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53화
40. 프리미어 12(7)
“후우…….”
타석 밖으로 물러난 박유성도 상기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솔직히 감당하지 못할 만큼 빠른 공은 아니었지만 오타니 쇼헤라는 이름값 때문일까.
생각보다 방망이가 조금 늦게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착하자. 어깨에 힘 좀 빼고.’
다시 타석에 들어선 박유성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몸 쪽 공이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따악!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타구는 다시 1루 쪽 관중석 너머로 사라졌고.
“그렇지!”
“힘내! 오타니!”
“저 녀석을 삼진으로 잡아버리라고!”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가 되면서 도쿄 돔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타니 쇼헤가 박유성을 상대로 유리한 볼카운트를 선점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중계석은 볼카운트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타니 쇼헤 선수가 다시 한번 몸 쪽으로 빠른 공을 붙여봤습니다만 박유성 선수가 가볍게 걷어냈습니다.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첫 맞대결이고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같은 코스에 같은 공을 연달아 던지는 투수는 거의 없으니까요.
-일단 볼카운트도 오타니 쇼헤 선수에게 조금 더 유리해지긴 했는데요. 박유성 선수는 지난 세 시즌 동안 단 한 차례도 삼진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어정쩡한 유인구는 박유성 선수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오타니 쇼헤 선수도 잘 알 겁니다. 몸 쪽으로 두 개 던졌으니까 이제는 바깥쪽으로 하나 뺄 차례인데요. 구와하라 세이지 선수가 어떤 사인을 낼지 궁금해지네요.
포수석에 앉은 구와하라 세이지도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을 정리했다.
보통 원 볼 투 스트라이크라면 투수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볼카운트겠지만 상대는 박유성.
국제대회에서 9할의 맹타를 휘두르고 있는 괴물 타자였다.
‘일단 몸 쪽은 위험해.’
구와하라 세이지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포크 볼.
사인을 확인한 오타니 쇼헤는 잠시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구와하라 세이지가 요구하는 코스로 정확하게 공을 찔러 넣었다.
-4구는 바깥쪽! 이 공에 박유성 선수의 방망이가 나가지 않습니다.
-지금 포크 볼을 던졌는데요. 구속이 무려 144㎞/h나 나왔습니다.
-오타니 쇼헤 선수의 나이를 고려한다면 포심 패스트 볼 구속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요. 포크 볼로 144㎞/h를 찍었습니다.
-어지간한 타자라면 방망이가 끌려 나올 만한 공이었는데요. 역시 박유성 선수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네요.
마치 포크 볼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흘려보내는 박유성을 향해 국내 중계진의 찬사가 쏟아졌다.
일본 중계석도 리플레이 화면을 돌려 보며 박유성의 집중력을 높이 평가했다.
-오타니가 정말 좋은 공을 던졌는데요. 박유성이 침착하게 잘 골라냈습니다.
-골라낸 게 맞나요? 혹시 공이 너무 빨라서 대응하지 못한 게 아닐까요?
-다른 타자라면 모르겠지만 박유성은 선구안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요. 지금 세 시즌 연속 삼진이 없습니다.
-선구안도 선구안이지만 박유성, 배짱이 좋네요. 사실 투 스트라이크면 비슷한 공에 방망이가 나와야 정상이거든요?
-그렇죠. 상대는 메이저리그 MVP 출신인 오타니 쇼헤입니다.
-하지만 박유성은 오타니 쇼헤의 이름에 주눅 들지 않는 느낌입니다. 너무나 침착하게 포크 볼을 골라냈어요.
-괜찮습니다. 아직 투 볼 투 스트라이크. 오타니에게 주도권이 남아 있습니다.
-이번 공이 중요합니다. 방금 공처럼 의미 없이 던지면 안 됩니다.
-차라리 맞춰 잡을 생각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최대한 스트라이크 존에 가깝게 던져야 합니다.
일본 중계석의 우려를 들었던지 구와하라 세이지도 다시 바깥쪽에 꽉 찬 공을 주문했다.
볼 판정을 받았던 초구보다 공 1개 정도 안으로 들어오는 코스.
제대로 걸쳐 들어오기만 한다면 박유성의 스윙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인을 확인한 오타니 쇼헤도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른일곱.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타격을 포기하고 투구에 집중한 가장 큰 이유는 박유성과 진검승부를 펼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그나마 구속이 나오는 포심 패스트 볼이 나았다.
지난 연습 경기에서 기록한 최고 구속은 161㎞/h.
체력적인 한계 때문에 구속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은 만큼 박유성에게 모든 걸 쏟아붓고 싶었다.
“후우…….”
오타니 쇼헤가 길게 숨을 고르자 박유성도 본능적으로 승부가 들어올 거라는 걸 눈치챘다.
‘몸 쪽으로 들어올까? 아니야. 오타니 쇼헤는 여전히 실투가 많은 편이야. 앞서 들어온 포심도 조금만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왔다면 충분히 때려낼 수 있었어.’
투타 겸업에 가려지긴 했지만 오타니 쇼헤는 제구가 좋은 투수가 아니었다.
160㎞/h에 달하는 빠른 공과 알려줘도 못 친다는 포크 볼 조합으로 투수로서도 사이영상급 피칭을 보여주긴 했지만 최고 레벨의 투수들에 비해 볼넷도 많고 실투도 많은 편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뛰면서 커맨드가 좋아졌다 하더라도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 던지면 컨트롤이 흔들리게 마련.
‘스트라이크 존을 좁히자.’
천천히 루틴을 펼친 박유성은 마치 초구를 기다리는 것처럼 히팅 존을 타이트하게 설정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타니 쇼헤는 괴성을 내지르며 공을 내던졌다.
-아, 이 공도 빠집니다!
-제가 앞서 얘기했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인데요. 국내 투수들도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투 스트라이크를 잡고 나면 던질 공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지 않습니까?
-어지간한 유인구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속을 만하다 싶은 공은 전부 걷어내서 투구 수만 늘어난다는 원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죠.
-박유성 선수에 대해 분석을 했다면 방금 공은 조금 더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게 던져야 했습니다. 그래야 박유성 선수도 반응을 했을 텐데 이 공은 너무 아쉽네요.
-지금 느린 화면으로 다시 나오고 있는데요. 공에서 손이 빠지는 순간부터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느낌입니다.
-장호영 캐스터가 느끼는 걸 타석에 선 박유성 선수가 느끼지 못할 리 없겠죠.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이제 일본 벤치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거를지, 아니면 범타를 기대하고 승부를 볼지 말입니다.
“후우…….”
공을 돌려받은 오타니 쇼헤는 마운드 아래로 내려가 길게 숨을 골랐다.
살짝 빠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박유성도 반응을 해줄 줄 알았건만.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게 살짝 얄밉게 느껴졌다.
그때 1루 쪽 관중석에서 어린 야구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타니이이! 지지 마아!”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사방에서 힘내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팬들의 응원에 힘이 났겠지만.
지금은 왠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안 끝났어. 오타니. 할 수 있어.”
오타니 쇼헤가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사이 일본 대표팀의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이 구와하라 세이지를 불렀다.
“공은 어때?”
“좋습니다.”
“방금 공은 왜 뺀 거야?”
“뺀 게 아니라 빠졌습니다.”
“의욕이 앞섰던 거야?”
“오타니 상도 박유성을 잡고 싶어 했으니까요. 투 스트라이크라서 욕심을 부려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붙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지난 2026년 아시안 게임부터 지금까지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은 사무라이 제펜이라 불리는 일본 야구 대표팀을 맡고 있었다.
성적만 놓고 보자면 지금 당장 경질이 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2026년 아시안 게임은 홈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패배해 금메달을 내줬고.
2028년 LA 올림픽과 202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대한민국이 우승하는 걸 구경만 했으며, 아마추어 선수들을 끌고 간 2030년 아시안 게임 때는 호주와 졸전 끝에 동메달 획득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다.
국제 경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마다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은 국민들 앞에 고개를 숙여 용서를 빌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사퇴의 뜻을 밝혔다.
하지만 일본 야구 협회는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을 경질하지 않았다.
단순히 감독을 바꾼다고 해서 성적이 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를 거였으면 2026년 아시안 게임 직후 잘라야 했지만 그때는 메이저리그에서 뛰고 있는 일본 선수들이 대부분 불참했다는 핑계가 있었다.
반면 2028년 LA 올림픽과 202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상황이 달랐다.
오타니 쇼헤가 불참하긴 했지만 전력적으로 역대 최강이라 불릴 만큼 초호화 라인업을 꾸리고 참가한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정확하게는 박유성에게 연거푸 발목을 잡혔다.
오죽하면 박유성이 참가한다는 이유만으로 2030년 아시안 게임을 포기했을 정도.
사정상 계속해서 국가 대표 감독 자리를 맡고 있지만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이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번 프리미어 12를 끝으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무능한 감독이 일본 야구를 망치고 있다는 비난도 그만 듣고 싶었다.
그래서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은 이번 대회 우승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구와하라.”
“네. 감독님.”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 오타니의 공으로 박유성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잘 모르겠습니다.”
“붙어봐야 알겠다는 거야? 아니면 불안하다는 거야?”
“…….”
“구와하라!”
“솔직히…… 힘들 거 같습니다.”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의 다그침에 구와하라 세이지가 마지못해 속내를 털어놓았다.
야구 선수이기 이전에 일본인으로서 오타니 쇼헤는 존경받아 마땅한 위대한 선수였다.
하지만 야구는 피지컬이 중요한 스포츠였다.
올 시즌 투수로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자기 관리를 잘했다 하더라도 커리어의 정점을 찍고 있는 박유성을 상대로 정면 승부는 위험했다.
그러자 아나바 이쓰노리 감독이 구와하라 세이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몸 쪽 하이 패스트 볼을 요구해.”
“하이 패스트 볼이요?”
“그래. 오타니도 그 공이라면 자신 있게 던질 거야.”
“박유성은 속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어.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인을 내. 알았지?”
“감독님.”
“어서 가 봐. 오타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포수석으로 돌아온 구와하라 세이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스트라이크 존에 바짝 붙인 공들도 전부 골라낸 박유성이 몸 쪽 높은 공에 속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결국 박유성을 걸러야 한다면 이렇게라도 승부를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마음을 다잡은 구와하라 세이지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몸 쪽.
높은 코스.
패스트 볼.
여기서 공을 빼야 한다는 사인을 추가해야 했지만 구와하라 세이지는 손가락을 멈췄다.
지금 분위기상으로는 볼이 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배려가 쓸데없는 오해를 낳았다.
‘몸 쪽 높은 공이라. 박유성을 삼진으로 잡아보라는 이야기인가? 좋아. 한번 해보자.’
길게 숨을 고른 오타니 쇼헤가 다시 기합성을 내지르며 투구판을 박차고 나왔고.
후앗!
오타니 쇼헤의 손끝을 빠져나온 공이 머리 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