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33화
39. 카운트다운(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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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적으로 MVP 시상식은 한국 시리즈가 끝나는 달에 열린다.
시즌 종료 후에 투표가 진행되는 골든 글러브 시상식과 달리 MVP 투표는 시즌 직후 진행되기 때문에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2029년 MVP 시상식은 작년보다 한 달 늦은 11월 말에 진행됐다.
“무슨 놈의 시상식이 동네 장터도 아니고…….”
“어쩔 수 없잖아. 박유성이 참석을 못 하는데.”
“그러게 누가 아시아 프로 야구 챔피언십에 나가래?”
경인 스포츠 최덕수 기자가 한마디 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다들 헛웃음을 흘렸다.
“최 기자. 아무리 박유성이 미워도 그건 아니지. 박유성이 아시아 프로 야구 챔피언십 나간다고 자청했어? 협회가 강제로 뽑은 거잖아?”
“나가기 싫으면 거절하면 됐잖아?”
“그럼 또 몇몇 기자들이 기사 썼겠죠. 신인이 건방지게 국가의 부름을 거부했다고요. 아니에요?”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해? 암튼 박유성 때문에 시상식 일정 밀린 게 사실이잖아.”
“그럼 타격 8관왕에 신인상, MVP까지 받는 박유성 빼고 무슨 시상식을 해요?”
“우리나라에 나눔 리그밖에 없어? 드림 리그도 있잖아!”
“그 드림 리그 수상자들이 시상식 연기에 동의했다잖아요.”
“막말로 박유성 빠진 반쪽짜리 시상식을 누가 좋아하겠어?”
“그럼 대회 중간에 잠깐 귀국해서 참가하든가.”
“그러면 대회보다 시상식이 먼저라는 기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허, 이거야 원 무슨 말을 못 하겠네. 다들 박유성한테 뭐라도 얻어먹었어? 왜들 이래?”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나눔 리그 MVP하고 신인상 누구 뽑으셨어요?”
“……뭐?”
“누구 뽑으셨냐고요.”
갑작스럽게 훅 들어온 질문에 최덕수 기자는 입을 다물었다.
시즌 초에 홍민호 기자 등과 함께 박유성을 절대 뽑지 말자고 약속을 했지만.
0.749의 타율에 타격 8관왕을 차지한 박유성 이외의 선수에게 표를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에 박유성 안 뽑고 그러시는 거면 인정.”
“이거 만장일치 깨지는 겁니까?”
“저는 그럴 줄 알고 투표용지 사진 찍어놨습니다.”
“그거 다른 신문사들도 마찬가지일걸?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도록 전부 다 촬영해 놨을 거야.”
“모두가 박유성이라고 말할 때 다른 선수를 뽑는 용기! 존경합니다, 선배님.”
“근데 그거 용기 맞아요? 객기 아니에요?”
“야, 인마. 야구 대기자님 듣겠다.”
결국 최덕수 기자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고.
베이스볼 패치 공윤경 기자는 보란 듯이 코웃음을 흘렸다.
“진짜 저 인간들은 언제 철드나 몰라요.”
“최 기자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 철들기에는 너무 늦은 거 아니야?”
“하긴. 우리 막내 삼촌도 그래요. 토토 하겠다고 야구 기자인 나한테 물어본다니까요?”
“그래서? 대답해 줬어?”
“일부러 틀린 정보만 알려주니까 연락 안 오던데요?”
“그러다 명절 때 큰집 못 가는 거 아냐?”
“우리 집이 큰집인데요? 그리고 저 원래 명절에 안 쉬는데요?”
“어휴. 너나 좀 철들어라.”
“이 정도면 철 많이 든 거죠. 저 처음에 수습했을 때 생각해 보세요.”
“그건 인정.”
“인정이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뭐 어쩌라고 인마. 이게 짬 좀 찼다고 까불지?”
나영진 기자가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공윤경 기자는 눈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암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투표 결과가 중요하죠.”
“만장일치냐 아니냐?”
“선배는 어느 쪽일 거 같아요?”
“난…… 그래도 한두 표쯤 꼬장 부리는 인간이 나올 거 같은데?”
“그러다 야구계에서 매장당할 수도 있는데요?”
“홍민호 기자 봐라. 그렇게 사고를 쳐놓고도 아직도 기자질 하잖아?”
박유선 사태 이후 기자 협회에서 제명까지 당할뻔 했던 홍민호 기자는 여전히 오선 스포츠에 근무하고 있었다.
현장 취재는 거의 못 하고 책상만 지키고 있는 신세라지만.
모두가 예상했던 말로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홍 기자님, 이혼하셨다면서요?”
“이혼을 한 게 아니라 당한 거지. 애들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잖아.”
“어휴. 애들이 무슨 죄예요?”
“그러는 유성이 동생은 무슨 죄냐?”
“잘난 오빠 둔 죄?”
“그럼 못난 아빠 둔 죄도 받아야지.”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메이저 언론사 간판급 기자의 몰락은 권위 의식에 빠져 있던 기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물론 아직도 최덕수 기자 같은 사람들이 남아 있긴 하지만.
기득권에 편승해 박유성을 깔보던 기자들 상당수가 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그런데 진짜 만장일치 안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긴. 민주주의 국가에서 개인 의견은 존중해 줘야지.”
“타격 8관왕에 리그를 씹어 먹은 타자 대신 다른 선수를 뽑는 것도 존중해 줘야 해요?”
“대신 책임도 본인이 지는 거잖아. 꼬장 표가 한 장이라도 나오면 아마 야구팬들이 들고일어나겠지. 해외에서도 이변이 일어났다고 떠들어댈 거고.”
“메이저리그에서도 MVP하고 사이영상 투표 때마다 시끄럽잖아요?”
“그러니까. 세계 최고의 리그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투표 결과에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데 박유성을 안 뽑는다? 그럼 말 다 한 거지.”
나영진 기자는 이탈 표가 나올 거라 예상했지만 실제 투표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신인왕은 물론이고 MVP 투표 역시 만장일치.
애당초 경쟁 상대 자체가 없다 보니 다른 선수에게 표를 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투표 결과를 미리 확인한 주최 측은 예년과 달리 나눔 리그보다 드림 리그 수상을 먼저 진행했다.
“이제 나눔 리그 타이틀 홀더 시상이 이어질 텐데요. 일단 시상은 한꺼번에 진행하고 수상 소감 시간을 최대한 보장해 드릴까 하는데 박유성 선수, 어떻게 생각하세요?”
신인왕에 MVP까지 10개의 트로피를 받아야 했던 박유성은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그렸고.
그렇게 전무후무한 시상식이 이어졌다.
“나눔 리그 타격 부분 수상자는 스타즈의 박유성 선수입니다. 시상은 프로 야구 협회 신세혁 사무총장께서 해주시겠습니다.”
타격왕 타이틀을 시작으로.
홈런과 타점, 득점, 최다안타, 도루, 장타율, 출루율 트로피를 한꺼번에 건네받은 박유성은 다시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러고는 저만치 앉아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박유신을 향해 말했다.
“아까 신인상 받을 때 소감을 다 말해서요. 이번에는 다른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기 제 동생이 있는데요. 이제 초등학교 3학년 올라가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킬까 하는데 자꾸 야구 대신 축구를 한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야구가 딱이거든요. 박유신! 보고 있어? 형은 타격 8관왕 했거든? 이 기록 네가 깨봐. 그럼 너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 알았지?”
2회차 시절 박유신이라 해도 올 시즌 박유성의 기록을 깨는 건 불가능했지만.
박유신은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회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거 벌써부터 10년 후가 기대되는데요? 혹시 동생도 신성 고등학교 입학 예정인가요?”
“아마 그럴 겁니다. 집하고 가까워서요.”
“만약에 집 근처에 다른 학교가 새로 생긴다면 그곳으로 진학 보낼 생각은요?”
“유신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만 가능하면 신성 고등학교에서 제가 못다 이룬 꿈을 이뤄줬으면 좋겠습니다.”
“박유성 선수가 못다 이룬 꿈이 있나요?”
“전국 제패요.”
“전국 제패? 그러니까 고교야구 전국대회 싹쓸이를 말하는 거죠?”
“네. 못난 형을 대신해 유신이가 대신 이뤄줬으면 좋겠습니다.”
구석에 앉아서 박유성의 수상 소감을 듣던 신상욱 회장이 씩 웃었다.
솔직히 박유성이 신성 고등학교를 전국 최강으로 이끌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전국 제패를 운운하니까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유성이 동생이 좋아하는 게 뭐야?”
“유신이요? 송흔민 좋아해요.”
“형이 박유성인데 송흔민을 좋아해?”
“아버님이 유성이는 야구 선수, 유신이는 축구 선수로 키우려고 생각하셨대요. 종목이 같으면 비교당한다고요.”
“그래도 열 살 터울인데 괜찮지 않을까?”
“그래서 저도 열심히 설득 중이에요. 아버님도 형제가 국가대표 유니폼 입고 뛰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고요.”
“그러려면 유성이 동생도 유성이만큼은 해야겠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유성이만큼 하는 게 어디 쉽겠어요?”
“그건 모르는 거지. 유성이 유전자를 나눠 받았을지도.”
“그렇게 따지면 유성이 아들을 야구 시켜야죠.”
옆에 앉아 있던 손녀 신민아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신상욱 회장이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벌써 그렇게 가까워진 거야?”
“뭐가요?”
“유성이하고 자식 계획까지 세운 거냐고.”
“할아버지도 참. 데이트 할 시간도 없는데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난 찬성이다.”
“뭐가 찬성이에요?”
“손주가 야구하는 거 찬성이라고. 그러니까 유성이하고 잘해봐.”
“할아버지만 가만히 계시면 잘될 거 같은데요?”
신상욱 회장의 바람대로 신민아는 박유성과 잘 만나고 있었다.
박유성이 워낙에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박유성을 위해 신민아가 직접 집으로 찾아가는 노력을 선보인 덕분에 박유성의 가족들과도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신상욱 회장은 그 정도로도 성에 차지 않았다.
“유성이 내후년이면 미국 가는데 나더러 가만있으라고?”
“제 연애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일단 빠져 계세요.”
“그러다 유성이 놓칠까 봐 그러지.”
“옆에서 자꾸 간섭하면 잘될 일도 안 된다니까요?”
“그래. 알았다. 알았어. 가만히 있을 테니까 제발 잘해라. 알았지?”
“네. 할아버지.”
연애만 하다가 끝이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 들긴 했지만.
손녀 중에서 그래도 가장 똑 부러진 신민아라면 제 욕심에 박유성을 놓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뭐가 남았지?”
“MVP 수상이 남았습니다.”
“그럼 먼저 일어날까?”
“그래도 끝까지 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박유성 선수가 회장님께 따로 감사를 할 수도 있습니다.”
“아까 했는데 무슨.”
번거로워지기 전에 자리를 피하려 했던 신상욱 회장은 마지못해 자리를 지켰다.
신인왕 시상식 때 언급을 했던 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건만.
MVP 시상 후 인터뷰가 진행되자 박유성이 몸을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까 오늘 세 번째 소감을 발표하게 됐는데요. 준비했던 인터뷰는 처음에 다 해서 이번에도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운 좋게 LA 올림픽에 참가하게 됐을 때 다른 종목 선수들도 다 저희처럼 좋은 숙소를 배정받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야구 대표팀만 특별히 대우를 받는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좋은 숙소에서 잘 먹고 푹 쉰 덕분에 더 열심히 뛸 수 있었고요. 제가 몸담고 있던 팀의 구단주라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 야구선수들을 대표해서 저기 앉아 계신 신상욱 회장님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유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 카메라가 신상욱 회장을 비췄다.
그러자 시상식에 참가했던 프로 야구 선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신상욱 회장을 향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회장님. 한번 일어나시죠.”
“허허. 뭘 그렇게까지 해?”
잠시 뜸을 들이던 신상욱 회장도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날.
주식 개장과 동시에 신성 그룹 관련 주식이 전부 상한가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