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인생 3회차! 329화
38. 한국 시리즈는 처음이라(11)
1회차 시절에는 코비 아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코비 아노가 히어로즈에서 뛰던 그 시기 박유성은 2군에 머물러 있었다.
코비 아노를 본격적으로 상대한 건 2회차 시절부터였다.
당시 코비 아노에 대한 평가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준수한 제구력과 다양한 구종을 가진 기교파 투수.
도미니카 공화국 특유의 기질 때문에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경기력 차이가 크다는 게 단점으로 지적받긴 했지만 15승에 3점대 이하의 평균 자책점을 기대할 수 있는 에이스급 투수로 분류됐다.
올 시즌 코비 아노의 성적은 15승 8패에 평균 자책점 3.36.
총 29경기에 선발 등판해 19번의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할 만큼 꾸준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다만 여전히 피홈런은 많은 편이었다.
대한민국 야구 수준을 깔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성기만큼 구속이 빠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승부를 걸다가 장타를 허용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2회차 시절 박유성도 그런 코비 아노의 성향을 빨리 파악하고 빠른 카운트에서 공략해 5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데뷔 후 3년간 25개의 홈런을 쳤으니 그중 20퍼센트를 코비 아노가 헌납해 준 셈.
‘오늘 하나 추가해 볼까?’
루틴을 마친 박유성이 씩 웃으며 어깨 위로 방망이를 걸쳐 들었다.
그런 박유성이 얄미워 보였을까.
후앗!
코비 아노의 공이 몸 쪽으로 붙어 날아들었다.
-3구는 몸 쪽 볼! 박유성 선수가 몸을 비틀어 피해냅니다.
-포심 패스트 볼이었는데요. 글쎄요. 지금 투 볼 상황이거든요? 저렇게 공을 낭비할 때가 아닙니다.
-박유성 선수가 특별히 홈플레이트 쪽에 붙어 서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요.
-구심이 바깥쪽 공을 타이트하게 잡아주고 있는 상황에서 붙어 설 이유가 없죠. 몸 쪽 사인이 나왔는데 공이 빠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지적대로 나경석은 어쩔 수 없이 몸 쪽 스플리터 사인을 내야 했다.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공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면 한복판을 걸쳐야 하는데 박유성이 놓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코스는 몸 쪽.
커브로는 카운트를 잡기 어렵고 슬라이더는 몰릴 가능성이 높으며 체인지업을 높게 던졌다간 장타로 이어질 것 같았다.
빠른 공은 방금 던졌으니 남은 공은 스플리터뿐이었다.
스플리터에 대한 분석이 끝났다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지난 경기에서도 박유성이 스플리터를 건드리지 않았던 만큼 이번 공에도 아량을 베풀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프로 40년 차 박유성은 그런 나경석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후앗!
한참 동안 공을 쥐고 있던 코비 아노가 투구판을 박차고 나오자 박유성도 곧바로 오른발을 내디뎠다.
스플리터의 무브먼트는 던지는 투수에 따라 달라지는데 코비 아노의 공은 홈플레이트 앞쪽에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박유성은 평소보다 히팅 포인트를 앞으로 끌고 나왔다.
그러고는 스플리터가 막 떨어지려던 찰나에.
따악!
방망이 중심에 정확하게 공을 얹었다.
-아아, 큽니다!
-이건 넘어간 거 같은데요?
-중견수 뒤로! 중견수 뒤로! 중견수가…… 이 타구를 지켜만 봅니다! 홈런! 박유성 선수가 어제 경기에 이어 오늘도 선두타자 홈런을 때려냅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한국 시리즈는 처음일 텐데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있습니다.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당당히 그라운드를 돈 박유성은 나경석이 보는 앞에서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제가 말했죠? 스플리터 분석 끝났다고.”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 인마.”
“그럼 고생하십셔~”
마지막으로 나경석을 긁은 뒤에 박유성은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동료들과 하이 파이브를 나누었다.
“나이스 홈런!”
“역시 박유성! 하나 칠 줄 알았다.”
“잘했다. 박유성!”
“우리 막내가 또 해주는구나. 하하.”
1회 초를 잘 막아낸 제이슨 마이너도 박유성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고마워, 썬.”
“고맙긴. 앞으로도 계속 점수 뽑아줄 테니까 마음 편하게 던져, 마이너.”
“오케이. 너만 믿을게.”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선수들의 표정을 보며 박유성도 씩 웃었다.
지난 LA 올림픽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느꼈던 거지만 이런 단기전에서는 기선 제압이 중요했다.
그것도 해줘야 하는 타자가 점수를 뽑아내 주면 더그아웃 분위기가 확 살아났다.
“유성아. 근데 너 왜 스플리터 쳤어?”
“뭐?”
“우리한테는 빠른 공 치라며?”
“너 바보냐?”
“……?”
“내가 빠른 공을 쳐서 홈런 때리면 너한테 빠른 공 던지겠냐?”
“아아……. 그래서 일부러 스플리터 친 거야?”
“스플리터를 던지더라도 아마 이번처럼 높게 던지지는 못할 거야. 철저하게 낮게 던지겠지. 그러니까 멍청하게 속지 말고 빠른 공만 노려. 알았어?”
“그래. 알았어.”
“벨트 밑으로 날아드는 공은 버리고. 똥꼬에 힘 빡 주라고.”
“그놈의 똥꼬 타령은. 알았다고.”
박유성이 장태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는 사이.
2번 타자 블레이크 테일러가 타석에 들어섰다.
블레이크 테일러의 타석 위치를 확인한 나경석은 바깥쪽에 걸쳐 들어오는 슬라이더를 주문했다.
시즌 중에도 오른손 타자를 상대로 자주 던졌던 공인 만큼 무리 없이 카운트를 잡아낼 거라 여겼다.
하지만 박유성에게 결정구를 얻어맞았다는 충격 때문일까.
코비 아노의 손끝을 떠난 공은 나경석의 요구보다 바깥쪽으로 빠져 버렸다.
-초구는 볼. 스트라이크 존을 크게 벗어납니다.
-코비 아노 선수가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는데요? 밸런스를 빨리 찾지 못한다면 송혁 감독이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1회 말인데요.
-한국시리즈 2차전의 1회 말이죠. 정규 시즌이라면 한 경기 정도는 주고 가도 상관없지만 1차전을 대패한 상황에서 2차전까지 일방적인 분위기로 끌려가 버리면 홈 시리즈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이선철 해설위원의 우려를 들은 듯 코비 아노가 몸 쪽에 빠른 공을 찔러 넣어 스트라이크를 잡아냈다.
그리고 3구째 다시 바깥쪽 슬라이더를 던져 구심의 스트라이크 콜을 이끌어냈다.
“후우…….”
불안한 얼굴로 경기를 지켜보던 송혁 감독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비 아노는 짜증이 난 모양이지만 송혁 감독은 박유성에게 얻어맞은 홈런을 자연재해라 여겼다.
한국시리즈 1차전 4타수 4안타를 포함해 포스트 시즌에서 20타수 17안타 맹타를 휘두르는 박유성을 상대로 3볼에서 아웃을 잡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
괜히 볼넷으로 루상에 내보냈다가 경기 초반부터 휘둘리느니 그냥 한 점 주고 시작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다만 홈런의 여파가 오래갈까 봐 걱정이었는데 빠르게 호흡을 되찾는 모습을 보니까 일단은 한 시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4구째 던진 체인지업을 블레이크 테일러가 참아내면서 분위기가 다시 이상해졌다.
“뭐야? 이걸 참아?”
포구를 한 나경석이 헛웃음을 흘릴 만큼 체인지업의 궤적은 완벽했다.
박유성이 좌타자가 아니라 오른손타자였다면 이 공으로 승부를 걸어도 됐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평소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유인구에 약점을 보여온 블레이크 테일러가 반응해야 정상인데 블레이크 테일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앞서 박유성이 언급했던, 바깥쪽 체인지업을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코비 아노 선수가 정말 좋은 공을 던졌는데요. 블레이크 테일러 선수가 참아냈습니다.
-투 스트라이크 이후에 저 공을 골라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확실히 스타즈 선수들의 집중력이 좋아 보입니다.
-이제 볼 카운트가 투 볼 투 스트라이크로 바뀌었는데요. 코비 아노 선수는 여기서 어떤 공을 던져야 할까요?
-글쎄요. 사실상 조금 전에 던졌던 체인지업이 결정구나 다름없던 상황이라 어떤 공을 던지더라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제 코비 아노 선수가 5구를 던집니다. 이번에도 바깥쪽! 148㎞/h의 빠른 공이 꽂혔지만 구심은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코비 아노 선수가 좋은 공을 던졌는데요. 이 공을 4구째 던지고 이번에 체인지업을 던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풀카운트까지 끌고 온 블레이크 테일러는 몸 쪽으로 날아든 빠른 공을 걷어낸 뒤에 다시 한번 바깥쪽으로 떨어진 체인지업을 골라내고 볼넷을 얻어냈다.
그러자 송혁 감독이 다급히 송신형 투수 코치를 찾았다.
“지금 준비시킬 수 있는 투수가 누가 있어?”
“윤권이하고 희수가 가능합니다.”
“일단 둘 다 준비시켜.”
“빨리 바꾸시게요?”
“이번 이닝을 잘 막아낸다고 하더라도 오래 끌고 가긴 어려울 것 같아. 다음번 유성이 타석 때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알겠습니다. 감독님.”
송혁 감독의 지시를 받은 송신형 투수 코치는 좌완 박윤권과 우완 강희수를 한꺼번에 준비시켰다.
오늘 경기를 어떻게든 잡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송혁 감독 특유의 빠른 투수 교체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히어로즈의 준비보다 먼저 코비 아노가 무너졌다.
따악!
3번 타자 박준수가 몸 쪽으로 들어오는 초구 빠른 공을 잡아당겨 1, 2루간을 꿰뚫은 데 이어.
따악!
4번 타자 다니엘 브리토가 오른쪽 펜스 상단을 직격하는 싹쓸이 2루타를 때려낸 것이다.
5번 타자 장영호는 바깥쪽 체인지업에 속아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6번 타자 이동엽이 다시 한번 초구 빠른 공을 잡아당겨 안타를 때려내면서 2루 주자 다니엘 브리토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따악!
박유성에게 귀에 피가 날 때까지 잔소리를 들었던 장태수가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르자 스타즈 파크가 떠나갈 듯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익수 뒤로! 우익수 뒤로! 우익수가…… 잡을 수 없는 곳으로 공이 날아갑니다! 홈런! 장태수! 신성 고등학교 듀오가 오늘 경기에서 나란히 홈런포를 때려냅니다!
“크아아아아!”
조마조마한 눈으로 타구를 지켜보던 장태수는 괴성을 내지르며 그라운드를 돌았고.
그렇게 2차전 역시 스타즈가 15 대 0, 대승을 거두었다.
└역대 최악의 한국 시리즈.
└인정.
└진짜 살다 살다 이렇게 일방적인 경기는 처음 봄.
└1차전 13 대 0, 2차전 15 대 0. ㅋㅋㅋㅋ
└파이터즈가 코시 올라왔어도 이렇게까지는 안 털렸을 듯.
└스타즈 타자들이 점수 뽑은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히어로즈 타자들은 한 점을 못 내나요?
└1차전과 2차전 때 득점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스코어링 포지션에 주자가 나간 게 다 해서 3번밖에 안 돼요.
└타자들이 열심히 안 한 게 아니라 스타즈 수비가 워낙에 짱짱해서 그래요. 내야에서는 블레이크 테일러하고 최일준이 다 잡아버리고 외야는 박유성하고 다니엘 브리토가 뛰어다니는데 무슨 수로 안타를 칩니까.
└히어로즈가 스타즈 상대로 점수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은 홈런뿐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냥 박유성 때문입니다. 박유성을 막지 못하니까 지는 거예요.
└포스트 시즌 0.870에 6홈런, 15타점, 21득점, 6도루. 한국 시리즈 7타수 7안타 2홈런 타율 10할.
└갑자기 이건 왜?
└야알못들이 또 야구를 혼자 하냐고 개소리 늘어놓을까 봐 박유성 포스트 시즌 성적 올림.
└베팍에서 아직도 그딴 개소리 하는 사람이 있음? ㅋㅋㅋ
└그런 애들은 야알못이 아니라 국적이 다를 겁니다.
└일본도 포스트 시즌에서 잘해야 진짜라고 떠들다가 박유성 활약상 보고 입꾹닫 시전 중입니다 ㅋㅋㅋ
메이저리그 구단들도 박유성이 보여준 활약상에 감탄을 터뜨렸다.
“로이. 어제 경기 봤어?”
“네. 봤습니다.”
“그래서 감상은?”
“뭐…… 잘하더라고요.”
“그래. 썬은 2차전에서도 잘했어. 보통 잘한 게 아니라 완벽했다고.”
다저스의 앤드류 프라이드맨 사장은 아침부터 로이 홀랜드 보좌역을 불러다 놓고 박유성에 대한 극찬을 늘어놓았다.
다른 때 같았다면 다저스부터 신경 쓰라고 잔소리를 했을 로이 홀랜드 보좌역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바로 어제.
지구 라이벌인 자이언츠에 덜미를 잡히면서 월드 시리즈 진출이 좌절됐기 때문이다.