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타자 인생 3회차-345화 (345/412)

타자 인생 3회차! 345화

39. 카운트다운(13)

박유성이 경기 초반부터 맹타를 터뜨리자 강기태 감독도 생각을 바꿨다.

“이대로면 6회나 7회쯤 콜드 게임으로 끝날 거 같은데 찬기를 계속 끌고 가야 하나?”

“날도 더운데 4강전을 위해 일찍 바꿔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바꾸자고. 지금 불펜에 누가 준비하고 있어?”

“만약을 대비해 지원이가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총 8개국이 출전한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호주, 중국, 파키스탄과 A조에 편성됐다.

조별 순위 2위까지 4강전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경계해야 할 팀은 호주.

지난 202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대한민국 대표팀에게 8 대 9, 한 점 차 패배를 안겼던 터라 호주 대표팀과의 조별 예선 첫 경기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강기태 감독도 전날 기자 회견에서 방심하지 않고 호주전을 꼭 잡아내겠다며 필승의 의지를 다졌다.

하지만 4회 초에 점수 차이가 8 대 0까지 벌어지고 나니까 좌완 에이스 임찬기를 계속 끌고 갈 이유가 없어졌다.

-아, 대한민국 대표팀도 투수가 바뀝니다. 선발 투수였던 임찬기 선수가 내려가고 손지원 선수가 마운드로 올라옵니다.

-오늘 경기에 선발 등판하긴 했습니다만 임찬기 선수가 가벼운 복통 증세를 호소했었거든요. 선수 보호 차원에서 한 박자 빠르게 투수를 교체해 주는 것 같습니다.

-강기태 감독도 더운 날씨를 고려해 투수 교체 타이밍을 조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요.

-지금 11월임에도 불구하고 중계 부스가 한여름을 방불케 하거든요? 아마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느끼는 온도는 더 뜨거울 겁니다.

채팅창에서는 임찬기의 강판이 지나치게 이르다는 걱정이 많았지만.

8점의 점수를 등에 업은 손지원은 프로에서 더 날카롭게 가다듬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적극적으로 던지며 갈 길 바쁜 호주 대표팀 타자들을 요리했다.

-이 타구가 2루수 정면으로 굴러갑니다. 2루수 한치원이 공을 잡아 2루로! 유격수 박찬희가 그 공을 다시 1루로! 4-6-3의 더블 플레이가 완성됩니다!

-오늘 손지원 선수의 저 바깥쪽 슬라이더가 예리하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요. 지금도 타자가 건드릴 수밖에 없는 코스로 잘 찔러 넣었습니다.

매 이닝 안타를 허용하면서도 손지원은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공을 던졌고.

그런 패기가 마음에 들었던 강기태 감독은 손지원에게 경기를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 큽니다! 이 타구가 다시 한번 담장을 향해 날아갑니다!

-이 타구도 넘어갈 것 같은데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아! 타구가 펜스 상단에 걸립니다!

-주자들은 다 들어와야죠!

-3루 주자 장영호가 홈으로! 2루 주자 박경호도 홈으로! 그리고 1루 주자였던 박찬희 선수까지 홈을 밟습니다! 스코어 15 대 0! 박유성 선수가 기어코 콜드 게임 스코어를 만들어냅니다!

-박유성 선수 오늘 미쳤습니다. 5타수 5안타에 무려 10타점입니다!

후속 타자 민병규가 중견수 플라이로 물러나면서 박유성을 홈으로 불러들이지는 못했지만 한여름 날씨에서 경기하는 게 고역이었던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들은 한데 모여 콜드 게임 승리를 다짐했다.

그리고 이어진 6회 말.

따악!

송찬우가 던진 초구를 호주 대표팀의 4번 타자 블레이크 켄트가 힘껏 잡아당기자 1루 쪽 더그 아웃에 앉아 있던 호주 대표팀 선수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큽니다! 이 타구가 센터 쪽으로 날아갑니다!

-이거 아무래도 넘어갈 것 같은데요?

맞는 순간 홈런을 직감한 듯 블레이크 켄트가 있는 힘껏 방망이를 내던졌다.

메이저리그였다면 다음 타석 때 머리로 공이 날아와도 할 말이 없을 만한 호들갑스러운 배트 플립이었지만 콜드 게임 직전까지 몰렸던 호주 대표팀의 간판 타자로서 그렇게라도 분위기를 끌어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대로 담장 밖으로 사라질 것 같았던 타구는 점점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끝까지 공을 쫓았던 박유성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아! 이 타구를 박유성 선구가 건져냅니다!

-허, 제가 지금 뭘 본 거죠?

-지금 중계 카메라에 블레이크 켄트 선수의 망연자실해 하는 얼굴이 비치고 있는데요. 제 옆에 앉은 장성오 해설위원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은 경기를 중계해 왔지만 저렇게 멋진 수비는 처음입니다.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호수비에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도 감탄을 터뜨렸다.

“썬의 수비는 여전하네.”

“시즌이 끝나서 무리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대단해. 올 시즌 썬이 보여줬던 호수비 중에서도 최고였어.”

“만약에 방금 공이 넘어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경기야 한국이 이겼겠지. 14점 차이를 뒤집기란 쉽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한국은 어쩔 수 없이 7회까지 뛰어야 했을 거야. 6회 이전에 콜드 게임으로 끝내려면 15점이 필요하니까.”

“역시 썬은 영리해. 경기의 흐름을 읽을 줄 안다고.”

박유성의 호수비 속에 경기는 15 대 0, 6회 콜드 게임으로 끝이 났고.

체력 소모를 아낀 대한민국 대표팀은 중국과 파키스탄을 5회 콜드 게임으로 제압하며 최소 이닝으로 4강에 올라갔다.

4강전 상대는 B조 2위로 올라온 일본.

“목표는 우승입니다. 한국을 상대로 꼭 이기겠습니다.”

임시로 지휘봉을 잡은 일본 대표팀 감독이 한껏 의지를 불태웠지만 정작 경기는 13 대 0, 대한민국 대표팀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아마추어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일본 대표팀 전력으로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우승 이후로 제2의 황금기를 연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을 이길 수가 없었다.

“역시 한국은 강하네요. 참패입니다.”

“아무래도 선수 구성에 있어서 한국에 밀렸던 게 사실이지만 한 점도 뽑아내지 못한 건 좀 충격이네요.”

“한국의 결승전 상대는 대만인데요. 대만의 전력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일본과는 달리 대만은 한국처럼 자국 리그의 최정예 선수들로 팀을 꾸렸으니까요. 팽팽한 경기가 펼쳐질 거라 예상됩니다.”

최소한의 선전을 기대했던 아시안 게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에 완패를 하자 일본 언론은 슬그머니 대만을 끌고 왔다.

조별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을 7 대 2로 제압한 대만 대표팀이라면 대한민국 대표팀의 전승 우승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대만 대표팀 역시 베스트 전력은 아니었다.

필리스에서 뛰고 있는 에이스 천신위와 메이저리그 진출 2년 만에 두 자릿수 승수(10승)를 달성한 천지아런이 모두 대회에 불참한 상황.

결국 결승전에는 대만 대표팀의 세 번째 옵션인 왕쥔린이 투입됐다.

-오늘 대만의 선발 투수는 왕쥔린 선수입니다. 2002년생으로 올해 스물여덟. 키 192㎝에 94㎏의 건장한 체격을 자랑하는 투수입니다.

-2026년에 파이어리츠와 2+2년 계약을 맺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고 부상으로 유턴을 했는데요. 전성기가 끝났다는 평가와는 달리 지난해와 올해 2시즌 연속 15승 이상을 거두고 있습니다.

-작년에 16승 5패에 평균자책점 2.28, 올해는 17승 6패에 평균자책점 2.16으로 MVP를 받았던 2025년 시즌보다 나아진 피칭을 선보이고 있는데요. 대만 현지에서는 아시안 게임 이후 다시 한번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거라는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아마 왕쥔린 선수도 오늘 경기에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을 겁니다. 지금 박유성 선수를 보기 위해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잔뜩 몰려와 있거든요. 굳이 따로 날을 잡아서 쇼케이스를 열 필요가 없습니다.

-앞선 일본과의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도 7이닝 1실점 호투를 펼친 바 있는데요. 오늘도 같은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됩니다.

-오늘 경기를 쉽게 풀어가려면 일단 박유성이라는 큰 산을 잘 넘어야 할 겁니다.

-타석에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에이스, 박유성 선수입니다. 이번 대회에서 14타수 14안타에 7홈런, 무려 10할의 타율을 기록 중입니다.

“후우…….”

박유성을 앞에 두고.

왕쥔린은 싱커 그립을 쥐었다.

메이저리그 시절에는 제대로 제구가 되지 않아서 결정구로 써먹지 못했지만 대만 리그를 다시 평정하다시피 한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지난 LA 올림픽 때 천신위에게 원포인트 레슨을 받고 난 후로 제구는 물론이고 무브먼트까지 좋아진 상태.

이 공으로 아시아, 아니, 세계 최고의 타자 소리를 듣는 박유성을 잡아낼 수만 있다면 메이저리그 재도전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오늘은 힘든 하루가 될 거야. 유성.”

바깥쪽 요구를 빠르게 거절한 왕쥔린은 원하는 사인이 들어오자 단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박유성의 옆구리를 향해 있는 힘껏 공을 내던졌다.

후앗!

갑작스럽게 공이 몸 쪽으로 날아들자 박유성이 흠칫 놀라 오른발을 뒤로 뺐다.

하지만 공은 마지막 순간에 바깥쪽으로 꺾여 들어갔고.

“스트라이크!”

이 공을 구심이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주었다.

-초구는 볼. 몸쪽 깊숙한 코스로 공이 들어왔습니다.

-지금 볼이 아니라 스트라이크를 잡아준 것 같은데요?

-네? 아, 그렇네요. 지금 구심이 스트라이크를 선언했습니다. 이게 맞는 건가요?

-판정은 구심의 영역이니까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사실 방금 공은 S존에서 공 2개 정도 빠졌거든요. 오늘 저 코스를 계속 잡아준다면 글쎄요. 대한민국 타자들이 왕쥔린 선수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중계석의 우려 속에서 박유성이 다시 타석에 들어섰다.

그러자 대만의 포수 가오진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홈플레이트로 붙어 서지 않는다고? 설마 싱커를 전부 버릴 속셈인가?’

공 하나를 바깥쪽으로 빼려 했던 가오진더는 다시 한번 몸쪽 싱커 사인을 냈고.

초구 스트라이크에 기분이 좋아진 왕쥔린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잠시 뜸을 들이던 왕쥔린이 기합을 내지르며 투구판을 박차고 나오자 박유성도 망설이지 않고 방망이를 끌어당겼다.

후앗!

왕쥔린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이 옆구리를 맞힐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겁먹지 않았다.

2년 연속 7할을 쳐서일까.

몸 쪽으로 깊숙이 붙는 빈볼성 공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커트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몸쪽 빈볼에 대한 공포를 이겨내자 왕쥔린표 싱커의 실체가 보였다.

종적인 움직임보다 횡적인 움직임에 치우친 공.

마치 국가대표 좌완 에이스 임찬기가 던지는 슬라이더를 보는 것 같았다.

판단이 서자 박유성은 망설임 없이 방망이를 휘둘렀고.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정확하게 걸린 공은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외야 쪽으로 뻗어나갔다.

-아아! 큽니다! 쭉쭉 뻗어나갑니다!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가 추격을 포기합니다! 홈런! 박유성! 대한민국의 에이스가 아시안 게임 결승전 첫 타석부터 포문을 엽니다!

-왕쥔린 선수가 욕심을 부렸습니다. 방금 공도 싱커였거든요? 박유성 선수에게 같은 코스에 같은 공을 던지면 얻어맞는다는 걸 대만 벤치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빠르게 그라운드를 돌고 들어온 박유성은 하이파이브를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민병규와 박준수에게 팁을 전했다.

“형들. 찬기 형 슬라이더 생각해요.”

“찬기 슬라이더? 아, 싱커 말하는 거야?”

“겁먹지 말고 똥꼬에 힘 빡 주고 버텨요.”

“오케이.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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