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64화
41. 슈퍼라운드(8)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테블릿으로 하이라이트 영상을 확인했다.
총 10분짜리 영상 중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공격 분량이 8분.
그리고 나머지 2분 중에 1분 30초는 벤치 클리어링 영상이었다.
“점수를 어떻게 낸 거야?”
“8회 말에 마크 스테리가 3점 홈런을 때렸습니다.”
“코리는?”
“홈런 직전에 볼넷으로 출루했습니다.”
“그게 다야?”
“한국의 선발 투수 공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6이닝 동안 3안타밖에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선발로 등판한 송찬우는 미국 대표팀을 상대로 인생 경기를 펼쳤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와 거의 비슷한 타선을 상대로 10개의 탈삼진을 솎아내며 경기를 지켜보는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했더니 쏭이었네.”
“네. 하이라이트 영상에는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너무 잘 던져서요.”
“그러니까 오늘 경기를 정리하자면 썬은 역시나 잘했고 미국 대표팀은 맥없이 무너졌다는 거지?”
“썬을 막지 못한 순간부터 경기를 잡긴 힘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경기 초반에 내분도 있었으니까요.”
“내분?”
“지금 언론들은 피터 페츠가 오늘 경기를 망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피터 페츠가 언론에 대고 쓸데없는 말만 하지 않았더라도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다저스 구단 역량을 총동원해 부정적인 언론을 막았을 것이다.
하지만 박유성의 영입에 걸림돌이 된 지금은 피터 페츠가 어떻게 되든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이 대응하지 마.”
“그렇지 않아도 그 어떤 인터뷰도 하지 말라고 홍보팀에 지시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아니더라도 조쉬가 알아서 잘 처리할 거야.”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언론 플레이는 우리보다 한 수 위니까요.”
“그래. 그런 건 전문가가 알아서 해야지.”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피식 웃었다. 지금쯤 피터 페츠 때문에 머리를 쥐어 뜯고 있을 조쉬 애버튼을 생각하니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만약에 조쉬 쪽에서 연락이 오면 뭐라고 할까요?”
“조쉬가? 설마 이 와중에 FA 계약을 하자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리미어 12를 통해 피터 페츠를 띄우려던 계획은 실패했으니까요. 오히려 미국 야구팬들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으니 다른 구단과 이야기하는 것보다 팀에 남는 걸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대한민국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대패한 미국 대표팀은 결승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오늘 대만에게 패배한 푸에르토리코와 함께 공동 5위로 밀리면서 다른 팀들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만에 하나 이대로 미국 대표팀이 허무하게 귀국길에 오른다면 언론은 피터 페츠를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유성을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대표팀 주장인 조이 패런트와 싸웠고 선발 투수로서 제 역할을 하나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조쉬 애버튼이라면 어떻게든 피터 페츠를 다저스와 엮어 우군을 늘리려 들 터.
그 과정에서 피터 페츠와 싼 값에 계약할 수는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내년 시즌 구상 속에 피터 페츠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다.
“조이에게 말해. 퀄리파잉 오퍼도 없다고.”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아요?”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말이야. 보따리까지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게 인간이야. 난 차라리 내년 시즌을 버리더라도 월드 시리즈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을 만들고 싶어.”
“리빌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야. 다만 썬도 리그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만에 하나 부진하더라도 팬들과 언론이 압박하지 못할 환경을 만들겠다는 거네요.”
“나오미에게 얘기하지 않을 거지?”
“기자에게 운영 총괄 사장이 시즌을 던진다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구상이 다소 파격적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다저스를 위한 결정이라면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조이는 왜 썬의 편을 들어준 거야?”
“조이요?”
“벤치 클리어링이 날 뻔했을 때 말이야. 썬이 더그아웃 밖으로 나오니까 조이가 재빨리 끼어들었잖아. 이건 누가 보더라도 썬을 보호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야…… 자이언츠도 썬을 노리고 있을 테니까요.”
“결국 그런 건가?”
“오히려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언론에 멋대로 떠들어댄 투수가 있는 팀이나 같은 팀 동료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선수가 있는 팀과 자이언츠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웃기는군. 자이언츠라고 인종 차별이 없을 거 같아?”
“있겠죠. 하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건 없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자이언츠가 싫어.”
쓴웃음을 짓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문제의 벤치 클리어링 장면을 돌려 봤다.
그러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눈을 똥그랗게 떴다.
“로이! 이것 좀 봐!”
“그걸 아직도 보고 계십니까?”
“여기, 여기서 말이야. 썬이 뭐라고 하니까 전부 썬을 바라봤잖아! 보여?”
“그야 다들 썬을 주시하고 있었으니까요.”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썬의 입모양을 봐. 지금 영어로 말하는 것 같지 않아?”
“영어로요?”
“그래! 만약에 사실이라면 대단한 거야. 국제 대회에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앞에 두고 영어가 튀어나올 만큼 영어에 자신 있다는 거니까.”
“일단 현장에 있던 기자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로이 홀랜드 보좌역은 30분 만에 돌아왔다.
“앤드류. 전력분석팀에 인원 보충해야 하는 거 알죠?”
“그래?”
“그 자리에 앤드류가 들어가는 게 어때요?”
“그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앤드류 말이 맞았습니다. 썬이 영어로 말했다고 해요. 그것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죠.”
“그렇지? 영어 맞지?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탁상 테이블을 내려치며 좋아했다. 그러자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물었다.
“썬이 아무리 영어를 잘한다고 해도 전문 통역은 무조건 붙여야 합니다.”
“알아. 하지만 클럽하우스까지 일일이 쫓아다닐 수는 없는 거라고.”
“썬이 영어를 공부 중이라는 건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
“문제를 하나 내지. 남미 선수들이 빈볼을 맞았어. 그럼 무슨 말이 튀어나올까?”
“그야 욕이죠.”
“그래. 욕. 아마 십중팔구는 스페인어일 거야. 벤치 클리어링때도 마찬가지야. 흥분하면 스페인어부터 쏘아댈걸?”
“하지만 썬은 영어를 썼죠.”
“그만큼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는 거야. 만약에 그 상황에서 썬이 한국어로 화를 냈어봐. 어떻게 됐겠어?”
“아마 더 불탔을 겁니다. 썬이 욕을 한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조이가 먼저 반응한 것도 그래서야. 썬이 영어로 말을 한다는 건 반대로 자신들이 떠들어대는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는 거니까.”
뭔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아낸 것처럼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때 같았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로이 홀랜드 보좌역도 이번에는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보니 확실히 썬은 준비가 된 선수 같습니다.”
“그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거라고! 썬은 단순히 야구만 잘했던 게 아니야. 메이저리그에 적응하기 위해 영어도 수준급으로 마스터한 거라고.”
“썬이 정말로 통역 없이 선수들과 대화하는 게 가능하다면 썬을 중심으로 팀을 재편하겠다는 앤드류의 구상도 실현 가능해지겠네요.”
“역시! 내가 이래서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다음 날 아침.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나오미 알렌과 조식을 함께하면서 박유성의 영어 사건(?)을 알려주었다.
“오호, 흥미로운데요?”
“그렇지? 보통 아시아에서 온 선수들이 배척받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언어 때문이야. 북중미 선수들도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하잖아. 그런데 비싼 돈을 받고 온 선수가 통역을 옆에 끼고 다니면 얼마나 꼴사나워 보이겠어?”
“하지만 썬은 메이저리그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그 일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영어를 공부했다는 쪽으로 기사를 쓰라는 거죠?”
“물론 썬이 기대만큼 영어를 잘하는 건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그 상황에서 영어로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다는 건 굉장하잖아?”
“그렇죠. 의도했다면 상당히 영리한 행동이에요. 아니, 플레이 스타일을 보면 의도했겠네요.”
나오미 알렌이 빵을 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의 템퍼링 위반을 감시하기 위해 따라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한국 관광만 하다가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썬의 부모는 언제 만날 예정이에요?”
“아침 먹고 바로 움직일 생각이야.”
“선약은 되어 있는 거죠?”
“그럼. 이미 어제저녁에 에이전트를 통해 양해를 구했어. 어쩌면 오늘 점심은 썬의 집에서 한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을지 몰라.”
기분 좋게 식사를 마친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일행과 함께 서울로 넘어갔다.
차가 막히지 않아서 예정보다 30분 일찍 도착했는데 다행히 박유성의 부모가 문을 열어주었다.
“반갑습니다. 앤드류. 저는 썬의 에이전트 소속인 킴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썬의 영어 선생님이기도 하죠.”
“오오, 그렇지 않아도 썬이 누구에게 영어를 배우나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발음이 정말 좋은데요?”
“하하. 네.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통역 일도 꾸준히 하고 있고요.”
“혹시 썬의 영어 실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글쎄요. 어떤 기준으로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끼더라도 충분히 대화가 가능할 정도는 됩니다.”
“역시. 썬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네요.”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터라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집구경을 했다.
“집 구조가 낯설지가 않네요.”
“미국의 유명한 건축과 교수님이 디자인하신 집이에요. 부모님과 함께 살려고 지었다는데 운 좋게 저희가 살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썬의 방을 한 번 봐도 될까요?”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박유성의 본가를 언제 다시 방문할지 알 수 없으니 박유성의 방을 한번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박유성의 방은 신민아의 흔적들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그 방은 신혼 방이라 보여 드릴 수가 없어요.”
“아, 참. 썬이 약혼을 했죠?”
“대신 다른 곳을 보여 드릴게요.”
이선영이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지하 피트니스 룸.
최신식 운동 기구들이 즐비한 공간을 보기가 무섭게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내가 뭐랬어? 썬은 노력하는 천재라고 했지? 이 기구들을 봐! 피트니스 센터를 차려도 되겠어!”
잠시 후 시간에 맞춰 박영철이 집으로 돌아오자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 일행은 다시 거실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나오미 알렌과 메이저리그 사무국 관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희 팀 선수가 썬에게 큰 실언을 했습니다. FA 선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전 소속팀 사장으로서 대신 사과를 하러 왔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인들이 고개를 숙이자 한마디 하겠다고 벼르던 박명철도 화가 풀렸다.
“아이고. 아닙니다. 잘못은 그 선수가 했죠. 암튼 이렇게 된 것도 인연인데 식사라도 같이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