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89화
45. Adios(5)
“후우…….”
다시 길게 숨을 고른 김혜성이 스플리터 그립을 쥐었다.
박경호가 사인을 내기 전이지만.
가능하면 몸 쪽으로 떨어지는 스플리터로 박유성을 유인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삼진 욕심을 내는 건 결코 아니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어서 배트 스피드가 떨어진 다음이라면 모를까. 유성이 저 녀석한테 삼진 잡는 건 불가능해.’
지난 3년간 수많은 외국인 투수들과 신인 투수들이 프로 야구에 데뷔했다.
그리고 그들은 입단식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떠들었다.
“썬을 삼진으로 잡아내겠습니다.”
“박유성 선배님을 상대할 기회가 있다면 꼭 삼진으로 잡고 싶습니다.”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기자들은 일부러 자극적인 기사를 올렸고.
그 밑으로 수많은 댓글들이 쏟아졌다.
└박유성 상대로 삼진을 잡겠다고? 넌 1군 합류부터 걱정해야 할 거 같은데?
└진짜 신인의 패기를 보여주는 것도 정도껏이지 저 정도면 망언 수준임.
└내버려 둬요. 저대로 은퇴하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을 테니까.
└박유성에 대한 존경심부터 먼저 표현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보나 마나 기자가 유도심문 한 거고 바보처럼 걸려든 건데 너무 까진 맙시다.
└그래서 요즘 애들이 생각 없다는 겁니다. 박유성 봐요. 인터뷰 스킬 만렙임.
└박유성은 피터 페츠가 도발했을 때도 돌려 말했는데요 뭘. ㅋㅋㅋ
└송찬우가 말했지. 박유성 상대로 삼진 잡는 게 완봉보다 어렵다고. ㅋㅋㅋ
└임찬기가 말했습니다. 박유성 삼진 잡으려고 에너지를 낭비하느니 다른 타자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마음 편하다고요.
└그런데 박유성 상대로 10구 이상 던지는 투수들 많지 않음?
└초창기 때는 삼진 욕심이었는데 최근에는 아니죠. 다들 그냥 박유성한테 안타 맞거나 자동고의4구 내준다는 마인드입니다. 컨디션 좋은 날에도 박유성 만나면 멘탈 갈리고 시작하잖아요.
└스타즈 승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가 박유성 때문이라는 걸 이 악물고 부정하는 사람 많은데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데이터입니다. 박유성이 작심하고 커트 신공 사용하면 에이스급 선발 투수들도 5이닝 못 버팀.
└다 필요 없어요. 박유성 때문에 불법 도박 사이트들 망한 거 모름? ㅋㅋㅋ
└불법 도박 사이트가 왜 망함? 아직도 많이 있는데?
└그런 사이트들 다 장사 안 된다고 난리입니다. 돈 떼먹으려고 작심하고 만든 사이트들이라 사람들도 안 가고요.
└그런데 박유성이 뭘 했기에 불법 도박 사이트가 망해요?
└불법 도박 사이트 가장 기본이 첫 타자 삼진이거든요. 근데 박유성은 삼진이 없어서 도박 사이트들이 개 손해 봄. ㅋㅋ
└박유성 1년 차 때 어그로 끌려고 박유성 놓고 배팅했다가 망한 업체가 수두룩합니다. ㅋㅋ
물론 여전히 많은 투수들이 투 스트라이크만 잡으면 삼진에 눈이 멀어 박유성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박유성을 상대로 이기지 못했다.
어지간한 투수들의 버릇은 전부 꿰뚫고 있는 데다가 선구안도 좋고 스윙 스피드가 빨라서 마음만 먹으면 어떤 공도 걷어낼 수 있다 보니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박유성을 상대로 헛스윙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통산 타율 7할 6푼대 타자에게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도 없는 노릇.
‘그냥 칠 만한 공을 던져주는 게 최선이야.’
그런 김혜성의 속내를 읽었을까.
박경호가 몸 쪽 낮은 코스의 스플리터를 주문했고.
김혜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후앗!
김혜성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박유성의 머리 뒤쪽에서 날아와 몸 쪽 낮게 파고들었지만.
따악!
박유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가볍게 방망이를 휘둘러 공을 걷어냈다.
그러자 박경호가 박유성을 노려보며 말했다.
“야 인마. 그냥 안타 쳐.”
“그럼 좋은 공을 주든가요.”
“이만하면 잘 들어왔잖아?”
“태수였다면 100퍼 헛스윙이었을 텐데요?”
“태수는 태수고 너는 너지. 7할 타자하고 3할 타자하고 같냐?”
“그래서 헛스윙 안 하고 건드렸잖아요. 하마터면 삼진당할 뻔?”
“와, 이 자식. 진짜 적으로 만나니까 얄밉네.”
까불거리는 박유성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던지 박경호가 계속해서 까다로운 코스의 공을 주문했다.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체인지업에 이어 몸 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프론트도어 커터.
그리고 프로 입단 전부터 주무기로 쓰던 무브먼트가 큰 슬라이더까지.
어지간한 좌타자였다면 진즉에 삼진을 당했을 공이 연달아 들어왔지만 박유성은 전부 커트를 해내며 타석을 지켰다.
그러자 벤치 앞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리 베츠가 혀를 내둘렀다.
“와, 진짜 미쳤네. 미쳤어. 어떻게 저렇게 칠 수가 있는 거지?”
아메리칸 리그에는 해마다 MVP 경쟁을 치르는 두 명의 괴물이 있다.
양키즈의 마크 스테리와 레드삭스의 로비 마르티네즈.
보수적인 기자들은 안정적인 선구안을 바탕으로 양질의 타구를 생산해 내는 마크 스테리에게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있지만.
양키즈 팬들을 제외한 메이저리그 팬들은 로비 마르티네즈의 호쾌한 타격을 더 좋아했다.
그런 로비 마르티네즈와 가장 유사한 타격을 한다고 알려진 게 바로 다저스의 간판 타자, 코리 베츠였다.
코리 베츠는 전형적인 베드볼 히터였다.
스트라이크 여부를 가리지 않고 노리던 공이나 칠 만한 공이 날아들면 주저 없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 때문에 볼넷보다 삼진이 훨씬 더 많았지만.
53홈런을 때려낸 2028시즌 이후로 투수들의 정면 승부 비율이 줄어들면서 코리 베츠의 적극성이 오히려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코리 베츠도 박유성처럼 스트라이크 존 주변을 파고드는 공을 정확하게 걷어낼 자신이 없었다.
투 스트라이크를 먹은 상태니까 삼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방망이를 휘두르긴 하겠지만.
아마 4연속 파울을 내기 전에 인필드 타구가 나왔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박유성은 달랐다.
볼카운트에 부담을 느끼고 공을 쫓아다니지 않았다.
마치 초구를 지켜보는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타석에 서서 자신만의 스윙과 히팅 존을 유지하며 투수를 몰아붙였다.
“저래서 7할 타자인 건가?”
다시 한번 파울 타구가 나오자 코리 베츠가 혀를 내둘렀고.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리스 반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벤들 윌리엄이 놀리듯 말했다.
“크리스. 썬을 상대할 자신 있어요?”
“당연하지. 난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표정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요?”
“크흠. 그렇다고 마운드에 서기도 전에 겁을 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비록 부상으로 레드삭스에서 밀려나긴 했지만 크리스 반스는 명예의 전당 헌액이 확실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좌완 투수 중 한 명이었다.
지난 9년간 레드삭스에서 거둔 승수만 102승.
통산 평균자책점도 2.76으로 1,000이닝 이상 소화한 현역 메이저리그 투수들 중 1위이며 2027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 상까지 수상했다.
커리어만 놓고 봤을 때 팀을 떠난 피터 페츠보다 더 에이스에 가까운 투수.
그렇다 보니 벤들 윌리엄 앞에서도 큰소리를 쳤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 앞섰다.
‘오늘 경기는 100구 이내에 끝내야 해.’
스프링 캠프 때 박유성을 상대하면서 크리스 반스는 투구 감각을 거의 다 회복했다.
아직까지 주무기인 커터가 조금씩 몰리는 경향이 있지만.
작년에 거의 던지지 못했던 하이 패스트 볼부터 시작해 슬라이더, 체인지업, 커브까지 전성기 시절처럼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이크 프라이어 투수 코치가 각오를 물었을 때 7이닝을 던지겠다고 밝혔다.
100구 이내에 7이닝을 소화하려면 이닝 당 투구 수는 14구 이내로 끊어야 했다.
볼넷은 최대한 줄이고 피안타 5개 미만으로 경기를 끌고 간다고 계산했을 때 타자당 투구 수는 3.84개.
그래서 삼진 욕심을 줄이고 최대한 공격적으로 맞춰 잡겠다는 피칭 시나리오까지 써놨건만.
따악!
김혜성을 상대로 9구 승부까지 끌고 가는 박유성을 보니까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데이브 로빈 감독도 어제보다 타격 컨디션이 더 좋아 보이는 박유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리스가 5회까지 막아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시즌이 코앞이라 많은 공을 던지게 하기도 어렵고요.”
오늘 경기가 끝나면.
크리스 반스는 자이언츠와의 내셔널리그 개막 원정 경기에 선발로 등판해야 한다.
개막전 상대 투수는 다름 아닌 피터 페츠.
다저스가 박유성을 영입하자 다급해진 자이언츠가 피터 페츠에게 손을 내밀었고.
피터 페츠는 6년 총액 2억 달러라는 나름 준수한 계약 조건으로 지구 라이벌 자이언츠로 넘어갔다.
본래 2029년 사이영 상을 받았던 에이스 호세 가르시아에 이어 2선발로 뛸 거란 전망이 많았지만.
호세 가르시아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터라 당분간 피터 페츠가 1선발을 소화하게 됐다.
다저스 팬들 입장에서는 전 에이스와 새로운 에이스의 맞대결이 펼쳐지는 셈.
“개막전에서 크리스가 부진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팬들이 크게 실망할 겁니다.”
매니 레만 벤치 코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 경기에 대한 크리스 반스의 의욕은 높이 사지만 이벤트전에서 무리했다가 정작 개막전 때 탈이 날까 봐 걱정이었다.
“일단 3회부터 불펜 투수들을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감독님.”
데이브 로빈 감독이 마음을 굳힌 그 순간.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좌중간으로 뻗어 나갔다.
순간 다저스의 모든 선수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난간으로 붙었지만.
어느새 달려온 다니엘 브리토가 전력 질주로 공을 잡아내면서 박유성의 출루가 무산됐다.
“와, 뭐야? 저걸 잡은 거야?”
“수비 위치가 너무 좋았어. 애당초 코너를 비우고 우중간으로 수비를 했었다고.”
“그런데 방금 썬은 무슨 공을 때려낸 거야?”
“바깥쪽 스플리터.”
“그걸 쳐서 저기까지 때려낸 거야?”
“구단에서 괜히 8억 달러를 준 게 아니라니까?”
9구 승부까지 끌려온 김혜성은 바깥쪽 낮게 걸친 박경호의 미트를 향해 이를 악물고 공을 내던졌고.
그 공을 박유성도 욕심부리지 않고 결대로 밀어쳐서 좌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만들어냈다.
본래라면 최소 2루타 이상의 장타로 이어졌겠지만.
외야 간격을 좁히라는 김석률 감독의 사전 주문을 받고 좌중간 쪽으로 자리를 옮겼던 다니엘 브리토가 최단 거리로 공을 쫓으면서 아웃이 되고 말았다.
실로 아쉬운 결과였지만 박유성은 대수롭지 않게 몸을 돌려 3루 쪽 더그아웃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대기 타석에 서 있던 송현민에게 조언을 해주었다.
“스플리터가 평소보다 좋아요.”
“확실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더라.”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추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오케이.”
박유성에 이어 타석에 들어선 송현민은 김혜성의 초구를 잡아당겨 1, 2루간을 꿰뚫는 안타를 때려냈다.
박유성을 상대하느라 지친 김혜성의 숨통을 트여주고자 박경호가 초구에 몸 쪽 빠른 공을 요구했는데 송현민의 노림수에 걸린 것이다.
뒤이어 타석에 들어선 3번 타자 코리 베츠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상황에서 다시 한번 안타를 때려내면서 1사 주자 1, 3루 밥상이 차려졌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아온 김혜성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4번 타자 미구엘 호네즈를 상대로 초구에 바깥쪽 체인지업을 떨어뜨려 6-4-3으로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를 이끌어냈다.
-다저스의 1회 초 득점 기회가 무산되면서 1회 말로 넘어갑니다. 이제 박유성 선수가 다시 선두타자로 들어오게 되는데요.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크리스 반스 선수입니다.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이후 3년 만의 맞대결인데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