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59화
41. 슈퍼 라운드(3)
송현민이 피터 페츠 인터뷰를 언급했을 때.
박유성은 별것 아닌 이야기로 송현민이 호들갑을 떠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피터 페츠의 인터뷰는 박유성이 듣기에도 선을 넘었다.
-피터, 내일 경기 선발로 등판할 예정인데 컨디션은 어때요?
-컨디션이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포스트 시즌 기간 동안 푹 쉬었잖아요? 체력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직후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는데요?
-미국을 국적으로 가진 야구 선수라면 다들 똑같았을 겁니다. 객관적인 전력상 미국 대표팀이 가장 강하잖아요?
-하지만 결국 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다들 썬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것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썬이 그렇게 대단한 선수인가요? 메이저리그나 일본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잖아요?
-썬이 뛰고 있는 한국의 야구 수준도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나 일본만큼은 아니겠죠. 그리고 저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농담이죠?
-이제 썬에 대한 질문은 그만 받고 싶네요. 저에 대한 질문을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내일 경기에서 썬을 어떻게 상대할 계획입니까?
-썬에 대한 특별한 계획 같은 건 없습니다. 제 기준에서 썬은 다른 타자들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썬을 막지 못하면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처럼 한국에게 패배할 수도 있습니다.
-천만에요. 내일은 다를 겁니다. 내일은 달라요. 왜냐? 제가 선발이기 때문이죠.
“…….”
표정이 굳어진 박유성을 보며 송현민이 불을 지폈다.
“장난 아니지?”
“네. 좀 심하네요.”
“메이저리그 4년 차인 내가 듣기에 피터 페츠는 널 개무시하고 있어. 진심인지 에이전트가 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송현민은 메시지 너머의 뉘앙스를 봐야 한다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지난 3년간 외국인 선수들과 매일같이 대화를 나누며 프리 토킹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절 싫어하는 느낌인데요?”
“당연히 싫어하지. 너 때문에 지금 FA 계약이 미뤄졌으니까.”
“그게 왜 저 때문이에요?”
“원래 사람은 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 이 세상에 완벽하게 이타적인 인간이 있는 줄 아냐? 너는 나와 함께 뛰는 조건으로 1억 달러 깎아달라면 깎아줄래?”
“미쳤어요?”
“미쳤……어요는 좀 너무한 거 아니냐?”
“1억 달러라면서요? 형은 포기 가능?”
“야 인마, 나한테 1억 달러 빼면 뭐 먹고 살라고?”
송현민의 주가가 연일 상승하는 중이라지만.
그래봐야 연봉 총액 1억 달러 초중반이었다.
박유성처럼 7억 달러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이라면 또 몰라도.
현재 계약 수준에서 1억 달러를 빼야 한다면 국내에 유턴해서 편하게 야구 하는 편이 더 나았다.
“암튼 피터 페츠 입장에서는 내일 경기에서 뭔가 보여줘야 해. 푸에르토리코 상대로 딱히 잘 던진 것도 아니었거든.”
지난 조별 예선에서 미국 대표팀은 멕시코, 베네수엘라, 푸에르토리코와 한 조를 이뤘다.
미국 대표팀의 무난한 슈퍼 라운드 진출이 예상되는 가운데 처음으로 국가 대표에 합류한 피터 페츠가 푸에르토리코전에 선발 출전했는데 5이닝 동안 7피안타 3실점의 평범한 성적을 남기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그때 언론에서 잘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건 그냥 극소수의 이야기야. 메이저리그 기자들 중에서도 피터 페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순수 미국인이라서요?”
“어떻게 알았냐? 맞아. 피터 페츠는 조부가 모두 미국인이야. 그래서 광신도들이 좀 많지.”
“그렇게 따지면 형이나 저도 별반 다르지 않을걸요?”
박유성 등장 전에 가장 많은 야구팬을 보유했던 건 송현민이었다.
훤칠한 외모와 시원시원한 야구 스타일, 거기에 생각 이상으로 깔끔한 여자관계까지 여성 팬들이 좋아하고 집착할 만한 조건들을 전부 갖췄다.
박유성 등장 이후 인기가 다소 시들해지긴 했지만.
한창때는 송현민과 결혼하면 50만 시누이를 감당해야 한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였다.
“야, 요즘 팬카페 다 죽었더라. 가끔 글 남겨도 댓글이 1,000개도 안 달려.”
“욕심이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많긴. 근데 너는 참 신기하다. 약혼 기사까지 났는데 어떻게 팬들이 늘지?”
“저는 형과 다르게 사심 팬들이 거의 없으니까요.”
“너 지금 50만 현민바라기들 모욕하냐?”
“형이 지금 인정하고 있네요. 현민바라기라고. 그러다 형 평생 결혼 못 해요.”
“그런 악담은 제발 여자부터 소개시켜 주고 해줄래?”
유명 스포츠 스타에게 추종하는 팬들이 붙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다만 그럴수록 언행에 조심해야 하는데 피터 페츠는 눈앞의 FA 계약에 눈이 먼 상태였다.
“이거 아직 기사로 안 나왔죠?”
“미국 현지 인터뷰니까 영상 따고 번역하고 하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하아. 이걸 대응해야 하나?”
“대응은 무슨. 경기력으로 보여주면 되는 거지.”
“그건 당연한 거고요. 제가 맞고만 사는 성격은 아니라서요.”
선수들의 인터뷰 내용이 과장되어 선수들 간의 불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았다.
라이벌로 묶인 박준수와 민병규의 경우는 아예 반쯤 포기한 상태고.
같은 학교 출신인 송찬우와 임찬기도 송찬우가 스타즈로 이적해 투수 부분 골든 글러브를 타기 전까지 이간질성 비교 기사가 끊이질 않았다.
이럴 때는 보통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체하는 게 상책이라고들 말하지만 박유성의 생각은 달랐다.
마냥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오히려 진실로 여기고 왜곡하고 확대해석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어떻게요?”
“대놓고 말하는 거지. 피터 페츠와 같은 팀에서 뛰고 싶지 않다고 말이야.”
“에이, 형. 그건 좀 아니죠.”
“아니야? 너무 치사해?”
“치사한 것까진 없는데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대놓고 피터 페츠 FA 계약에 훼방 놓는 꼴이잖아요. 나중에 피터 페츠가 취업 방해로 고소하면 어쩌려고요?”
“취업 방해? 이게 그렇게 되나.”
“하아……. 형. 농담한 거잖아요.”
“아니야, 인마. 메이저리그 사무국에도 피터 페츠 좋아하는 인간들이 분명 있을 텐데 이걸로 문제 삼을 수도 있어. 미국이 괜히 변호사들의 천국인 줄 아니? 20년 된 부부가 마트에서 물건 고르다 말다툼만 해도 어느 순간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 들러붙는다고.”
“암튼 적당히 돌려서 한마디 해야겠어요.”
피터 페츠 인터뷰 관련 기사는 대한민국보다 일본에서 먼저 터졌다.
[피터 페츠, 한국 잡겠다 선언!]
[한국은 미국과 일본의 아래다! 메이저리그 사이영상급 투수 피터 페츠 일갈!]
[다저스 에이스 피터 페츠, 한국 야구 모른다고 밝혀 충격!]
[도발인가 자신감인가? 피터 페츠, 박유성 언급 철저히 무시.]
진보 언론과 보수 언론 할 것 없이 피터 페츠의 일부 발언을 타이틀로 내세워 기사를 쏟아내자 일본은 물론이고 대한민국까지 들끓었다.
└피터 페츠 미친 거 아니냐? 2년간 삽질하더니 야구 포기한 거야?
└진짜 사이영상이라도 받고 떠들었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이건 뭔가 싶네요.
└피터 페츠 한때 사이영 상에 근접한 투수 아니었나요?
└사이영 상에 근접만 했지 막상 사이영 상은 못 탔습니다. 지난 2년 성적은 그냥 3선발 수준이었고요.
└다들 이해해 줍시다. 올 시즌 FA인데 성적은 안 나오고, 팀은 포스트 시즌에서 탈락했는데 박유성 온다니까 저러는 거임.
└다저스는 박유성 영입 포기한 거임?
└포기했을 리가요. 지금 피터 페츠 FA 계약 뒤로 미룬 게 박유성 때문인데요?
└그럼 왜 저럼? 박유성 다저스 못 오게 깽판치는 거임?
└오호, 이거 그럴싸한데?
└아무래도 이게 맞는 듯.
일본발 기사가 다시 국내로 전해지면서 커뮤니티가 뜨겁게 달아오를 때쯤.
송 에이전시에서 피터 페츠 관련 기사를 내보냈다.
[박유성, 피터 페츠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 피터 페츠와 맞대결 기대된다.]
처음 기사를 접한 야구팬들은 살짝 당황했다.
└뭐야? 이거 박유성 입장 맞아?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요? 에이전시에서 박유성 대신 발표한 거 아님?
└박유성 원래 겸손함의 대명사잖아요. 저는 저런 반응 예상했음.
└겸손도 정도가 있죠. 피터 페츠가 대놓고 깠는데 이걸 이렇게 넘어간다고?
└저는 박유성 입장 충분히 이해합니다. 피터 페츠가 두 시즌 부진했다고 해도 메이저리그 간판급 투수인데 같이 맞받아치면 이미지가 뭐가 되겠어요?
└저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중입니다. 솔직히 우리보다 박유성 선수 속이 더 부글부글거리겠죠.
└언플해서 이기면 뭐 합니까? 선수는 경기력으로 보여주는 거죠.
└오늘 경기 박유성 5타수 5안타에 히트 포 더 사이클 예상. ㅋㅋㅋ
└저도요.
박유성의 육성이 아니라 송광철 대표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이다 보니 그 진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박유성이 피터 페츠의 저격에 화가 났다고 분석했다.
“윌리엄 교수한테 답변받았어?”
“네. 방금 연락 왔습니다.”
“뭐래? 다른 의미가 숨어 있는 거 맞지?”
“혹시 로메오 클레멘스를 기억하십니까?”
“로메오 클레멘스? 그게 누군데?”
“예전에 자이언츠에서 뛰었던 투수입니다.”
“누군지 모르겠으니까 넘어가고. 로메오 클레멘스는 왜?”
“썬이 스타즈의 지명을 받고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 참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땐 아마추어 선수 신분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로메오 클레멘스가 도발을 했다고 합니다.”
“도발? 무슨 도발?”
“정확한 멘트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워딩은 피터 페츠와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썬이 뭐라고 했는데?”
“지금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맞받아쳤다고 합니다. 당시 로메오 클레멘스는 메이저리그 복귀 가능성이 있었는데 썬과 맞대결 여론 때문에 한국에 남았다고 하고요.”
“설마 썬 때문에 남았을 리가.”
“물론 금전적인 문제가 크겠지만 그 당시 사례를 근거로 윌리엄 교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피터 페츠와 계약하면 썬을 영입할 수 없을 거라고요.”
“젠장할.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다저스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이 책상을 내려쳤다.
피터 페츠와의 FA 계약을 뒤로 미루니까 조쉬 애버튼이 피터 페츠를 움직여 박유성 영입에 훼방을 놓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자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 두 손바닥을 내밀며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을 진정시켰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빨리 구단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어떻게? 무슨 수로? 피터 페츠와 재계약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라고?”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앤드류. 저도 피터 페츠가 다저스에서 부활하길 간절히 바라는 한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피터 페츠가 선을 넘었습니다. 피터 페츠의 발언 때문에 썬이 자이언츠에 입단한다고 생각해 봐요. 당분간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저뿐만이 아닙니다. 이미 상당수 다저스 팬들이 피터 페츠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확실한 정보야?”
“거의 모든 다저스 팬들은 이번에 썬을 영입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 팀 안에 피터 페츠가 포함되길 희망하는 거였죠. 하지만 피터 페츠 때문에 썬이 다저스를 거부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건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나 다름없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