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46화 (346/412)

타자 인생 3회차! 346화

39. 카운트다운(14)

지난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만 해도 민병규는 박유성의 조언을 참고만 했다.

박유성이 대단한 재능을 가진 타자인 건 인정했지만.

프로 경험이 전혀 없는 후배의 조언을 마냥 따르는 것도 모양 빠지는 짓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이 2년 연속 7할을 치고.

박유성에게 많은 걸 배운다던 박준수가 자신을 훌쩍 뛰어넘자 민병규도 생각이 달라졌다.

“찬기 슬라이더라고 했지?”

민병규는 타이거즈의 임찬기와 드래프트 동기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최고의 유망주 자리를 놓고 경쟁한 것으로도 모자라 2024년부터 올해까지 7년간 같은 리그에서 맞붙다 보니 임찬기의 공만큼은 이골이 나 있었다.

임찬기 상대 프로 통산 타율도 0.310으로 준수한 편.

“어디 한번 던져봐.”

타석에 들어선 민병규가 방망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자 포수 가오진더가 바깥쪽으로 공을 하나 뺐다.

-초구는 볼. 스트라이크 존을 살짝 벗어납니다.

-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민병규 선수가 침착하게 잘 골라냈습니다.

-앞서 박유성 선수를 상대로 과감하게 몸 쪽 싱커를 찔러 넣었는데요. 민병규 선수에게는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아무래도 홈런을 맞은 여파가 남아 있을 겁니다. 게다가 박유성 선수에게 가려져서 그렇지 민병규 선수도 만만한 타자가 절대 아니죠.

-참고로 민병규 선수는 2025시즌부터 올해까지 6년 연속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 중입니다.

아시안 게임에 출전한 다른 나라들처럼 대한민국 대표팀도 메이저리그 선수들을 배제하고 엔트리를 구성했다.

테이블 세터와 클린업이 모두 가능한 기정후와 대표팀의 해결사 송현민, 뒤에서 중요한 순간에 한 방을 때려줄 감백호가 빠지면서 민병규를 다시 클린업으로 복귀시켜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강기태 감독은 계속해서 민병규를 2번 자리에 고정했다.

민병규 말고는 2번 자리를 감당할 타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2구도 볼!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지켜봅니다.

-이번에는 체인지업인데요. 민병규 선수의 방망이를 끌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저 공이 만약에 몸 쪽으로 들어갔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아마 민병규 선수가 스윙을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몸 쪽 낮은 공을 좋아하는 선수니까요.

-이제 슬슬 몸 쪽 공이 들어올 차례인데요.

-초구에 포심 패스트 볼, 2구가 체인지업이었으니까 싱커를 꺼내 들 타이밍이긴 한데 왕쥔린 선수가 과감하게 던질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말처럼 포수 가오진더는 3구 역시 바깥쪽 사인을 냈다.

원 스트라이크라면 모를까 노 스트라이크에서 몸 쪽 공을 좋아하는 민병규에게 몸 쪽 공을 붙이는 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초구 판정에 빈정이 상한 왕쥔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승부해. 다른 타자들은 못 친다니까?”

선취점을 내주긴 했지만 왕쥔린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다.

박유성은 메이저리그 모든 구단에서 주목하는 최고의 타자.

그런 박유성을 멋지게 잡아내고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받아냈다면 참 좋았겠지만.

박유성에게 얻어맞았다고 해서 몸을 사릴 이유는 없었다.

“하아. 왠지 불안한데.”

무겁게 한숨을 내쉬던 가오진더는 마지못해 몸 쪽 싱커 사인을 냈다.

대신에 최대한 몸 쪽에 붙여 던지라고 주문했다.

민병규가 건드려 준다면 좋겠지만 박유성을 상대했을 때처럼 스트라이크 존에 애매하게 걸쳐 들어오는 공은 얻어맞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가오진더의 생각은 달랐다.

“절대 못 친다니까.”

2025년 17승 6패 평균 자책점 2.44를 기록하고 대만 리그 MVP를 차지한 왕쥔린은 4년(2+2년)에 3천만 달러를 받고 파이어리츠에 입단했다.

당시 지역 언론은 제2의 천신위를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데려왔다며 좋아했다.

1년 전 필리스에 입단한 천신위가 연평균 9백만 달러(4년 3,600만 달러)에 계약한 것에 비해 연간 150만 달러를 아꼈다며 합리적인 쇼핑을 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왕쥔린은 천신위만큼 성적을 내지 못했다.

천신위는 데뷔 시즌에 11승 6패의 성적으로 내셔널리그 신인왕을 차지했지만 왕쥔린은 7승 9패, 평균 자책점 4.55에 그쳤다.

이듬해는 6승 6패 3.93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다가 어깨 부상으로 장기 DL에 이름을 올렸다.

왕쥔린이 천신위만큼 해주길 바랐던 파이어리츠 구단은 왕쥔린과 2년 연장 계약을 포기했고.

부상 이력 때문에 이적이 어려웠던 왕쥔린은 다시 대만 리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만 언론에서조차 왕쥔린의 메이저리그 생활은 끝났다고 단정 지었지만.

왕쥔린은 메이저리그 도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라이벌처럼 여기던 천신위에게 새로운 싱커 그립을 전수받은 왕쥔린은 대만 리그에서 거짓말처럼 부활했다.

지난해 16승 5패에 평균자책점 2.28로 MVP 시절의 구위를 되찾았고.

올해 17승 6패 2.16의 평균자책점으로 타오위안 몽키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생에 두 번째 MVP를 차지했다.

이런 왕쥔린에게 민병규는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하지 못한, 리그에서나 활약하는 타자에 불과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며 왕쥔린은 싱커 그립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날카로운 기합성과 함께 투구판을 박차고 나갔다.

-이번에는 몸 쪽! 민병규 선수가 다급히 공을 걷어냅니다.

-왕쥔린 선수가 아껴두었던 싱커를 던졌는데요. 민병규 선수가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와우.”

타석 밖으로 벗어난 민병규가 혀를 내둘렀다.

박유성에게 조언을 듣긴 했지만 타석에 서서 직접 겪어보니 싱커의 무브먼트가 생각 이상이었다.

“이게 왜 찬기 슬라이더라는 거야?”

민병규의 시선이 답을 구하듯 박유성에게 향했다.

그러자 박유성이 오른손을 집게처럼 오물거렸다.

‘뭐야, 저게? 아, 미트? 그러니까 찬기 슬라이더처럼 결국 스트라이크 존으로 들어온다는 거지?’

임찬기를 국가대표 좌완 에이스로 만들어준 구종은 슬라이더였다.

큰 키와 와일드한 투구폼에서 던지는 슬라이더는 그립에 따라 종으로, 횡으로, 또는 사선으로 꺾여 들어오는데 특히나 좌타자 몸 쪽으로 던지는 슬라이더는 언터처블로 통했다.

오죽하면 임찬기의 슬라이더가 몸에 붙으면 맞고 나가라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하지만 임찬기를 오래 상대한 민병규는 임찬기표 슬라이더의 공략법을 잘 알고 있었다.

무브먼트에 현혹되지 말고 길목을 지킬 것.

어디서 출발을 하건 투수가 던지는 공은 홈플레이트를 지나 포수의 미트에 꽂히게 마련이다.

좌타자의 머리 뒤쪽에서 빠르게 날아든다는 공포심에 짓눌리지만 않으면 스트라이크 존 주변으로 들어오는 공의 히팅 포인트를 어떻게든 맞혀낼 수가 있었다.

“그래. 그거였네.”

박유성의 조언을 이해한 민병규는 씩 웃으며 타석에 들어섰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가오진더는 다시 바깥쪽 사인을 냈지만 왕쥔린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또 도망가자는 거야? 일단 스트라이크부터 잡고 가자니까?”

왕쥔린이 고집을 부리자 가오진더가 이번에도 두 손 들었다.

국가대표 주전 포수이긴 하지만 가오진더는 메이저리그에 갈 실력이 못 됐다.

반면 왕쥔린은 메이저리그 물을 먹고 온 MVP급 투수.

의견이 갈리면 왕쥔린에게 맞출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가오진더에게 몸 쪽 사인을 받아낸 왕쥔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슴에 글러브를 모은 채로 투구를 준비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박유성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싱커 같은데요.”

“진짜? 넌 그게 보여?”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요.”

만약 다른 프로 2년 차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면 뒤통수를 때렸겠지만.

장영호를 비롯해 옆에 앉은 대표팀 선배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주억거렸다.

“코스는?”

“그것까진 모르죠. 하지만 싱커를 던질 거라면 몸 쪽으로 붙이지 않을까요?”

“하긴. 병규가 타이밍을 못 맞췄으니까 한 번 더 찔러볼 가능성이 높지.”

“그럼 알려줄까?”

“아뇨. 아마 병규 형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하아, 하필 병규라 불안한데.”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왕쥔린이 투구판을 박찼고.

후앗!

왕쥔린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다시 한번 민병규의 몸 쪽 깊숙이 날아들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지만.

민병규는 이를 악물고 방망이를 돌렸고.

마지막 순간에 몸 쪽으로 꺾이듯 들어온 공을 정확하게 걷어냈다.

-아! 이 타구가 우중간으로 날아갑니다!

-잘하면 3루까지도 들어가겠는데요?

-민병규 선수 1루를 돌아 2루로! 2루에서 다시 3루로! 공 3루로 연결됩니다만 민병규 선수가 먼저 베이스에 도착합니다.

박유성에 이어 민병규에게까지 얻어맞자 왕쥔린도 무너졌다.

싱커 하나만 던져도 대한민국 대표팀 타자들을 충분히 잡아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그 싱커가 연거푸 공략당하고 나니까 자신감이 꺾인 것이다.

-아, 큽니다! 쭉쭉 뻗어나갑니다!

-이건 넘어간 거 같은데요?

-좌익수 뒤로! 좌익수 뒤로! 좌익수가 이 타구를 멍하니 지켜만 봅니다! 홈런! 쓰리런! 5번 타자 장영호 선수가 오늘 경기에 쐐기를 박습니다!

박유성과 장영호의 홈런을 포함해 1회에만 7점을 뽑아낸 대한민국 대표팀은 대만 대표팀을 14 대 0으로 물리치고 아시안 게임 정상에 올랐다.

승리 투수는 6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친 송찬우.

세이브는 3이닝을 퍼펙트로 틀어막은 김혜성이 챙겼다.

호주와의 조별리그 첫 경기부터 결승전까지 완벽에 가까운 경기력을 선보인 대표팀을 향해 야구팬들도 찬사를 쏟아냈다.

└역대 가장 완벽한 아시안게임이었음.

└인정. 진짜 모든 선수들이 다 잘했습니다.

└주전급 선수들도 잘했지만 백업 선수들도 제 몫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한 선수들 까지 맙시다.

└박유성한테 업혀가긴 했지만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음. ㅋㅋ

└이렇게 되면 박유성은 내년에 바로 메이저리그 진출인가요?

└아시안 게임 우승으로 국대 포인트 다 채웠을걸요?

└아직 국대 표인트 30점 남았습니다. 프리미어 12까지 출전해야 해요.

└만약에 프리미어 12 때 박유성 안 뽑으면 어떻게 됨? 그럼 박유성 스타즈에서 1년 더 뜀?

└국대 에이스가 박유성인데 박유성을 안 뽑고 누굴 뽑나요?

└박유성 내년에 부진하거나 부상당할 수도 있지 않음?

└박유성이 방망이 쥘 힘만 있어도 무조건 데려가지 않을까요?

└그냥 관종인 거 같은데 개소리는 강아지 잡고 하세요.

└강아지도 그런 개소리는 안 들을 듯 ㅋㅋ

└프리미어 12 슈퍼라운드만 진출해도 30점입니다. 박유성 출전하는 한 조 2위는 무난하니까 메이저리그 진출 100퍼센트라고 봐야죠.

아시안 게임을 마치고 돌아온 박유성은 각종 시상식 일정을 소화한 뒤 훈련소에 입소했다.

2030시즌 나눔 리그 MVP는 박유성.

2년 연속 타격 8관왕을 차지한 괴물 타자에게 모든 기자가 1위 표를 던졌다.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박유성은 내년 시즌 목표를 밝혔다.

“어쩌면 국내에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시즌인 만큼 스타즈의 통합 3연패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2031시즌.

박유성은 다시 한번 자신의 기록을 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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