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42화
39. 카운트다운(10)
지난해 0.749의 타율을 기록한 박유성은 히팅 존에 콜드 존 자체가 없었다.
스트라이크 존을 9분할 한 모든 영역에서 7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했고.
스트라이크 존 주변을 4분할 한 영역에서조차 6할 이상이었다.
당연하게도 모든 타격 존이 새빨갛게 칠해진 상태.
오죽하면 메이저리그 분석 전문 기관에서 박유성을 위한 별도의 데이터를 내놓았을 정도였다.
“바깥쪽을 살짝 벗어나는 코스의 공을 공략했을 때 타율이 6할 중반, 그리고 몸 쪽으로 꺾여 들어오는 코스의 공을 공략했을 때 타율과 몸 쪽 하이 패스트볼을 공략했을 때 타율이 6할 초반 정도 될 거야.”
“그러니까 로메오가 일부러 안타 확률이 낮은 코스를 공략했다는 건가요?”
“그래. 방금처럼 완벽한 공을 던질 수 있었지만 로메오는 일단 썬의 약점으로 평가되는 영역부터 공략했어.”
“왜요?”
“일단 투 스트라이크를 잡아놓고 승부를 할 생각이었던 거지.”
“썬을 상대로요? 삼진이라도 잡으려고요?”
미셸 라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국 야구 투수들 중에 지난해 박유성을 상대로 피안타율 5할 이하를 기록한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2028년 MVP 출신인 로메오 클레멘스도 마찬가지.
박유성 상대 피안타율이 무려 0.789인데 삼진 욕심을 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박유성은 지난 시즌 단 한 번도 삼진을 당한 적이 없었다.
“왜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한 거예요?”
“무모한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선택을 한 거야.”
“당연한 선택이요?”
“로메오 클레멘스는 한국에서 뛰는 외국인 투수 중에 가장 많은 돈을 받고 있어. 받은 만큼 활약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봐. 피터 페츠가 썬이 무섭다고 개막전부터 볼넷을 내주면 팬들의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어이없고 화가 나겠죠.”
“썬에게 약하다고 해서 승부를 피하는 건 더 이상 통하지 않아. 한국 리그 투수들 중에 썬에게 강한 투수가 누가 있겠어?”
“없죠. 시즌 타율이 무려 0.749잖아요.”
“그래. 그럼 이제 안타를 맞더라도 정면 승부를 해야 해. 특히나 로메오 클레멘스 같은 팀의 에이스는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100퍼센트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미셸 라슨은 일단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조나단 짐머맨이 쓰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랜더스는 지난 시즌 용병 투수 1명으로 시즌을 치렀어. 그리고 쫓겨난 용병 투수는 썬과 트러블이 있었지.”
“기억나요. 썬에게 빈볼을 던지려 했던 선수였잖아요?”
“그래. 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을 따져보자면 결국 썬이야.”
“썬이 잘못했다는 거예요?”
“정확하게는 썬이 너무 잘했지. 랜더스는 썬을 막지 못하고 개막전 3연전을 전부 내줬어. 디펜딩 챔피언이 포스트 시즌에도 진출하지 못한 팀에게 홈 3연전을 전부 내준 거라고.”
“그런데 그런 경우는 종종 있잖아요?”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다저스가 파드리스에게 홈 시리즈 스윕을 당한 거지.”
“끔찍하네요. 이번에 루징 시리즈 한 걸로도 팬들 난리 났잖아요.”
프로야구보다 1주일 앞서 개막한 메이저리그 개막전에서 다저스는 지난 시즌 5위 팀이었던 파드리스를 상대로 1승 2패, 루징 시리즈를 기록했다.
에이스 피터 페츠가 개막전을 잡아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지만.
2차전과 3차전을 연거푸, 그것도 5점 차 이상으로 대패하며 지구 최하위로 추락하자 다저스 팬들이 분노를 쏟아냈다.
“자이언츠와의 원정 3연전에서 2승을 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단장 사퇴 운동이 벌어졌을지도 몰라.”
“그래도 저는 아직 만족이 안 돼요. 지구 3위잖아요.”
“그래. 랜더스 팬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용병 투수가 썬을 상대로 빈볼을 던졌으니 마지못해 패널티를 감수했지만 그렇다고 올 시즌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까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어떻게든 만회해야 한다는 거네요?”
“그렇지. 그것도 원정 개막전에서 에이스가 지난해 최고의 타자였던 썬을 상대로 싸워 이겨준다면 팬들의 기분이 어떨까?”
“뿌듯하겠죠. 다른 상대도 아닌 썬이니까요.”
“그래서 로메오도 자존심을 내려놓고 썬의 약점을 파고든 거야. 그런데 그게 먹히질 않았어. 공 3개 중에 하나 정도는 썬이 건드려 줘야 하는데 썬은 전부 다 지켜보기만 했거든.”
“썬도 자신의 약점에 대해 분석을 한 게 아닐까요?”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커. 어쨌든 올 시즌 썬은 지난 시즌보다 확실히 여유로워졌어. 물론 지난 시즌에도 루키 같지는 않았지만 4구를 고르는 모습을 보니까 베테랑이 다 됐다고.”
“4구를 골라요?”
미셸 라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변의 스카우트들조차 방금 전 4구는 완벽했다고 극찬을 늘어놓았는데 박유성이 골라냈다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자 조나단 짐머맨이 씩 웃었다.
“설마 썬이 4구를 놓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완벽하게 들어왔잖아요?”
“그래. 스트라이크 존으로 제대로 들어왔지. 아마 로메오 클레멘스가 던질 수 있는 공들 중에 최고였을 거야. 그런데 썬이 바깥쪽 공에 약한 타자야?”
“그렇진 않죠.”
“썬은 지난해 바깥쪽 낮은 코스의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오는 공을 상대로 0.800의 타율을 기록했어. 게다가 로메오 클레멘스의 투심 패스트 볼이 엄청 빨랐던 것도 아니야. 스트라이크를 던지려다 보니 한복판을 지나 들어왔다고. 그런데 그 공을 과연 썬이 놓쳤을까? 만약에 볼 카운트가 투 스트라이크였다면? 그래도 썬이 치지 못했을까?”
“그야…… 아니죠.”
“그래. 썬이 충분히 공략할 수 있는 코스의 공이었어. 다만 무리해서 치지 않았을 뿐이지.”
“왜요?”
“3볼이었잖아. 테이블 세터의 미덕은 최대한 많은 공을 보는 거라고. 만약에 썬이 방금 공을 건드렸다면 후속 타자들은 같은 공에 애를 먹었을 거야. 하지만 썬이 내버려 둔 덕분에 다들 똑똑히 지켜볼 수 있게 됐지. 게다가 로메오 클레멘스도 원 스트라이크를 잡았기 때문에 도망치기 어려워졌어.”
“또다시 스트라이크를 던질 거라는 거죠?”
“그래. 그것도 방금처럼 완벽한 공을 던져야 해. 투수로서는 엄청 스트레스받는 상황에 몰린 거라고.”
조나단 짐머맨의 말처럼 로메오 클레멘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3볼 이후에 첫 스트라이크를 잡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상황이 유리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박유성에게는 공 하나를 더 지켜볼 여유가 있었다.
반면 로메오 클레멘스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던져야 했다.
“후우…….”
길게 숨을 고르던 로메오 클레멘스의 시선이 임기성의 가랑이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임기성이 침착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코스는 바깥쪽.
구종은 포심 패스트볼.
“썬이 몸 쪽 공을 노린다고 생각하는 건가?”
사인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로메오 클레멘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현재로서는 바깥쪽 빠른 공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었다.
투구판을 밟은 로메오 클레멘스는 잠시 뜸을 들였다.
비록 무브먼트에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투심 패스트 볼과 포심 패스트 볼은 똑같은 빠른 볼 계열.
성급하게 공을 찔러 넣기보다는 일부러 시간을 끌어서 박유성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해 0.749의 타율을 기록한 박유성에게 그런 뻔한 잔재주는 통하지 않았다.
‘딱 봐도 빠른 공 같은데…… 이걸 쳐야 하나?’
어렵지 않게 로메오 클레멘스의 속내를 읽은 박유성은 몸 쪽 공에 초점을 맞췄다.
로메오 클레멘스가 다시 한번 바깥쪽을 공략한다면 하나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로메오 클레멘스의 손끝을 빠져나간 공은 바깥쪽으로 날아들었고.
박유성은 눈으로 공을 훑으며 방망이를 거둬들였다.
“스트라이크!”
바깥쪽 꽉 차게 들어온 공에 구심도 박유성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른팔을 들어 올렸고.
그렇게 볼카운트가 가득 채워졌다.
“잔인하다. 잔인해.”
그 모습을 더그아웃에서 지켜보던 송찬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김혜성이 동의한다며 쓰게 웃었다.
“유성이 쟤는 투수 피 말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니까요.”
“그래서 내가 스타즈에 남았잖아. 메이저리그 가면 뭐 해? 저 녀석이 따라올 텐데.”
“에이, 형. 유성이 때문에 메이저리그 포기한 거 아니잖아요?”
“유성이 때문 맞아. 솔직히 저 정도는 해야 메이저리그에서도 살아남지.”
“형도 올림픽하고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 잘했잖아요?”
“잘하긴 무슨. 그냥 밥값만 한 거야. 유성이 정도는 해야 잘한 거고.”
“그건 너무 기준이 높지 않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손지원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자 송찬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원이 너는 유성이하고 같은 학교였으니까 알잖아? 유성이가 외계인이냐? 사이보그야?”
“의심은 가는데 증거가 없습니다.”
“유성이도 우리하고 똑같은 인간이야. 그럼 유성이를 기준으로 잡아야지. 왜 유성이를 외계인 취급하는 거야? 그러면 마음이 편해?”
“그래도 유성이를 기준으로 잡으면 박탈감이 크지 않을까요?”
“원래 내 목표는 현민이 형이었어. 현민이 형이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니까 현민이 형을 잡을 수 있는 투수가 된다면 해외 진출을 해도 되겠다 싶었지. 그런데 유성이 저 녀석은…… 도저히 이길 자신이 없어.”
지난 시즌 나눔 리그 투수 3관왕과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을 때.
파이터즈를 떠나 드디어 빛을 보게 됐다는 축하만큼이나 스타즈에서 뛰었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졌다.
성적이 좋은 팀에서 골든 글러브 투수가 나오는 게 일반적이긴 하지만.
0.749의 시즌 타율을 기록한 박유성을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은 국가대표 우완 에이스인 송찬우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작년에는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준비하느라 몰랐는데 이번에 캠프 가서 청백전 치르다 보니까 유성이를 상대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겠더라.”
“그래도 형은 피안타율 7할 언더잖아요.”
“유성이도 청백전이라고 살살 한 거잖아. 막말로 저렇게 덤볐어 봐. 내가 무슨 수로 아웃을 잡냐?”
그때 로메오 클레멘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공을 던졌고.
따악!
그 공을 박유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잡아당겼다.
그러자 송찬우가 타구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넘어갔다.”
“진짜요?”
“소리만 들으면 알아.”
그 말처럼 우중간으로 빨랫줄처럼 날아간 타구는 담장을 지나 외야 바비큐석까지 날아갔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시즌 첫 홈런을 기록합니다!
-박유성 선수, 정말 대단하네요. 풀카운트 상황에서 몸 쪽으로 들어오는 실투를 놓치지 않고 때려냈습니다.
쏟아지는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돈 박유성은 블레이크 테일러, 박준수와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에 유유히 더그아웃으로 들어갔다.
반면 로메오 클레멘스는 통역을 사이에 두고 임기성과 언쟁을 벌였다.
“대체 왜 몸 쪽 사인을 낸 거야? 썬이 몸 쪽 공을 노리고 있는 줄 몰랐던 거야?”
“로메오. 진정해. 그렇다고 계속 바깥쪽 공만 던질 수는 없잖아.”
“젠장할! 제발 생각이라는 걸 해. 썬이 바보야? 네 뻔한 리드를 몰랐을 것 같아?”
“뭐? 형, 지금 저한테 욕한 거 맞죠?”
“로메오 선수. 지금 흥분한 거 같은데 침착해요. 야구팬들이 보고 있습니다.”
통역사의 사인을 받은 이승오 투수 코치가 재빨리 마운드에 올라와 로메오 클레멘스를 달랬다.
하지만 로메오 클레멘스는 좀처럼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이 타구가 다시 한번 좌중간을 가릅니다! 3루 주자 블레이크 테일러가 홈으로! 2루 주자 박준수 선수까지 홈을 밟습니다! 스코어는 3 대 0! 스타즈가 1회부터 타격을 폭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