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55화
40. 프리미어 12(9)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 불리던 일본전에서 일본 야구의 전설 오타니 쇼헤를 상대로 선제 솔로포를 때려냈지만 박유성의 표정은 더없이 차분했다.
그 모습이 중계 카메라를 통해 비치자 대한민국 중계석도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제 1 대 0입니다. 아직 오늘 경기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잡히지 않은 상태입니다.
-박유성 선수가 경기 시작부터 점수를 뽑아내 주긴 했습니다만 아직 방심할 때가 아닙니다. 박유성 선수의 득점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입니다. 일본 대표팀도 박유성 선수에게 단 한 점도 내주지 않겠다는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박유성 선수가 큰 경기에 강하다는 건 일본 대표팀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 지난 LA 올림픽부터 시작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아시안 게임, 아시아 프로 야구 챔피언십 등 번번히 박유성 선수에게 발목이 잡혔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일본 대표팀은 줄 점수를 줬다고 생각하고 경기에 임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박유성 선수의 홈런은 잊고 경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끌고 와야 해요.
강기태 감독도 민병규를 불러놓고 최대한 공을 지켜보라고 주문했다.
“오타니는 길어야 6회까지야. 그전에 끌어내려야 해.”
“걱정하지 마세요. 감독님. 제가 공 10개 보겠습니다.”
“10개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투 스트라이크 먹기 전까지는 방망이 휘두르지 마. 너 급한 거 일본 애들이 제일 잘 알아.”
“에이, 저 올해 볼넷 많이 늘었는데요?”
“그래서? 유성이만큼 골랐냐?”
“크흠. 유성이는 반칙이죠. 감독님 커리어 통산 홈런보다 유성이가 더 쳤을걸요?”
“내가 8개 더 쳤어 인마.”
15년간 프로 생활을 한 강기태 감독의 통산 홈런은 249개.
프로 야구 역대 20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그 밑을 바짝 추격하고 있는 게 다름 아닌 박유성이었다.
3시즌 합산 241홈런.
이미 프로 야구 시즌 기록을 전부 갈아 치운 상태지만 통산 기록에 있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무튼 유인구 조심해. 알았지?”
“어휴. 걱정 마시라니까요.”
“이상한 공 건드려서 죽기만 해. 바로 빼버릴 거니까.”
“저 말고 2번 칠 선수가 없을 텐데요?”
“없긴 왜 없어? 영완이 있는데. 영완이 아까부터 몸 풀고 있는 거 알지?”
지난 아시안 게임 때는 감백호와 기정후가 불참했지만.
이번 프리미어 12에는 일찌감치 대표팀에 합류한 상태였다.
당연하게도 선발 우익수 자리는 기정후의 몫이었다.
기정후 다음 옵션인 백영완은 언제든 투입될 수 있도록 몸을 푸는 중.
만약에 백영완을 투입해야 한다면 경험이 풍부하고 박유성과 중견수 스위칭이 가능한 기정후보다는 좌익수 수비가 아직 미덥지 못한 민병규를 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강기태 감독의 으름장이 먹혔을까.
따악!
민병규는 4구째 몸 쪽을 파고드는 슬라이더를 잡아당겨 1, 2루간을 꿰뚫어냈다.
-민병규도 안타! 대한민국 대표팀의 테이블 세터가 제대로 밥상을 차려냅니다!
-불리한 볼카운트에서 오타니 쇼헤 선수가 승부를 걸었는데 민병규 선수가 잘 때려냈습니다.
-사실 저 코스를 민병규 선수가 상당히 좋아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박유성 선수에게 가려지긴 했지만 민병규 선수도 정확도가 좋은 타자입니다. 몸 쪽 빠른 공에 강하고 저렇게 꺾여 들어오는 공을 안타로 만들어낼 수 있는 타격 기술을 갖춘 타자죠.
-박유성 선수가 워낙 잘하다 보니까 상대적으로 다른 타자들의 활약상이 묻히는 감이 없지 않지만 민병규 선수도 올 시즌 0.345를 때려냈는데요.
-박유성 선수가 없었다면 MVP 후보로도 손색이 없었겠습니다만 장호영 캐스터의 말처럼 박유성 선수가 워낙에 잘하니까요.
-불현듯 제갈공명과 한 시대에 태어난 것을 한탄했던 오나라 주유가 떠오르는데요. 이제 또 한 명의 주유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무사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건 박준수.
지난 아시안 게임부터 대표팀의 3번 타자로 낙점을 받은 상태였다.
기존의 3번 타자 송현민이 합류하면서 박준수의 타순을 두고 코칭스태프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지만.
강기태 감독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참가하지 못하는 국제 대회를 고려해 박준수를 밀어주기로 결정을 내렸고.
메이저리그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송현민도 대표팀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리를 양보했다.
“후우…….”
박준수가 타석에 들어서자 오타니 쇼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올 시즌 박준수의 시즌 성적은 타율 0.364에 56홈런, 163타점.
지난해보다 타율이 소폭 하락하긴 했지만 3년 연속 0.360 이상에 50홈런, 150타점을 기록하며 중량감을 대폭 올렸다.
앞서 상대한 민병규는 힘으로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면.
박준수와 뒤이어 등장하는 송현민은 조금만 삐끗해도 장타를 얻어맞을 가능성이 높은 타자.
제아무리 오타니 쇼헤라 해도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본 중계석에서도 신중한 승부를 주문했다.
-1루에 민병규가 안타를 치고 나간 가운데 타석에 박준수가 들어옵니다.
-박준수도 힘이 좋은 타자입니다. 송현민이 있는데 전진 배치됐다는 건 그만큼 믿는다는 이야기예요.
-여기서 가장 좋은 건 역시 땅볼을 유도하는 것일 텐데요. 만에 하나 박준수까지 출루하게 된다면 그다음은 송현민입니다.
-비록 박유성에게 홈런을 얻어맞긴 했지만 오타니 쇼헤의 컨디션이 나빠 보이진 않거든요? 다만 아쉬운 건 너무 서두른다는 건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공 하나하나에 신경을 집중해야 해요.
벤치의 지시를 받은 포수 구와하라 세이지는 철저하게 유인구 위주의 사인을 냈다.
초구에 빠른 공 하나를 바깥쪽으로 뺀 뒤에.
2구째 몸 쪽 체인지업을 붙여 파울을 유도하고.
3구째 다시 비슷한 코스에 포크 볼을 떨어뜨려 박준수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도 몸 쪽! 좋은 공이 들어왔습니다만 박준수 선수가 잘 참아냈습니다.
-아마도 벤치에서 유인구에 조심하라는 사인이 나온 것 같은데요. 이제부터는 박준수 선수도 스트라이크 존에 걸쳐 들어오는 공을 적극적으로 공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박준수는 몸 쪽을 파고드는 156㎞/h의 빠른 공을 반사적으로 걷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5구째 바깥쪽을 돌아 들어오는 백도어성 슬라이더를 놓치며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괜찮아. 잘했어.”
“다음에 치면 돼.”
동료들의 독려를 받으며 더그아웃으로 들어온 박준수는 박유성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잔뜩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들어온 거 맞아?”
“구심이 들어왔다고 하면 들어온 거죠?”
“구심 판정 이상해. 저렇게 돌아 들어오는 공을 잡아주면 어떻게 하라고?”
“형. 여기 도쿄 돔이에요. 똥개도 제집 앞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데 그 정도 편파 판정은 감안해야죠.”
“그렇지? 판정 이상하지?”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라니까요? 만약에 다음 타석 때도 오타니가 저 공을 던진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어떻게 할 거예요?”
“쳐야지. 스트라이크를 잡아줬잖아.”
“그럼 저 공을 언제 던지는 게 가장 효율적일까요?”
“지금처럼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던져야지.”
“형을 삼진으로 잡을 생각이라면 투 스트라이크 이후가 낫겠죠. 하지만 만약에 투 앤 투가 아니라 풀카운트라면요? 그때도 지금처럼 던질 수 있을까요?”
“그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오타니 쇼헤인데?”
“오타니 쇼헤는 사람 아니고 기계래요? 방금 공은 볼이 되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던진 거예요. 그걸 구와하라 세이지가 끌어 잡은 거라고요. 하지만 풀카운트에서 형이 바깥쪽 슬라이더를 머릿속에 염두에 두고 있다는 걸 의식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럼 좀 힘들긴 하겠다. 몰리면 맞는 거고 빠지면 볼이잖아.”
“이제 됐죠?”
“……?”
“결국 저 공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냐고 투덜대려던 거잖아요. 대처법 알려줬으니까 짜증 가라앉히고 글러브 챙겨요. 형 대표팀 막내 시절 한참 지났어요. 이제 중고참이라고요.”
박유성 세대가 대거 합류하면서 기존의 막내 라인이었던 박준수와 민병규, 송찬우, 임찬기도 선배 노릇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런 중고참들이 국제 대회에서 해줘야 하는 게 바로 분위기 관리.
후배들을 다독이고 고참들을 보좌하면서 팀을 이끌어가야 했다.
국내외 언론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가리켜 팀 박유성이라 부르곤 하지만 박유성이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질적인 후배가 없는 박유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실력적으로 보여주면서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선배들을 챙기는 것.
그렇다면 박준수도 삼진을 털어내고 팀의 중고참으로서 경기에 집중해 줘야 했다.
“하아. 진짜 난 왜 국대까지 와서 혼나냐.”
“내가 혼낸 거 아니고 형이 혼나러 온 건데요?”
“그게 그거지 인마. 암튼 알았다. 다음 타석 때 제대로 보여줄 테니까 기대해라.”
동기이자 라이벌인 민병규가 안타를 쳤는데 자신은 삼진을 당했다는 사실에 꽂혀 있었던 박준수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타석에 선 송현민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하나 날려! 메이저리그 올스타의 파워를 보여줘!”
초구를 골라낸 뒤 숨을 고르고 있던 송현민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박준수의 외침에 헛웃음이 났다.
“메이저리그 올스타의 파워는 뭐야.”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안다고 평소 응원을 잘 하지 않던 박준수의 독려에 잠시 집중이 깨졌지만.
다소 억울한 판정에 삼진을 당했다고 투덜거리는 것보다는 백번 나아 보였다.
“우리 유성이가 고생이 많아. 진짜 같은 팀으로 이적할까?”
레인저스 언론과 팬들은 송현민이 레인저스에 잔류할 거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지만.
정작 송현민은 레인저스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가장 큰 이유는 더그아웃의 분위기.
동양인인 송현민이 팀 내 수위 타자로 활약하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물론 예전처럼 대놓고 인종 차별하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동양인보다는 서양인이 조금 더 우월하다는 기본적인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인정받고 존중받는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내심 한인들이 많이 사는 팀으로 이적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조금 더 우호적인 환경에서 마음 편하게 뛰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박유성이 하는 걸 보니까 그냥 팀에 박유성만 있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성이하고 세트로 팔려가려면 나도 뭔가를 보여줘야겠지.”
다시 타석으로 돌아온 송현민이 길게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몸 쪽 낮게 깔려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있는 힘껏 퍼 올렸다.
따악!
묵직한 파열음이 다시 한번 도쿄돔에 울려 퍼졌고.
타구의 방향을 확인한 민병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홈을 향해 내달렸다.
살짝 힘이 부족했던지 쭉쭉 뻗어나가던 타구가 펜스 상단에 부딪혀 튕겨 나왔지만.
공보다 민병규가 먼저 홈을 밟으면서 살짝 꺾일 뻔했던 분위기를 되살렸다.
“현민이 형!”
2루에 안착한 송현민을 향해 박유성이 더그아웃 난간까지 나와 주먹을 뻗었다.
그리고 그런 박유성에게 화답하듯 송현민이 약속된 세레머니를 선보였다.
그 모습을 TV를 통해 지켜보던 다저스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고개를 돌려 로이 홀랜드 보좌역을 바라봤다.
“쏭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