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62화 (362/412)

타자 인생 3회차! 362화

41. 슈퍼라운드(6)

-초구는 볼. 거의 얼굴 높이로 공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손에서 빠졌다기보다 의도적으로 던진 것 같은데요. 조금만 더 깊었다면 박유성 선수가 맞을 뻔 했습니다.

-참고로 피터 패츠 선수는 지난 시즌 181이닝을 투구하는 동안 볼넷은 단 48개밖에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투포수, 사인 교환을 마친 가운데 이제 2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볼.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났습니다.

“젠장할.”

구심이 스트라이크를 주지 않자 피터 페츠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초구에 버린 공은 바로 이 2구를 넣기 위한 빌드업이었다.

최대한 몸 쪽에 붙여 박유성을 움츠리게 만든 뒤에 자신의 장기인 백도어 슬라이더로 스트라이크를 잡고 가려 했건만.

일본인 구심은 공이 빠졌다고 선언했다.

타석 밖으로 한 발 물러선 박유성도 피식 웃었다.

‘이거 왠지 우리를 밀어주는 느낌인데?’

사실 방금 공은 스트라이크를 줘도 딱히 불만 없었다.

오히려 방금 공을 스트라이크로 잡아준다면 비슷한 코스의 공은 파울로 걷어내며 피터 페츠를 괴롭힐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미국이 결승전 티켓을 두고 다투고 있어서일까.

구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조금 짜게 느껴졌다.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스트라이크 존이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단순히 1회차를 살았다면 2구 판정을 믿고 히팅 존을 타이트하게 잡았겠지만 박유성은 평소처럼 루틴을 펼쳤다.

2구를 잡아주지 않았던 구심이 갑작스럽게 보상 판정이랍시고 터무니없는 공에 스트라이크를 선언할지도 모르는 일.

이럴 때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여기고 다음 공을 준비하는 게 가장 좋았다.

포수 조이 패런트도 괜찮다는 수신호로 피터 페츠를 달랬다.

조금 더 안쪽으로 끌어당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아직 경기 초반인 만큼 판정 하나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후우…….”

피터 페츠도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볼 카운트가 타자에게 유리해졌으니 박유성도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를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3구째 몸 쪽으로 떨어뜨린 체인지업이 허무하게 빠지자 피터 페츠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도 볼! 공 3개 연속 볼이 들어옵니다.

-지금 체인지업을 던진 것 같은데요. 박유성 선수 상대로 저런 체인지업이라. 하하.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저렇게 티 나는 체인지업은 국내 투수들도 던지지 않는데요.

-그렇죠. 저렇게 공을 버릴 바에야 차라리 가장 자신 있는 공으로 몸 쪽 승부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피터 페츠 선수.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박유성 선수를 무시하는 발언을 해서 국내 야구팬들의 빈축을 샀는데요. 정작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스트라이크 하나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거야 일종의 기 싸움이라 치더라도 방금 3구는 너무 아쉽네요. 차라리 바깥쪽으로 던졌다면 이해라도 하겠는데 몸 쪽으로 저런 공을 던지면 이제 던질 공이 없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지적대로 조이 패런트와 피터 페츠는 한참 동안 사인을 주고받았다.

조이 패런트는 볼넷이 되더라도 바깥쪽으로 공 하나를 더 떨어뜨리길 바랐지만.

이대로 박유성을 볼넷으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던 피터 페츠가 스트라이크를 던지겠다고 고집을 부린 것이다.

연거푸 고개를 가로젓던 피터 페츠가 마운드에서 발을 빼버리자 조이 패런트도 자리에서 일어나 3루 쪽 더그아웃을 바라봤다.

“에릭. 어떻게 할까요?”

마이크 영 벤치 코치가 조이 패런트를 대신해 물었다.

볼 카운트상으로는 박유성을 거르는 편이 나았지만 박유성을 경기 초반부터 풀어줄 경우 피터 페츠가 흔들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가 끼어들었다.

“어렵게 승부를 하더라도 조금 더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다 투구 수만 늘어날 수도 있잖아.”

“그래도 그렇게 해야 해요. 경기 초반이고 피터 페츠도 100퍼센트 몸이 풀린 게 아닐 겁니다. 끝내 볼넷을 주더라도 썬을 상대로 밸런스를 잡는 편이 낫습니다. 이대로 썬을 내보냈다가 적시타를 얻어맞으면 피터 페츠가 버티지 못할 겁니다.”

“흠…….”

에릭 지터 감독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박유성에게 집착해 봐야 의미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제이슨 피비 투수 코치의 말을 듣고 보니까 여기서 피터 페츠의 기를 꺾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맞아봐야 한 점이니까 일단 피터가 원하는 대로 던지게 해주자고.”

벤치의 결정을 전달받은 조이 패런트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쓸데없이 공만 버릴 것 같은데.”

지난 LA 올림픽 때부터 박유성을 상대해 온 조이 패런트는 박유성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은 높은 확률로 안타를 만들어내고.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들어오는 공은 간결한 스윙으로 걷어내며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나는 공은 귀신같이 골라낸다.

이런 타자를 상대하려면 그냥 안타를 맞아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가장 자신 있는 공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피터 페츠는 최근 들어 포심 패스트 볼의 구위가 떨어진 상태.

보더 라인에 걸치는 빠른 공 사인을 내봐야 고개를 가로저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스트라이크 존을 공략하는 변화구를 던지자니 위험 부담이 너무 컸다.

박유성이 변화구에 약점을 보이는 타자라면 또 모르겠지만.

스트라이크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은 구종을 불문하고 80% 이상의 확률로 안타를 만들어내는 괴물이었다.

‘어쩔 수 없어. 다시 슬라이더를 쓰는 수밖에.’

어렵게 생각을 정리한 조이 패런트는 2구째 던졌던 그 슬라이더를 다시 요구했다.

앞서 구심이 잡아주지 않았던 만큼 박유성도 그냥 흘려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공이 보더 라인 근처로만 들어오면 이번에는 어떻게든 끌어 잡아서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내 볼 생각이었다.

조이 패런트의 생각을 읽은 피터 페츠도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포심 패스트 볼이나 체인지업보다는 차라리 슬라이더가 자신 있었다.

‘쓰리 볼이니까 무리해서 치진 않겠지.’

길게 숨을 고른 뒤 피터 페츠가 있는 힘껏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면서 조이 패런트의 미트보다 조금 왼쪽으로 공을 끌었다.

만에 하나 공이 빠져서 허무하게 볼넷을 내주느니 살짝 몰리더라도 스트라이크 존에 확실히 걸치도록 던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깨에 힘이 들어가면서 공이 거의 한복판으로 몰리듯 날아들었고.

따악!

박유성은 그 공을 놓치지 않았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 날아갑니다!

-이건 펜스까지 날아갈 것 같은데요?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아아! 타구가 펜스 상단을 맞고 떨어집니다!

펜스가 조금 낮은 구장이었다면 다이렉트로 담장을 넘어갔을 타구였지만.

4.3미터나 되는 도쿄 돔 담장의 상단 모서리에 찍힌 타구는 수직으로 솟구쳤다가 다시 펜스를 때리고는 그라운드 안으로 떨어졌다.

“오우, 쉣!”

하마터면 경기 시작부터 홈런을 허용할 뻔했던 터라 우익수 루이스 넬슨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루이스! 3루로! 빨리!”

“뭐? 벌써?”

타구를 잡고 몸을 돌렸을 때는 이미 박유성이 2루를 지나 3루로 내달리는 중이었다.

“루이스!”

저만치 유격수 케빈 모랄이 소리를 내질렀지만.

루이스 넬슨은 케빈 모랄을 무시하고 곧바로 3루를 향해 공을 내던졌다.

그러나 이제 막 베이스 커버에 들어간 3루수 바비 데이브는 박유성에게 정신이 팔려 제대로 된 포구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박유성 2루를 돌아 3루로 내달립니다. 공은 바로 3루로! 아아! 3루에서 공이 빠집니다!

-다행히 조이 패런트 선수가 백업에 들어왔습니다만 방금 송구는 터무니없었습니다. 루이스 넬슨 선수가 공을 잡은 순간 박유성 선수는 이미 3루로 돌고 있었어요.

-만약에 조이 패런트 선수의 백업 플레이가 없었다면 박유성 선수가 곧바로 홈을 파고들었을 텐데요.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보면 박유성 선수가 송구를 보지 않고 3루 베이스 코치를 보고 뛰는데 정말 잘한 겁니다. 만약에 송구를 보고 자의적으로 판단했다면 오버런이 됐을 수도 있어요.

-조이 패런트 선수도 빠진 공을 잡기가 무섭게 3루로 송구를 하려고 했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3루 베이스로 바로 귀루하는 바람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다소 어수선해진 경기 분위기가 정리되기까지는 3분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그리고 박유성의 타구는 3루타로 기록이 됐다.

단순히 결과만 놓고 보자면 선두 타자에게 3루타를 얻어맞고 실점 위기에 몰린 것이겠지만.

TV 앞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베이슨과 미카엘은 거대한 태풍이 몰아친 것 같은 충격에 빠져 있었다.

“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후우…….”

“미카엘! 뭐라고 말 좀 해봐! 피터 페츠가 썬을 잡을 수 있을 거라며?”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해! 나라고 저렇게 될 줄 알았어?”

“젠장할. 이래서 다저스 선발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얘기야. 자이언츠 포수가 제대로 리드를 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잖아!”

“그게 무슨 말 같잖은 소리야? 방금 송구를 조이 패런트가 커버하지 못했다면 바로 한 점을 내줬을 거야!”

“그 빌어먹을 송구를 던진 것도 자이언츠 놈이야!”

“뭐? 지금 말 다 했어?”

“이거 안 놔?”

그렇게 자이언츠 팬인 미카엘이 다저스 팬 베이슨의 멱살을 움켜쥔 순간.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이 TV를 타고 울렸다.

순간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TV 쪽으로 돌아갔고.

중계 화면에는 유유히 홈으로 들어오는 박유성의 모습이 잡혔다.

“X발. 또 뭐야?”

“하아. 뭐긴 뭐야. 빌어먹을 다저스 투수 놈이 안타를 처맞은 거지.”

“거지 같은 자이언츠 포수 놈. 대체 어떻게 리드를 하는 거야?”

“지금 미국 최고의 포수를 비난하는 거야?”

“미국 최고의 포수면 당연히 연속 안타를 막았어야지! 초구에 얻어맞으면 어쩌자는 거야?”

다저스의 에이스인 피터 페츠가 지구 라이벌이자 원수인 자이언츠의 주전 포수 조이 패런트와 호흡을 맞추는 상황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양 팀 팬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자이언츠 팬들은 최악의 투수의 공을 받아줘야 하는 조이 패런트를 안쓰러워했고.

다저스 팬들은 조이 패런트가 피터 페츠의 피칭을 망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물론 대다수 정상적인 팬들은 감정을 털고 한 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1회 초부터 3루타와 적시타로 허무하게 점수를 내주고 나니까 미국 대표팀 SNS가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한국을 상대로 피터 페츠라니? 제정신인 거야? @linda K

└피터 페츠 따위가 썬을 막을 리 없잖아. 애당초 불가능한 미션이었다고. @truebluefan745

└피터 페츠는 썬을 이겨내겠다고 투지를 불태웠어. 썬의 눈치를 보는 다른 선수들처럼 비겁하게 굴지 않았다고! @Dodgers SN

└그건 투지를 불태운 게 아니라 객기를 부린 거야. @stinall

└전적으로 동감해. 피터 페츠가 과연 국가 대표팀의 이익을 위해 나섰을까? @benzmoney

└그럴 리가. 결국 본인의 몸값을 올리려는 쇼맨십에 불과해. @Coco75448

└썬에게 3루타를 얻어맞은 건 아쉬워. 하지만 민에게 곧바로 적시타를 허용한 건 포수 문제야. @Whiteheart77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이가 사인을 낼 때마다 고개를 가로젓는 게 누구인데? @Jefff!

└사인이 안 맞을 수는 있겠지만 안타를 맞을 가능성이 높은 공을 던지도록 내버려 두는 건 포수의 직무유기라니까? @go Dodgers

└난 양키즈 팬인데 솔직히 조이에게 실망했어. @Domini

└뭐?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Go Giants!!

└난 피터 페츠가 잘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어. 하지만 조이 패런트는 믿었다고. @Domini

└그런 얘기라면 자이언츠 팬으로서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하지만 투수가 형편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Go Giants!!

└닥쳐! 빌어먹을 자이언츠 놈들아! @Sepulve

└하아. 고작 1점 내준 걸로 싸우는 모습을 보니까 오늘 경기 지겠네. ㅅㅂ @Bravebo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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