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91화
45. Adios(7)
“썬. 넌 어떻게 내 공을 전부 다 때려낼 수 있는 거야?”
“전부 다 때려내진 못하죠. 그건 야구의 신이 와도 불가능할 겁니다.”
“말 돌리지 말고.”
“크리스. 당신은 내가 상대한 최고의 좌완 투수예요. 그래서 난 좌완 투수를 상대할 때마다 당신을 떠올립니다.”
“……!”
“어쩌면 그래서 더 집중이 되는지도 몰라요.”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크리스 반스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박유성이 고마웠다.
아직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메이저리그 주요 언론들은 박유성을 유력한 MVP 후보로 꼽고 있었다.
보수적인 시즌 전망조차 3할 중반을 언급했으니 말 다 한 셈.
한국에서 7할을 치던 박유성은 기분 나쁠지 몰라도 언론이 3할 중반의 성적을 예상한 선수는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박유성 한 명뿐이었다.
오히려 박유성 때문에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투수들의 평균자책점이 전부 하향 조정될 정도였다.
‘그래. 우승을 위해 뭉친 거라고 생각하자.’
박유성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푼 크리스 반스는 컨디션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현재 전성기 시절의 90퍼센트까지 감각을 되찾은 상태였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크리스 반스가 홈플레이트를 바라봤다.
포수 마이클 리드가 편하게 던지라며 양팔을 벌리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타석에 박유성이 서 있는데 그런 독려가 와닿을 리 없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사인이나 내.”
크리스 반스가 미간을 찌푸리자 마이클 리드가 멋쩍은 얼굴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 쪽 커터? 장난하는 거지?’
크리스 반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좌투수가 좌타자의 몸 쪽을 향해 던지는 커터는 타자의 방망이 중심 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
프론트 도어성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정확하게 파고든다면 참 좋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공이 한복판으로 몰리면 박유성의 방망이에 정확하게 찍힐 가능성이 높았다.
마이클 리드가 뒤이어 몸 쪽 낮은 코스의 체인지업을 주문했지만 이번에도 크리스 반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박유성이 속을 리 없을뿐더러 그런 식으로 투구수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크리스 반스가 바깥쪽 변화구까지 거절하자 마이클 리드가 타임을 외치고 마운드로 올라왔다.
“왜 그래? 뭐가 문제야?”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변화구를 던지기 싫은 거야?”
“썬을 상대로 볼을 낭비하기 싫은 거야.”
“그럼? 보나 마나 썬은 빠른 공을 노리고 있을 텐데 다른 방법이 있어?”
“노리는 공을 던져주면 돼.”
“……뭐?”
“맞춰 잡자고. 가능성은 낮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야.”
마이클 리드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크리스 반스를 쳐다봤다.
크리스 반스가 레드삭스의 에이스였다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상대는 8억 달러의 사나이, 박유성이었다.
돈이 곧 실력인 메이저리그에서 박유성을 상대로 정면 승부를 고집할 수 있는 투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마냥 얻어맞겠다는 게 아니었다.
“마이클. 썬의 타율이 얼마인 줄 알아?”
“한국에서? 7할 6푼이 넘지 않아?”
“그래. 간단하게 말해 4번 중에 1번은 죽었어.”
“그래서? 그 25퍼센트의 확률에 기대자는 거야?”
“썬은 나쁜 공을 건드리지 않아. 그렇다고 호락호락 볼넷을 고르지도 않지. 썬을 얌전하게 1루로 내보내려면 맞히거나 고의4구를 줘야 해. 하지만 이벤트 경기에서 그럴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어제 경기 직후.
다저스 선수들은 SNS를 통해 수많은 항의 메시지를 받았다.
절반 이상은 다른 구단 팬들이 보낸 조롱이었지만.
나머지는 진짜 다저스 팬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경기에 뛰지 않았던 크리스 반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늘 경기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부터 시작해 다저스 망신을 시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까지.
다저스 팬들은 더 이상 다저스가 웃음거리가 되는 걸 원치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혜성이 승부한 박유성을 거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벤들 윌리엄처럼 박유성에게 끌려다니고 싶지도 않았다.
“빠른 공으로 승부할 거야. 최대한 까다롭게 리드해 줘.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러다 맞으면?”
“뭐 어때? 이벤트전이잖아? 그리고 썬은 우리 선수라고. 이런 때가 아니면 만원 관중들 앞에서 승부할 수 없을걸?”
크리스 반스의 말에 마이클 리드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 너는 처음이겠지만 난 어제 경기를 치렀어. 썬이 루상에 나가면 막을 수가 없다고.”
“설사 썬이 출루해서 연속 도루를 한다고 해도 널 탓하지 않을 거야. 팬들도 마찬가지일걸? 다들 썬의 빠른 발에 감탄하지 널 비난하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까 즐기자. 오늘 경기를.”
포수석으로 돌아간 마이클 리드는 포수 마스크를 고쳐 썼다.
그러면서 힐끔 박유성을 바라봤다.
공 하나 던지지 않고 마운드를 다녀왔으니 무슨 일인지 궁금할 만도 했지만.
정작 박유성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타격을 준비했다.
탁. 타악.
오른발로 타석 앞쪽을 단단히 다지고.
스윽. 스윽.
왼발을 비벼 배터 박스 끝선에 맞춘 뒤에 방망이를 쭉 뻗어 오른쪽 타석 앞쪽 라인을 가볍게 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망이를 가볍게 돌린 뒤에 어깨 위로 안착.
이 루틴을 두고 미국의 수많은 심리학자들과 스포츠 전문가들이 달려들었지만 정확한 의미를 해석해 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본래 루틴은 무의식의 발현이지만.
요즘에는 행운을 빌기 위해 의도적으로 루틴을 실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박유성도 1회차 때는 여러 의미를 담아 루틴을 만들었다.
똑딱이라는 이유로 타석에 들어서기만 하면 투수들이 몸 쪽을 찔러대니 숨 돌릴 여유를 벌기 위해서 계속해서 루틴을 바꾸며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2회차를 지나 3회차에 접어든 지금은 습관처럼 하는 행동일 뿐이었다.
어떤 팬들은 박유성이 어깨에 방망이를 올리기 전에 풍차돌리기를 몇 번 하느냐에 따라 루타가 결정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그때그때 달랐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박유성이 반복하는 평범한 루틴이 박유성을 상대해야 하는 투수와 포수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박유성이 타격 준비를 마치자 마이클 리드가 바깥쪽으로 미트를 움직였다.
본래 몸 쪽 빠른 공을 찔러 넣으려고 했지만.
자신만만한 박유성의 모습을 보니까 몸 쪽은 얻어맞을 것 같았다.
크리스 반스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공이라면 까다로운 리드도 받아들이겠다고 내뱉은 이상 이 사인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아, 드디어 투포수의 사인 교환이 끝난 거 같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솔직히 너무 뜸을 들였는데요.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어떤 승부를 펼칠지 궁금해지네요.
-아까 정면 승부는 위험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초구는 바깥쪽! 157㎞/h의 빠른 공이 미트에 꽂힙니다!
-정말 기가막힌 공이 들어왔는데요. 구심은 볼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후우…….”
팔을 쭉 뻗어 공을 움켜쥐었던 마이클 리드가 긴 한숨과 함께 자세를 풀었다.
메이저리그였다면 충분히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낼 만한 공이었지만.
등 뒤에 선 한국의 구심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프레이밍을 할 걸 그랬나?’
쓰게 웃던 마이클 리드가 크리스 반스에게 공을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박유성에게 말을 걸었다.
“노리던 공이 아니었어?”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어.”
동문서답이 돌아왔지만 마이클 리드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구종을 떠나 초구부터 볼을 칠 생각은 없었다는 의미였다.
만약 다른 타자가 저렇게 떠들어댔다면 허세를 부린다며 코웃음을 쳤겠지만.
박유성은 리그에서 7할 6푼을 치던 타자.
국제대회 성적은 무려 9할에 달했고 어제도 다저스 투수들을 상대로 맹타를 때려냈다.
‘더 까다로운 공을 던져야 해.’
잠시 고심하던 마이클 리드는 바깥쪽 높은 코스의 공을 요구했다.
요즘은 더 키가 큰 선수들도 많지만.
191㎝의 큰 키에서 높게 릴리스된 공이 타자의 눈높이로 날아들면 박유성의 방망이를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이클 리드의 속내를 읽은 크리스 반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막상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면서 박유성을 속이는 데 실패했다.
-이번에도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났습니다.
-크리스 반스 선수가 연거푸 빠른 공으로 박유성 선수를 유혹하고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침착하게 잘 골라내고 있습니다.
-비록 볼이 되긴 했습니다만 아슬아슬한 코스로 잘 던지고 있는 느낌인데요.
-만약에 투 스트라이크 이후였다면 박유성 선수도 지금처럼 편하게 지켜보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초구와 2구 모두 볼이 되면서 박유성 선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해진 상황인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도 머릿속이 복잡할 겁니다. 이게 원 볼 원 스트라이크와 투 볼은 전혀 다른 상황이거든요.
-여기서 볼이 나오면 결국 볼넷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만큼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할 수밖에 없을 텐데요.
-아마 평소였다면 스트라이크 존을 직접 공략하는 것보다 최대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을 붙여서 타자의 스윙을 유도하겠지만 상대는 박유성 선수입니다. 뻔한 공으로는 절대 속일 수가 없어요.
한참 고민을 하던 마이클 리드도 손가락을 네 개 폈다.
여기서 스트라이크 존에 빠른 공을 던지는 건 자살행위.
이렇게 된 이상 볼넷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 반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벤트전이라고 했잖아. 마이클. 썬이라고 매번 안타를 칠 수는 없어. 계속 그런 식이면 내 공을 받을 수가 없다고.”
주전 포수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서 마이클 리드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피터 페츠를 비롯해 다른 투수들과 호흡이 좋아서 주전 기회를 받은 거지 타격이 좋거나 수비력이 압도적인 게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마이클 리드는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만 생각했다.
‘어제 경기에 이어서 오늘도 얻어맞을 수는 없어. 썬은 그냥 거르는 게 나아.’
마이클 리드가 다시 한번 체인지업 사인을 내자 크리스 반스가 아예 투구판에서 발을 빼버렸다. 그러고는 벤치를 향해 손짓했다.
-아, 지금 데이브 로빈 감독이 직접 마운드로 올라오는데요. 무슨 일인 걸까요?
-글쎄요. 사인 문제인 거 같은데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거 같습니다.
“크리스. 무슨 일이야?”
데이브 로빈 감독이 허겁지겁 다가와 물었다.
그러자 크리스 반스가 글러브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포수를 바꿔주세요.”
“뭐? 포수를?”
“마이클은 저한테 맞춰줄 생각이 없어요.”
다소 갑작스러운 요구였지만 데이브 로빈 감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올 시즌 에이스 노릇을 해줘야 할 크리스 반스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이클과 호흡이 문제라는 거지?”
“로이가 좋을 거 같아요.”
“그래. 알았어.”
데이브 로빈 감독은 군말 없이 크리스 반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눈앞에 있는 크리스 반스는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올 시즌 마이클 리드에게 주전 포수 자리를 맡길 계획이라고 해서 마이클 리드의 편을 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 갑자기 포수가 바뀌는데요?
-박유성 선수 타석을 두고 계속 사인이 맞지 않은 모습이었는데요. 데이브 로빈 감독이 극약 처방을 내린 것 같습니다.
-마이클 리드 선수가 들어가고 로이 스미스 선수가 포수석으로 들어갑니다. 이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뛴 경험이 거의 없는 선수인데요. 크리스 반스 선수와 어떤 호흡을 보여줄지 궁금해집니다.
경기장을 찾은 다저스 팬들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지만.
정작 박유성은 로이 스미스를 반겼다.
“어서 와요. 로이.”
“이러다 나중에 마이클에게 한 대 얻어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어.”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잖아요?”
“당연하지. 난 오늘 내 인생을 걸 거야. 그러니까 썬.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