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47화
40. 프리미어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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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왜?”
“나도 야구 하면 형아만큼 잘할 수 있을까?”
“글쎄.”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어보는 박유성을 보며 신민아가 멋쩍게 웃었다.
보통 이럴 땐 더 잘할 수 있다고 우쭈쭈 해주는 게 일반적이라지만.
3년 연속 타격 8관왕에 MVP와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고 팀을 통합 3연패로 이끈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만큼 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격려가 아니라 조롱 같았다.
“유신이도 형아처럼 야구 할 거야?”
“아니.”
“그럼 축구 할거야?”
“푸우우. 모르게써.”
박유신이 손에 쥔 태블릿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송흔민의 플레이 영상에 푹 빠져 살았지만.
요즘은 축구 영상을 봐도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박유성을 따라 야구를 시작하자니 겁이 났다.
그런 박유신에게 신민아가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형아가 그러는데 유신이는 야구 하면 잘할 거래.”
“정말?”
“물론 형아만큼 잘하긴 힘들지도 몰라. 형아는 전 세계에서 야구를 제일 잘하거든.”
박유성이 박유신의 어떤 점을 보고 야구를 잘할 거라고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민아도 미래의 도련님이 야구를 해주길 바랐다.
박유성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야구를 시킬 생각이었다.
박유성이 언제까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은퇴를 하게 될 터.
그때 박유성을 대신해 박유신이 현역에서 뛰어준다면 아들에게 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형아는 언제 한국 와?”
“지금 대표팀 합숙 기간이라 아마 출국 전날에 잠깐 들를 거야.”
“누나도 형아 못 만나?”
“응. 누나도 못 만나. 그래서 지금 유신이하고 놀아주고 있잖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신현준 부회장은 신민아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었다.
하나는 신주희처럼 유학을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유세영처럼 일찌감치 경영에 참여하는 것.
신현준 부회장은 내심 신민아가 회사에 들어오길 바랐지만 신민아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대학 다니면서 제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볼게요.”
봉사활동 겸 재능 기부를 할 때까지만 해도 신민아는 당분간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래서 신상욱 회장이 박유성을 만나보지 않겠냐고 권했을 때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신하게 지내다가 정략 결혼의 대상이 되느니 할아버지인 신상욱 회장이 좋아하는 박유성과 잠깐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촌들이 끼어들면서 소개팅 자리가 엉망이 됐을 때는 인연이 아닌 줄 알았지만.
후원 행사에서 다시 만나게 되니까 어쩌면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요?”
“보통 야구 선수들은 내조 잘하는 여자 좋아하지 않아요?”
“내조받으면 좋죠. 그런데 야구 선수는 일 년에 절반 정도 집을 나가 있어야 하거든요. 계속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는데 내조를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박유성은 생각보다 어른스러웠다.
자신보다 한 살 어려서 육체적인 관계만 밝히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일에 지나치게 집중해서 경기장을 찾아가도 말 몇 마디 나누기 어려울 정도였다.
“저도 나름 바쁘게 사는데 유성 씨는 더 바쁜 거 알아요?”
“시즌 중에는 시간 내기가 어려워서요. 미안해요.”
“제가 듣기로 다른 야구 선수들은 시즌 중에 술도 마시고 클럽도 가고 다 한다던데요?”
“그럼 저도 그럴까요?”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면 시간 끌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요. 서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잖아요?”
“저도 지금 억지로 시간 내고 있는 건데요?”
“하아……. 그럼 그냥 그렇게 말하죠. 괜히 시간 낭비했잖아요.”
“그 말이 아니라 시즌 준비하느라 정신 없는 와중에 민아 씨 만나려고 억지로 시간 내고 있는 거라고요.”
“……? 그럼 나한테 마음 있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나왔죠?”
“그런데 왜 경기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요? 혹시 집돌이에요? 아니면 정말 집에 와이프 숨겨놨어요?”
“아, 그게 궁금하셨구나. 그럼 우리 집에 놀러 와요. 제가 뭘 하는지 보여줄게요.”
정식으로 세 번째 데이트를 했던 날 신민아는 엉겁결에 박유성의 집에 따라갔다.
처음에는 얼굴이 잘 알려진 유명인이라 집 데이트를 선호하는 건가 싶었지만.
막상 집에 도착한 박유성은 곧바로 지하 웨이트 룸으로 내려갔다.
“민아 씨 만나느라 오늘 운동을 못 해서요. 미안한데 3시간만 기다려 줘요.”
“3시간이나요?”
“최대한 빨리할게요.”
자신을 놔두고 러닝머신을 타는 박유성을 보며 신민아는 헛웃음을 흘렸다.
할아버지인 신상욱 회장 때문에 대놓고 퇴짜를 놓지 못하니까 이런 식으로 돌려서 까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3시간 내내 쉬지 않고 구슬땀을 흘리는 박유성을 보니까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매일 이렇게 운동을 해요?”
“야구는 한 시즌에 150경기를 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체력 관리가 중요해요.”
“그런데…… 유니폼 입을 때는 몰랐는데 몸이 엄청 좋네요?”
“몸 좋은 남자 싫어요?”
“그럴 리가요. 전 오히려 너무 우락부락한 남자 싫어해요.”
“그럼 몸을 적당히 키워야겠네요.”
박유성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박유성의 가족들과도 가까워지자 신민아는 경기장에 직접 찾아가는 걸 자제했다.
지방 원정 경기일 때는 전화와 깨톡으로 연락하고.
홈 경기나 수도권 원정 경기일 때는 먼저 박유성의 집으로 가서 박유성이 오길 기다렸다.
주말에도 야외 데이트보다는 집이나 호텔 데이트를 즐겼다.
박유성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메이저리그 진출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박유성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박유성과 연애한 지 2년이 지난 지금.
박유성의 방은 거의 신민아가 쓰게 됐다.
“형아 경기 언제 해?”
“아직 며칠 남았어.”
“누나는 형아 안 보고 시퍼?”
“누나도 보고 싶지. 그런데 지금 대표팀 합숙 중이라서 보고 싶어도 참아아 해. 그러니까 유신이도 며칠만 참자. 알았지?”
심심하다며 놀러 왔던 박유신을 박유선이 데리고 나가자 신민아는 핸드폰을 꺼내 박유성에게 깨톡을 보냈다.
[신민아 – 자기. 바빠?]
답변이 오면 잠깐 목소리라도 들으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읽지 않음 표시가 사라지지 않았다.
“유신이 얘기 들으니까 갑자기 보고 싶네.”
언론에는 동거 중이라는 소문이 날 만큼 매일같이 박유성을 만나서인지 몰라도 대표팀에 합류한 요 며칠이 몇 개월처럼 느껴졌다.
그때 지이잉, 하고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친오빠 신민철.
“어, 왜?”
-너 어디야? 방에 없던데?
“유성이 집.”
-유성이네 집? 지금 유성이 대표팀 합숙 중 아니야?
“맞아.”
-야, 넌 무슨……. 아니 네가 가족이 없어 집이 없어? 유성이도 없는데 거기서 뭐 하냐?
“남이야 뭘 하든 무슨 상관이실까? 왜? 가율 언니하고 싸웠어?”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긴. 그런 거 아니면 오빠가 날 왜 찾아?”
신민아가 박유성과 집 데이트를 즐기던 무렵.
신민철도 회장실 비서실에서 일하는 한가율과 연애를 시작했다.
한용준 비서실장은 자신의 딸이 오너 일가와 엮이는 걸 부담스러워했지만.
예전부터 한가율을 손주며느릿감으로 점찍었던 신상욱 회장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번에는 또 왜 싸웠는데?”
-싸운 거 아니라니까.
“그럼 뭘 또 잘못하셨는데?”
-그냥……. 게임에 현질 한 거 걸렸어.
“게임? 무슨 게임? 그 야구 게임? 그거 아직도 하고 있어?”
-아직도라니. 내가 지금 랭킹 1위인데? 그리고 이게 다 네 남친 때문이라고.
“왜 또 시비지?”
-시비가 아니라 이번에 시즌 카드 나왔잖아. 작년보다 잘하면 어떻게 하냐?
“그래서 새로 뽑아야 했다 이거야?”
-그럼. 내가 1등 덱인데 30유성을 쓸 순 없잖아.
“그럴 거면 그냥 신성 소프트에 입사를 해.”
-나도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럴까 고민 중이다.
지난해 125승 25패로 프로 야구 역대 한 시즌 최고 기록을 갈아 치운 스타즈는 올해 다시 한번 프로 야구 역사를 새롭게 썼다.
129승 21패.
승률은 무려 0.860에 달했다.
스타즈가 3년 연속 프로 야구 최다승을 갈아 치울 수 있었던 건 박유성의 활약 덕분이었다.
2029년 0.749의 타율로 전 세계 야구팬들을 경악하게 만든 박유성은 지난해 0.762에 이어 올 시즌에 0.771의 타율로 또다시 커리어 하이 시즌을 썼다.
타율뿐만 아니라 404안타에 홈런 86개. 241타점. 460득점. 150도루를 기록하며 프로 야구 단일 시즌 모든 기록들을 갈아 치웠는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볼넷이었다.
“유성이 이번 시즌 카드가 잘 나온 거야?”
-게임 회사도 먹고살아야 하잖아. 당연히 새 시즌 카드 스탯이 더 좋지.
“유성이 말로는 별 차이 없을 거라던데?”
-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유성이는 이미 인간인 게 의심스러울 만큼 잘하고 있어. 그런데 해마다 성적을 끌어올리고 있다고. 이건 3년 연속 수능 만점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거라니까?
“그래서 그 핑계로 얼마나 쓰셨는데? 지난번처럼 오백만 원?”
-크흠. 그것보다 조금 더 썼지.
“미쳤다. 미쳤어. 아니 그깟 그래픽 카드가 뭐라고 그 돈을 써?”
-이번에 유성이 볼넷 신기록 세웠잖아. 특수 능력이 개사기로 나왔어. 기존 유성이 카드는 못 쓸 정도라고.
올 시즌 박유성이 골라낸 볼넷은 자동 고의4구를 포함해 233개.
메이저리그에서 절대 깨지지 않을 거라던 베리 본드의 232개(2004년)를 한 개 차이로 경신했다.
게다가 박유성은 0.771의 타율을 유지하면서 볼넷을 얻어냈다.
“그래서 뭐? 유성이 때문에 돈 많이 써서 가율 언니한테 혼났으니까 돈 좀 보태달라고?”
-그럴래?
“그럴래는 뭐가 그럴래야. 오빠 언제 철들래? 그래서 가율 언니하고 결혼 할 수 있겠어?”
신민아가 한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신민철이 철이 없는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모바일 게임에 미쳐서 월급과 성과급을 전부 털어 넣는 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신민철도 믿는 구석은 많았다.
-어차피 결혼하면 가율이한테 용돈 받고 살아야 할 판인데 뭘. 그리고 나 돈 꿀 데 많으니까 걱정 마.
“참고로 난 한 푼도 안 빌려줄 거다.”
-너한테 안 빌려도 되거든? 나 돈 엄청 많은 야구 선수 동생 있거든?
“유성이한테 돈 빌리기만 해?”
-나도 유성이하고 친하거든? 그리고 결혼도 안 했으면서 네가 왜 난리야?
“오빠도 결혼 안 했잖아!”
-우린 연초에 약혼했거든? 그리고 남녀 사이 모르는 거다 너? 식장에 들어가기 전까진…….
“끊어!”
전화를 끊은 신민아가 한참을 씩씩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언론에서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 때문에 짜증인데 친오빠까지 보탤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작년에 약혼하는 건데.”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훈련소에 입소하기 전.
양가에서 약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훈련소 입소로 박유성이 머리를 밀어야 하는 상황이었던 터라 신민아가 반대를 했다.
가능하면 가장 예쁜 모습으로 사진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다 올해도 그냥 넘어가면 어떻게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