이 된다면 개막전 로스터에 합류시키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보스.”

그날 이후 로이 스미스는 별도의 훈련장에서 크리스 반스의 공을 받았다.

처음에는 무브먼트가 심한 크리스 반스의 공을 여러 번 빠뜨렸지만.

계속해서 크리스 반스를 상대하다 보니 금방 요령을 터득했다.

“로이. 내 공에 너무 빨리 적응하는 거 아냐?”

“아직 완벽하게 받아내려면 멀었습니다.”

“요즘은 거의 실수가 없잖아?”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 캐칭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프레이밍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다른 포수들이 실전 경기를 통해 경쟁하는 상황에서 로이 스미스가 주전 마스크를 쓸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백업도 아닌 불펜 포수처럼 크리스 반스의 공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크리스 반스의 제구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앤드류. 부탁이 있습니다.”

“설마 다른 팀으로 이적시켜 달라는 얘기는 아니지?”

“보내달라면 보내줄 건가요?”

“절대 안 되지. 자네는 계약이 끝날 때까지 다저스 선수야. 그걸 명심하라고.”

“저도 월드 시리즈 우승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래서? 부탁이 뭐야?”

“로이가 필요합니다.”

“훈련을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전담 포수로 쓰고 싶다는 거야?”

“가능할까요?”

“로이가 타격이 약한 건 알고 있지?”

“대신에 제가 안타를 내주지 않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크리스 반스의 요청 때문인지는 몰라도 로이 스미스는 40인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번 한국 원정길에 이름을 올린 세 명의 포수 중 한 명이 됐다.

그래서일까.

로이 스미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는 썬과 승부를 보고 싶은 거야. 설사 홈런을 맞더라도 상관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박유성을 힐끔 바라본 로이 스미스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크리스 반스가 씩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런 사인을 기다렸다고.”

크리스 반스의 웃음을 본 박유성도 자연스럽게 몸 쪽 공에 대비했다.

투 볼인 상황에서 크리스 반스가 공을 빼지는 않을 터.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한다면 가장 자신 있는 몸 쪽 하이 패스트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예상대로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눈높이로 날아들었고.

따악!

박유성은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걷어냈다.

-3구는 파울! 몸 쪽 빠른 공에 박유성 선수가 반응했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의 전매특허죠. 무려 159㎞/h가 찍혔습니다.

-S존상으로는 볼인데요. 박유성 선수가 노리던 공이었을까요?

-아마 방금 공은 박유성 선수의 눈에 아슬아슬하게 보였을 겁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부상에서 돌아온 이후로 투구 폼을 조금 수정했는데요. 최대한 마운드 앞쪽까지 공을 끌고 나와서 공을 던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익스텐션이라고 하는데요. 익스텐션을 늘리면 체감 구속이 빨라진다는 데이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마운드에서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가 18.44미터인데 그건 투구판 기준이거든요. 어떤 투수가 2미터 이상 공을 끌고 나와서 던졌다면 18.44미터가 아니라 16.44미터가 되는 셈이죠.

-타자도 그만큼 공을 볼 시간이 짧아질 텐데요.

-하지만 방금 공은 단순히 공이 빨라서 박유성 선수가 스윙을 한 게 아닙니다. 보통 보폭만으로 익스텐션을 늘리는 투수는 없으니까요. 공을 끝까지 끌고 나오다 보면 자연스럽게 릴리스 포인트가 낮아지고 그게 타자의 눈에 더 잘 들어오게 되는 거죠.

-정리를 하자면 팔꿈치 부상 이후로 크리스 반스 선수가 한 단계 진화를 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런 크리스 반스 선수의 공을 박유성 선수가 걷어냈다는 건 박유성 선수 역시 진화를 했다고 봐야겠죠?

-박유성 선수야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세계 최고의 타자입니다. 그래서 크리스 반스 선수도 자신이 던질 수 있는 최고의 공으로 승부를 하는 거죠.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리스 반스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다.

후앗!

크리스 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이번에도 몸 쪽 높은 코스를 찔렀고.

따악!

박유성은 빠르게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걷어냈다.

-이번에도 파울! 볼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뀝니다.

-초구와 거의 비슷한 코스로 들어왔는데요. 이번에는 타이밍이 살짝 빨랐습니다.

-박유성 선수의 눈에는 계속 스트라이크로 보이는 걸까요?

-아마 3구를 치고 나서 볼이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다만 저 코스의 공을 구심이 완벽하게 볼로 판정해 줄지가 문제지요.

-구심의 성향에 따라서 스트라이크를 줄 수도 있다는 말씀이신데요.

-스타즈 공격 때 타석에 들어서긴 했지만 김혜성 선수가 크리스 반스 선수처럼 하이 패스트 볼을 던지지는 않았으니까요. 저 코스에 대한 확신이 없는 이상 걷어내는 게 최선입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처럼 박유성은 구심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어제 경기에서도 프로 야구 기준을 적용했다가 다저스 쪽의 항의를 받고 스트라이크 상하 폭을 늘렸던 만큼 방금 공도 스트라이크를 잡아줄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스트라이크를 먹는 것보다 이 코스를 잡는 게 나아.’

박유성이 높은 공에 반응한다고 생각한 로이 스미스가 다시 한번 하이 패스트 볼 사인을 냈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유성이 4구를 놓쳤다면 또 모르겠지만.

타이밍을 맞춰 스윙하고 있는데 다시 똑같은 공을 던지기가 겁이 났다.

물론 로이 스미스의 요구대로 4구보다 공 하나 정도 높은 공에 박유성이 반응해 준다면 참 고맙겠지만 만에 하나 그 공이 빠지거나 몰리면 어렵게 투 스트라이크를 잡은 보람이 없었다.

‘마크 스테리라면 한 번 더 던져보겠지만 썬이니까. 어쩔 수 없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크리스 반스가 가장 까다로워하던 좌타자는 마크 스테리였다.

언론과의 인터뷰 때는 같은 팀이었던 로비 마르티네즈를 함께 언급했지만.

유인구에 쉽게 덤벼드는 로비 마르티네즈보다는 어지간한 공에 꿈쩍도 하지 않는 마크 스테리가 훨씬 더 까다로웠다.

하지만 다저스로 넘어와 박유성과 특별훈련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아메리칸 리그 최고의 타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했다.

중심 타자는 중심 타자다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침착하며 볼넷과 장타 생산 능력이 압도적인 마크 스테리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반대로 호쾌한 플레이를 선호하는 이들은 볼을 가리지 않고 공격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며 경기를 주도하는 로비 마르티네즈가 최고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서로 성향이 다른 두 선수를 두고 우열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고 전제하면서도 두 선수를 반씩 섞는다면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가 탄생할 거라고 단언했다.

“이래서 신은 공평한 겁니다.”

“마크 스테리가 로비 마르티네즈만큼 빠르고 적극적이라면 어떨까요? 반대로 로비 마르티네즈가 마크 스테리만큼 타석에서 침착하게 볼을 고를 수 있다면 어땠을까요?”

“두 선수는 이미 리그 최고의 타자입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존재가 두 사람을 불완전한 선수로 만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부 전문가들은 체격 자체가 큰 마크 스테리보다 호리호리한 로비 마르티네즈가 완성형 선수에 가까워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크리스 반스도 그런 전문가들의 주장에 일부 동조해 왔지만.

막상 박유성이라는 괴물을 상대하고 나니까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주장인지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진짜 완성형 타자는 썬이야. 이대로 1, 2년 정도 리그에 적응을 마치고 나면 그때부터는 홈런 타이틀까지 먹어 치울 거라고.’

크리스 반스가 마크 스테리를 까다로워한 이유는 유인구에 잘 속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유성이 보여주는 신들린 선구안과는 느낌이 달랐다.

마크 스테리가 꼼꼼한 상대 분석을 통해 수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가는 거라면 박유성은 정말로 공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골라내는 느낌이었다.

쉽게 말해 마크 스테리를 상대로는 가끔 허를 찌르는 투구가 먹히지만 박유성에게는 위험하다는 이야기.

게다가 로비 마르티네즈처럼 어떤 공도 다 때려낼 수 있는 빠른 스윙과 정확도까지 갖추고 있으니 신중하게 공을 던져야 했다.

‘로이. 너무 뻔한 사인은 안 돼. 그건 과감한 게 아니라 무모한 거라고.’

크리스 반스가 고개를 가로젓자 로이 스미스도 바깥쪽 낮은 코스로 미트를 들어 올렸다.

몸 쪽 높은 코스를 연달아 찔렀으니 정반대로 공을 던져 박유성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자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렇게 가야지.”

포심 패스트 볼 그립을 단단히 움켜쥔 크리스 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로이 스미스의 미트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날아드는 빠른 공을 지켜본다는 건 어지간한 강심장도 힘든 일이었지만.

‘볼.’

크리스 반스와 함께 훈련하며 공 궤적을 머릿속에 전부 담아두었던 박유성은 공이 빠질 거라 확신했다.

퍼억!

마지막 순간에 로이 스미스가 미트를 안쪽으로 꺾어 넣었지만 구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박유성이 미동조차 하지 않는 공은 볼이라는 걸 지난 3년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 이 승부가 풀카운트로 이어집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이번에도 좋은 공을 던졌습니다만 박유성 선수를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지금 S존상으로는 공이 두 개 정도 빠진 것으로 나오는데요. 공 반 개 정도만 안으로 들어왔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랬다면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에 걸렸을 겁니다.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좌투수의 공을 기가 막히게 때려내는 타자니까요.

“젠장할.”

회심의 승부구가 실패로 돌아가자 크리스 반스가 쓰게 웃었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해 로이 스미스의 미트만 보고 공을 던졌는데 박유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예상보다 공이 살짝 빠졌다.

로이 스미스는 자신의 탓이라며 자책하듯 가슴을 두드렸지만 크리스 반스의 생각은 달랐다.

“내 잘못이야. 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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