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70화
42. 도쿄 찍고 미국으로(3)
‘포크 볼!’
반사적으로 허리를 끌어당겼던 박유성은 마지막 순간에 뚝 떨어지는 공에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예상했던 것보다 공이 훨씬 더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제길!”
거의 블로킹을 하듯 공을 받아낸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는 다급히 3루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3루심은 단호하게 양팔을 벌렸고.
박유성을 땅볼로 유인하겠다던 마츠다 유이토-구와하라 세이지 배터리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초구는 볼. 거의 원바운드성으로 들어온 공을 박유성 선수가 잘 참아냈습니다.
-지금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포크 볼을 던진 것 같은데요. 지난 LA 올림픽 때 봤던 것보다 훨씬 더 낙폭이 커진 느낌입니다.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이게 포크볼이 맞나요?
-회전이 거의 걸리지 않아서 너클볼처럼 들어왔습니다만 그립은 포크볼이 맞습니다.
-마츠다 유이토 선수 하면 100mile/h(≒160.9㎞/h)에 가까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로 알려져 있는데요. 갑작스럽게 저런 공을 던지면 대처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솔직히 다른 타자였다면 무조건 방망이가 돌았을 겁니다. 박유성 선수쯤 되니까 저걸 멈춰 세운 거죠.
-지금 타석 옆에서 본 스윙 장면이 나오고 있는데 확실히 헤더 부분이 홈플레이트 앞쪽을 넘어가지 않았네요.
-괜히 박유성 선수가 7할 타자가 아닌 거죠.
초구를 박유성이 골라냈지만.
마츠다 유이토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포크 볼을 던졌다.
퍼억!
2구는 바깥쪽으로 흘러나가 볼이 됐고.
“스트라이크!”
3구는 기이한 궤적을 그리다 몸 쪽 낮은 코스에 걸치면서 구심의 콜을 받았다.
그리고 4구는 바깥쪽으로 도망치는 공을 박유성이 가볍게 걷어내 파울.
그렇게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가 되자 도쿄 돔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마츠다! 일본인의 자존심을 보여줘!”
“하나만! 딱 하나만 떨어뜨리면 돼!”
“박유성! 양심이 있으면 헛스윙 한 번 해줘라!”
“마츠다! 힘을 내!”
전광판의 스코어는 8 대 0.
프리미어 12 결승전에 어울리지 않은 일방적인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여기서 박유성을 잡아낸다 한들 경기 분위기가 일본 대표팀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은 없었지만.
도쿄 돔을 가득 채운 일본의 야구 팬들은 마츠다 유이토가 일본 야구의 자존심이라도 지켜주길 바랐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른 마츠다 유이토는 포심 패스트 볼 사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슬라이더 사인도 거절했다.
투 스트라이크에 흥분한 건지 구와하라 세이지가 스플리터 사인까지 꺼냈지만 마츠다 유이토의 뚝심은 변하지 않았다.
“포크 볼. 무조건 포크 볼이야.”
160㎞/h가 넘는 크리스 반스의 공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내던 박유성이다.
일본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오타니 쇼헤도 155㎞/h의 빠른 공을 던졌다가 얻어맞았다.
박유성이 빠른 공에 얼마나 강한지는 통산 데이터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투수가 포심 패스트 볼을 던졌을 때 피안타율이 무려 0.850.
포심 패스트 볼을 포함한 패스트 볼 계열을 던졌을 때는 0.821이었다.
거기에 구사 빈도가 높은 슬라이더나 체인지업도 8할에 가까운 확률로 안타를 만들어냈다.
반면 팜볼을 포함한 너클볼의 피안타율은 5할대였다.
제아무리 박유성이라 해도 자주 겪지 못한 공 앞에서는 정확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어차피 한 타석 승부야. 무브먼트로 상대해야 해.”
기어코 포크 볼 사인을 받아낸 마츠다 유이토가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로 공을 단단히 끼워 넣었다.
그 움직임이 훤히 보이자 박유성도 방망이를 조금 더 길게 잡았다.
‘타이밍을 잡기가 어렵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마츠다 유이토가 일본 야구의 자존심을 위해 나섰듯 박유성도 대한민국 야구의 자존심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었다.
니키타 쇼우에 이어 오타니 쇼헤, 그리고 마츠다 유이토까지 일본을 대표하는 투수들이 연이어 등판한 만큼 박유성도 어떻게든 안타를 때려내야 했다.
그렇게 제법 긴 정적이 끝나고.
“흐아아압!”
마츠다 유이토가 요란한 기합성과 함께 공을 내던졌다.
그 기세가 꼭 160㎞/h짜리 포심 패스트 볼을 내리꽂을 것처럼 느껴졌지만.
글러브의 움직임을 통해 포크 볼이라는 걸 알아챈 박유성은 속지 않았다.
오히려 오른발로 단단히 버틴 뒤에 뚝 하고 떨어지는 공을 향해 힘껏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순간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가 우익수 쪽으로 뻗어 나갔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던 곤도 타쿠야가 이내 추격을 포기했다.
타구의 속도와 궤적으로 봐서 무조건 담장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총알처럼 뻗어 나간 타구는 마지막 순간에 오른쪽 폴대 밖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아아! 이 타구가 폴대를 벗어납니다.
-리플레이 화면을 다시 봐야겠습니다만 정말 깻입 한 장 차이로 빗나간 것 같습니다.
-지금 강기태 감독이 더그아웃 밖으로 나왔는데요.
-아무래도 비디오 판독을 하려는 것 같은데 아, 박유성 선수가 강기태 감독을 만류합니다.
-사실상 타자가 제일 잘 보일 테니까요. 그리고 박유성 선수는 타격 이후에 1루로 몇 걸음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애당초 파울이 될 거라는 걸 알았다는 얘기인데요.
-이 타석은 그냥 박유성 선수에게 맡기는 게 좋습니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흐름이 깨질 수도 있어요.
이선철 해설 위원의 얘기를 들었던지 강기태 감독은 구심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한 뒤에 곧바로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가 몸을 일으켜 마운드로 올라오려고 했다.
비록 파울이긴 하지만 포크 볼을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마츠다 유이토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하지만 마츠다 유이토도 손바닥을 내밀며 구와하라 세이지를 막아 세웠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그렇게 잠시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잠잠해지자 구심이 다시 콜을 주었다.
-볼 카운트는 여전히 투 볼 투 스트라이크.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5구 연속 포크 볼을 던졌는데요. 이번에는 어떤 공이 들어올까요?
-아마 또다시 포크 볼을 던지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방금 전 타격만 보더라도 박유성 선수가 제대로 타이밍을 맞췄거든요? 포크 볼로 승부를 보더라도 공 하나쯤은 뺄 필요가 있어요.
-말씀드리는 순간 투포수 사인 교환을 마치고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투구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바깥쪽! 낮게 떨어지는 공을 박유성 선수가 참아냈습니다.
-마츠다 유이토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이번에도 포크 볼을 던졌습니다.
-그야말로 뚝심과 뚝심의 맞대결인데요. 이번 공이 빠지면서 볼카운트도 풀카운트가 됐습니다.
“후우…….”
공을 돌려받은 마츠다 유이토는 오른손을 살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거의 던지지 않던 포크 볼을 연달아 던져서일까.
손가락의 악력이 살짝 떨어진 느낌이었다.
체력적으로 지친 상태라 구속을 포기하고 무브먼트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공을 제대로 채지 못한다면 포크 볼을 던질 의미가 없었다.
“젠장할. 여기까진가.”
마츠다 유이토의 시선이 박유성에게 향했다.
비록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긴 하지만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마츠다 유이토는 박유성이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해 주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양키즈에서 한솥밥을 먹길 바랐다.
박유성이 핀 스트라이프를 입고 톱타자로 활약해 준다면 고질적인 잔루 적체 현상이 확 줄어들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마츠다 유이토는 다시 한번 포크볼 그립을 쥐었다.
“던질 수 있어. 끝까지 해보자.”
다시 투구판 위에 선 마츠다 유이토는 구와하라 세이지를 향해 있는 힘껏 팔을 내던졌다.
후앗!
마츠다 유이토의 손끝을 떠난 공이 거의 한복판으로 날아오다가 마지막 순간에 뚝 떨어졌지만.
따악!
포크 볼이 떨어지는 시점을 읽고 있었던 박유성의 스윙을 피하지 못했다.
-큽니다! 이 타구가 높게 솟구쳐 날아갑니다!
-이건 넘어간 거 같은데요?
-중견수 스즈키 지로 선수가 멍하니 타구를 지켜봅니다. 아아, 이 타구가 천장에 맞고 떨어졌습니다!
-지금 2루심이 타임을 외쳤는데요. 이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지금 규정으로는 일정 지역 밖의 천장을 맞힐 경우에는 홈런으로 인정되는데 정확하게 어디를 맞혔는지부터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도쿄돔은 말 그대로 지붕이 있는 돔구장.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힘이 좋은 타자가 힘껏 퍼 올린 공이 천정을 맞히기도 하는데 파울라인을 벗어나지 않은 공이 천정을 맞히면 2루타로 인정이 된다.
그래서 박유성도 일단 2루 베이스에 나가 심판의 판정을 기다렸다.
“천장을 계산 못 했네.”
더그아웃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타니 쇼헤는 박유성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 괴물이야. 어떻게 마츠다의 포크 볼을 저기까지 때려낼 수 있는 거지?”
에인젤스 소속인 오타니 쇼헤는 같은 아메리칸 리그에서 뛰고 있는 후배인 마츠다 유이토를 여러 차례 상대해 왔다.
일본에서 최고라 불리던 포크 볼은 구경해 보지 못했지만.
포크 볼을 대신할 무기로 갈고닦은 스플리터에 7연속 타석 삼진을 당했다.
오죽하면 마츠다 유이토가 선발 등판하는 날에 한동안 휴식을 부여받았을 정도.
그런데 그 까다로운 마츠다 유이토가 박유성 앞에서는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야부타 슈타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오타니 상. 마츠다는 어제 등판했어요. 그리고 계속 포크 볼만 고집했잖아요. 정상 컨디션이었다면 절대 맞지 않았을 겁니다.”
“야부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죠. 한국 야구는 일본 야구를 이길 수가 없어요. 아시아 최강은 누가 뭐래도 일본입니다.”
울분을 토해내는 야부타 슈타를 보며 오타니 쇼헤가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히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한 얘기라면 참 좋겠지만.
진심으로 대한민국 야구를 얕잡아 보고 있다면 아마 당분간은 아시아 정상에 오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사이 비디오 판독까지 걸친 타구의 결과가 나왔다.
-아, 홈런입니다! 이 타구가 홈런으로 인정됩니다!
-아마 천장을 맞히는 타구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도쿄 돔의 로컬 룰에 따라 홈런으로 인정이 됐네요.
-이선철 해설위원의 설명에 보충을 하자면 지금 화면으로 나오는데요. 저 지역 밖을 때리면 홈런으로 인정된다고 합니다. 박유성 선수의 타구는 그보다 한참 뒤쪽인 이 지점에 맞았고요.
-맞는 순간에 마츠다 유이토 선수가 고개를 떨어뜨렸으니까요. 만약에 돔구장이 아니라 일반 구장이었다면 장외 홈런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2루에 나가 있던 박유성 선수가 홈을 밟으면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일본 대표팀을 9 대 0으로 앞서 나갑니다!
이날.
6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한민국 대표팀은 일본 대표팀을 11 대 0으로 꺾고 프리미어 12 정상에 올랐다.
승리 투수는 송찬우.
경기 MVP는 결승에서만 3개의 홈런을 때려낸 박유성에게 돌아갔다.
경기 직후 열린 기자회견장에 박유성은 강기태 감독, 송찬우와 함께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